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7
37회. 녹림의 기둥임을 증명하라
산동성 제녕 북쪽 량산현.
황하를 끼고 있는 인적 드문 숲 속에 뜻밖에도 거대한 장원이 서 있다. 정문의 편액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힌 글은 광명장원(光明庄園).
광명장원의 심처에 환영신마 웅재귀와 오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지위가 비슷한 듯 은연중에 서로를 배려했다.
웅재귀가 강탈해 온 팔주령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휴우! 이번에는 정말 쉽지 않았소. 흑암대의 절반을 잃었으니……. 쩝.”
여자, 월하선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백두마군이 계셨는데 그랬단 말인가요?”
유명교의 백두마군은 칠파이문 장문인들도 굽어보는 존재들이다. 비록 웅재귀가 술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손해 볼 사람은 아니었다.
“애송이 놈의 무위가 어찌나 뛰어나던지. 흑암대주가 일 초식도 받아 내지 못할 정도였소.”
“신마의 상대로는 어떻던가요?”
“그날은 성물을 가져오는 임무가 중하여 급히 자리를 피했소만……. 솔직히 남아서 끝까지 싸웠다 하더라도 이길 자신은 없었소.”
“정말 놀랍군요. 백두마군이 당해 내지 못한다니…….”
“그런 무공은 처음 보았소. 그놈이 하늘에서 몸을 아홉 번 뒤집자 도기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데……. 말해 줘도 믿지 못할 거요.”
순간 월하선자의 눈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알 것 같아요. 저도 십두마병 시절에 그 비슷한 검법을 본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나이가 몇이나 되기에 애송이라고 하는 건가요?”
“맞아야 스무 살 정도로 보이더이다.”
“그럼 그놈의 아들이거나 제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놈이 누구요?”
“이십여 년 전 교주님의 명으로 강남에 교당을 세운 적이 있어요. 그때 그놈과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찾아와 난리를 치는 바람에 교당을 폐쇄해야 했어요.”
“아, 얼핏 들은 것도 같은데…….”
웅재귀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월하선자가 말한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 교당과 십두마병의 숫자가 많아 교내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해서다.
유명교는 각처의 교당에서 수도사들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 정확히는 살아 있는 수도사의 머리를 유명교의 신인 염마왕에게 바친다.
열 명을 바치면 십두마병, 백 명을 바치면 백두마군, 천 명을 바치면 천두마왕이 된다. 그런 제사를 통해 제사장은 염마왕(閻魔王)으로부터 초능(超能)을 얻는다. 유명교에서는 그 과정을 탈속(脫俗)이라고 한다.
탈속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수도사가 필요하지만 그런 수도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명한 수도사를 바쳤지만 실패한 건 셀 수도 없다.
인신공양을 해야 하는 만큼 비밀 유지가 필수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에는 무분별하게 제사를 드렸고, 그것은 결국 교당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 뒤로 교주는 ‘조금 더딜지라도 더욱 은밀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지금까지 무려 여섯이나 되는 백두마군이 탄생했지만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교주가 원하는 건 천두마왕. 왕이라 불리지만 권능은 신에 가깝다. 그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 유명교는 계속 음지를 떠돌고 있다.
월하선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후에 그놈은 참월검객이라는 별호를 얻었다고 하더군요. 교주님께서 ‘교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라’고 해 묻어 두었는데…….”
“허면 그 애송이가 참월검객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오?”
“이 몸이 직접 그 애송이의 검법을 본 게 아니라서 그렇다고 단정하지는 못하겠네요.”
“쩝! 교주님께서 하루빨리 천두마왕이 되셔야 그 잡것들을 쓸어버릴 텐데…….”
“백두마군만 더 있어도 가능해요. 교주님께서도 칠마군을 세운 뒤에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셨으니까.”
현재 백두마군은 여섯이다.
