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90
390회. 몰라. 말 걸지 마
양이화는 손에 든 창(槍)을 힘껏 움켜잡았다.
고막이 울릴 정도의 웃음소리에 휘청거리던 상체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백낙곤으로 만든 창대에 의지한 형국이다.
문득 ‘믿을 건 이 한 자루 창밖에 없다’던 부친의 말이 떠올랐다.
양이화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창술을 더 열심히 수련했어야 하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양가장 사람들은 누구나 어릴 때부터 양가창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창보다 금(琴)을 가까이했다.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긴장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던 그녀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천살귀조?”
벽력권 동화고는 분명 천살귀조라고 했다.
무가에서 자란 사람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아주 오래전에 천살귀조라는 대마두가 있었다. 양 손가락 끝에 달린 오 촌(五寸, 약 15센티) 길이의 칼날을 귀신처럼 다루었지. 귀조(鬼爪)를 본 사람은 무인이건 일반인이 건 살아남지 못했다.
양가장의 무술 사범은 성급(省級) 마두들에 대해 가르칠 때 천살귀조를 빼먹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들어서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결코 생략되는 법이 없었다.
백발의 천살귀조에게 쫓기는 악몽을 꾼 적도 많았다.
그런 천살귀조가 눈앞에 나타나자 양이화는 숨이 턱 막혔다.
‘모두 죽고 말 거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그녀의 귓가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천살귀조가 뭐예요?”
무당파 속가제자 남천이었다.
술사인 남천은 양이화와 같이 후방에 배치된 상태였다.
너무도 편안한 음성에 양이화는 한 순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짧은 비명과 함께 동화고가 나뒹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애써 감추며 빠르게 답했다.
“강동삼악으로 불리던 전대의 대마두예요. 양 손가락 끝에 달린 오 촌 길이의 칼날을 귀신처럼 다루지요. 귀조(鬼爪)를 본 사람은 무인이건 일반인이건 살아남지 못했다고 해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기 때문일까?
천살귀조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 술술 흘러나왔다.
“죽어 마땅한 못된 늙은이라는 거네요?”
“네에, 하지만 칠파에서도 피해 다니는 마두라서…….”
양이화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귀조(鬼爪)를 본 사람은 무인이건 일반인이건 살아남지 못했다고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다시 절망이 밀려왔다.
폐문으로 끝난 와룡장과 달리 연가무관에서는 혈겁(血劫)이 따를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천살귀조는 그런 마두였으니까.
공포로 심장이 벌렁거리자 양이화는 연무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사람들에게 달아나라고 하지 않는 거죠?’
양가장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연무백은 왜 그러지 않는지 궁금했다.
천살귀조가 비칠거리며 일어서는 동화고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걸 보면서도 와룡검객 연무백과 산해검 정격천, 고월검객 백화심, 난화검 강수빈, 비천일도 양수명은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낙양삼의’는 연가무관 쪽 무인들 중에 가장 고수.
그 ‘낙양삼의’가 초주검이 되는 걸 눈앞에서 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연무백은 암암리에 주변을 살폈다.
백오십 명이나 되는 적들은 학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넓게 퍼져 있었다.
그 앞에 절정고수라 할 수 있는 거력신도 주연신과 천뢰도 조유백, 혈우검 우병인, 그리고 외삼당 당주들이 자리하고 있다.
척 봐도 천살귀조가 앞에서 날뛰고 저들은 뒤에서 받쳐 주는 모양새다.
저들의 살기등등한 눈을 보니 한 사람도 살려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이를 어쩐다.’
철혈방이 그런 강수를 둘 줄은 미처 몰랐다.
정사 간의 분쟁에서 상대편을 몰살시키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상대 진영이 결집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 금기를 오늘 철혈방이 깨기로 한 모양이다.
압도적인 숫자로 포위한 철혈방도들을 보니 달아나기도 불가능한 상황.
지렁이도 꿈틀거린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럴 틈조차 없을 것 같다.
연적하가 품 안에서 부적 뭉치를 꺼내 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착한 것 같아. 저 늙은이처럼 다짜고짜 살수를 쓰지 않잖아. 나처럼 상대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도 없을 거야.”
남천을 힐끔 돌아보던 양이화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에 부적이 한 뭉치나 들려 있었다.
‘낙양삼의’가 맥없이 당하는 걸 보고도 부적을 꺼내 들다니?
그녀의 시선을 느낀 연적하가 변명하듯 말했다.
“혹시나 싶어서 어젯밤에 많이 만들어 뒀어요. 이게 은근히 번거로운 일이라서요. 바쁜데 괜히 신경이 분산되는 것도 있고.”
“…….”
양이화는 대꾸하지 않았다.
남천은 술사이니 부적이 그의 최선이리라.
마치 별 쓸모도 없지만 자신이 창을 들고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벽력부(霹靂符)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다루기가 힘들었는데 좀 연습하니까 잘되더라고요.”
양이화가 복잡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왜 계속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원래는 벼락을 관장하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게 빌어야 한다는데, 저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주문은 짧을수록 좋다고.”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심란한 양이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천 소협, 저는 궁금하지 않아요.”
“거참 이상하다. 다들 궁금해 하던데. 자아,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구천현녀님, 다만 의지하오니 신력으로 벽력을 드러내 주십쇼[九天玄女 但慿霹靂威神力].”