하나의 백두마군이 더 늘어나기까지 얼마가 걸릴지는 모른다. 한 달 후가 될 수도 있고, 십 년 후가 될 수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교주에게 달려 있었다. 십두마병을 만드는 것은 백두마군도 가능하지만, 백두마군은 교주의 권한인 까닭이다.
“백두마군이야 교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 우리는 십두마병이나 열심히 만들어 냅시다.”
“그러려면 팔주령을 더 모아야 해요. 최소한 교당의 장로들은 십두마병이 돼야 한다고 봐요.”
“끙!”
웅재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팔주령은 제물을 바치는 순간 한 사람에게 귀속된다.
십두마병은 물론 백두마군, 심지어 천두마왕이 목표인 교주도 하나의 팔주령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점점 팔주령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고?
팔주령은 제작 가능한 물건이 아니다. 고대 동방의 성물로 그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십두마병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희귀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는 상방을 이용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칠파이문의 경각심만 일깨우는 꼴이 돼요.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찾아내는 수밖에 없어요.”
웅재귀가 탐욕스럽게 팔주령을 바라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력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건 웅재귀도 마찬가지다. 백두마군인 그는 더 많은 십두마병을 거느리고 싶었다. 다른 백두마군들의 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
남직례성 지주.
관도를 따라 걷는 오봉십걸들의 몰골은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누구라도 두 달 동안 풍찬노숙하면 그들과 비슷한 행색이 되리라.
그러나 허름한 옷차림과 달리 눈빛은 오봉산에 있을 때와 달리 형형했다. 걷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 매일 백자구결에 매달린 덕분이다.
터덜터덜 걷던 여섯째 장소봉이 뒤를 힐끔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어이쿠! 저치들 눈빛이 장난 아니네. 녹림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인가?”
여덟째인 이철산이 말을 받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만사평까지 사나흘 정도 거리라더니 이제 슬슬 보이는 것 같네요.”
“흠! 역시.”
“그러게.”
오봉십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아침부터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독한 눈빛과 기괴한 병기를 보면 척 봐도 녹림대회에 참가하는 도적들이다.
인원수는 오봉십걸들처럼 열 명 남짓. 그보다 적은 경우도 있었지만 열 명 정도 단위가 가장 많았다. 산채를 비울 수가 없어서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나오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어렴풋이 서로의 정체를 짐작하고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다.
사흘 후.
오봉십걸들은 마침내 만사평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이름만 듣고는 들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사평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였다.
중앙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봉십걸들도 언덕이 잘 보이는 적당한 위치에 짐을 풀어 놓았다.
긴 여행에 지친 몇몇은 봇짐을 베고 드러누웠다.
탁고명도 슬그머니 그 대열에 동참하려는데 풍연초가 불렀다.
“고명아, 나하고 좀 가 볼 데가 있다.”
“어디 가려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대별산채의 형님들에게 인사는 올려야 할 거 아니냐?”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요?”
“그러니까 한 바퀴 돌아보자는 거지.”
“아이고, 형님. 때 되면 자연히 만나게 될 텐데 뭘 그리 서두르십니까?”
“인마. 그래도 우리를 거둬 준 분들인데 먼저 찾아가야 예의지.”
“어휴! 도둑놈들 끼리 무슨 예의를…….”
구시렁거리던 탁고명은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툭탁거리며 멀어져 갔다.
연적하는 오봉십걸들 속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아쉽게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야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셨으니 그렇다 쳐도, 아버지의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는 건 왜일까?
곰곰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자신을 돌보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사나흘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으니 기억이 날 리가 있나.
‘못된 아버지 같으니.’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운 건 또 뭔지.
아버지를 생각하니 어찌 된 일인지 바로 표독스러운 큰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큰엄마의 얼굴은 어제 본 것처럼 생생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꼬집히고 매를 맞다 보니 머릿속에 각인된 것 같다.
기억하고 싶은 건 흐릿하고 정작 잊고 싶은 건 생생하니 기분이 더럽다.
“젠장.”
투덜거리는 그의 소리를 들었는지 하소백이 바로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왜요?”
“끔찍하게 싫은 사람이 떠올라서.”
“누구요?”
“있어 그런 사람.”
연적하는 와룡장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와아. 오라버니 그런 표정 처음 봐요. 정말 싫어하시나 보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니까.”
“정말요?”
하소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대체 누가 연적하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 사람 살아 있어요?”
“그럴걸?”
“어디 사는지 알아요?”
“응.”
“그럼 복수해요! 오라버니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죽을 것 같은데!”
“그건 안 돼.”
“왜요?”
“큰엄마야.”
“…….”
큰엄마라는 말에 하소백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편안히 누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봉십걸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적하에게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한편 대별산채를 찾아다니던 풍연초와 탁고명은 언덕 반대편에서 독안혈도 이정안과 흑면낭인 염상철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형님들, 오봉산채의 풍연초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탁고명입니다.”
이정안과 염상철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오봉산채가 잘나가 준 덕분에 녹림에서 대별산채의 위상이 올라간 까닭이다.
특히나 오봉산채의 녹림 가입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이정안은 풍연초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하게 반겼다.
“풍 아우! 요즘 오봉산채 잘나간다면서? 오봉십걸 소문은 나도 들었네. 풍 아우 덕분에 염 형과 내가 어깨에 힘주고 다닌다니까.”
사람은 유명해지고 봐야 한다. 이제 두 번째 만남이건만 이정안은 풍연초를 친한 아우로 대했다.
그건 다소 거리를 두던 염상철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눈도 잘 마주치려 하지 않던 그가 친근한 얼굴로 물었다.
“풍 아우, 오봉십걸 중에 칼 잘 쓰는 녀석이 있다던데? 그 녀석도 이번에 데리고 왔나?”
“아, 제 의동생 말씀이십니까? 물론 함께 왔습니다. 반대편에서 오봉산채 식구들과 쉬고 있습니다.”
“잘됐군. 이따가 우리 채주님께 인사시키도록 하게. 채주님이 궁금해 하니까 말이야.”
“예.”
잠시 후 풍연초와 탁고명이 돌아갔다.
풍연초와 탁고명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정안이 중얼거렸다.
“허! 지난겨울에는 그저 그랬는데, 일 년 만에 저렇게 변하다니…….”
“나도 깜짝 놀랐소. 오봉십걸이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형도 저 두 사람의 태양혈이 도드라진 걸 보셨소?”
이정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만 해도 저 두 사람에게 부담 없이 반말을 했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대견하면서 배가 아픈, 어딘지 떨떠름한 감정에 기분이 착잡하다.
***
녹림대회 시작을 하루 앞두고 총채주 파천마군 석무해와 그의 제자인 십이마군이 한자리에 모였다.
십이마군은 석무해에게 그들이 사자로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중요한 정보를 풀어놓았다.
십이마군의 보고가 끝나자 석무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녹림대회를 연 것은 녹림의 힘을 모으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녹림은 뿔뿔이 흩어져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녹림이 뭉치면 칠파이문이라고 해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십이마군의 하나인 귀영자군이 조심스레 말했다.
“총채주님, 지금까지 모두가 그걸 바랐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강력한 구심점이 없어서다. 내가 너희에게 암천수라진경을 전수한 것은, 너희가 녹림의 중심이 되기를 바라서였다. 이번 녹림대회를 통해 너희가 녹림의 기둥임을 증명해라.”
“증명하라고요?”
“그렇다. 비무대회를 열어 녹림의 순찰과 호법을 선출할 것이다. 너희를 당할 자가 없을 테니 순찰과 호법이 되어 녹림을 하나로 묶어라. 천년의 잠에서 깨어 마침내 웅비하는 것이다!”
“맡겨 주십쇼!”
“저희가 해내겠습니다!”
석무해의 열변에 십이마군들이 격동에 찬 얼굴로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그때 머뭇거리던 음풍묘군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어, 스승님.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