주문과 함께 연적하가 손가락을 튕겼다.
부적 하나가 천살귀조를 향해 쏜살 같이 날아갔다.
쉭-.
시퍼렇게 날 선 귀조로 동화고의 목을 베어 가던 천살귀조가 고개를 돌렸다.
생뚱맞게 부적 하나가 날아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그는 파리를 쫓듯 가볍게 왼손을 흔들었다.
사아아-.
귀조에서 일어난 유형의 기운이 부적을 갈랐다.
하지만 조기(爪氣)가 부적에 닿기 직전, 부적이 허공에서 화르륵 불타 올랐다.
“응?”
천살귀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연가무관에 술사가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봐야 술사.
상대가 유명교 십두마병급이 아니라면 신경 쓸 가치도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위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싶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다.
꽈광! 꽝-!
돌연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대경실색한 천살귀조는 황급히 옆으로 빠졌다.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놀란 동화고도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누구냐!”
안전지대로 대피한 천살귀조가 연가무관의 무인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감히 사신(邪神) 앞에서 요망한 술법을 쓰다니?
뒤늦게 밀려오는 수치심에 그의 하얀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연적하가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이런! 깜빡했네. 먼저 상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멀었네, 멀었어.”
제 머리를 툭툭 치던 연적하가 다른 부적을 뽑아 들었다.
부동신부(不動身符)였다.
연가무관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적하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믿기 어려운 얼굴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적하는 망설임 없이 네 장의 부동신부를 던졌다.
천살귀조는 또다시 부적이 날아오자 멈칫했다.
하나도 아니고 네 개나 되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다.
“감히!”
대갈일성과 함께 천살귀조는 부적을 향해 달려갔다.
하수들처럼 꼴사납게 피해 다니느니 차라리 정면 승부를 택한 것이다.
쉬이익- 쉬익-.
양손에서 뻗어 나온 열 가닥의 조기가 부적을 쓸어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부적이 마치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조기를 피하는 게 아닌가!
놀란 천살귀조는 황망한 가운데 술사를 찾았다.
그가 대체 어떤 수법으로 부적을 움직이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헉! 검결지?’
무리의 후미에서 괴상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검결지를 세우고 있었다.
‘설마 이기어검의 수법인가?’
하지만 술사의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술법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게 맞다.
‘아니겠지.’
천살귀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그사이 네 장의 부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허공에 고정되었다.
‘또 벼락인가?’
하지만 부적은 아까처럼 불에 타서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 다른 술법을 쓰려는 모양이다.
“어림도 없다!”
자리를 뜨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천살귀조는 지면을 박차고 술사에게 날아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두 다리가 마치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려고 힘을 쓸 때마다 사방에서 무형의 압력이 밀려왔다.
뒤늦게 천살귀조는 자신이 상대의 술법에 걸렸음을 알았다.
“연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손에 든 부적 뭉치에서 벽력부를 골라내던 연적하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곧 죽을 늙은이가 알아서 뭐하게?”
“이 몸의 이름은 천살귀조네. 연자도 한 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을 텐데?”
“몰라. 말 걸지 마.”
연적하가 벽력부 하나를 뽑아 가볍게 튕겼다.
“헉! 대화 중에 그 무슨 짓인가?”
화르륵-.
천살귀조의 앞에서 벽력부가 불타 올랐다.
뒤이어 먹구름이 천살귀조의 머리 위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이윽고 벼락이 천살귀조의 몸에 내리꽂혔다.
꽈광! 꽝! 꽝-!
“크아아악!”
천살귀조의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먹구름이 사라졌다.
하얀 달빛 아래 천살귀조의 전신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는 수십 개의 벼락에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 있었다.
비록 단정하던 백발은 하늘로 뻗쳤고, 옷도 군데군데 시커멓게 탔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본좌는 마교의 사람이다. 나를 죽이면 너 역시 죽게 될 것이다. 지금 나를 풀어 주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가겠다. 어떠냐?”
“흥! 똥으로 메주 쑤는 소리 하고 있네. 없던 일은 개뿔. 내가 그렇게 바보처럼 보여?”
천살귀조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다.
없던 일로 하기에는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오늘 일이 마교 고수들 귀에 들어가면 저놈은 두 발 뻗고 잠잘 수 없을 것이다. 자존심 하나에 죽고 죽이는 게 강호의 생리니까.
연적하가 차가운 눈으로 천살귀조를 보았다.
조금 전 ‘낙양삼의’의 피를 핥으며 죽음 운운할 때, 그의 운명은 정해졌다.
이번에는 네 장의 벽력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순간 천살귀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나의 부적에도 죽을 뻔했는데 네 개라니!
저 정도 숫자 앞에서는 요행도 바랄 수 없다. 반드시 죽는다.
“사, 살려다오! 제발!”
그러자 연적하는 천살귀조가 그랬던 것처럼 부적을 혀끝으로 핥으며 말했다.
“늙은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
이윽고 네 장의 부적이 천살귀조에게 팔랑팔랑 날아갔다.
부적이 다가오자 천살귀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 소리쳤다.
“아아! 안 돼! 제발! 그만! 그만해!”
“구천현녀님, 다만 의지하오니 신력으로 벽력을 드러내 주세요.”
연적하가 담담하게 주문을 외우자 네 장의 부적이 불길에 휩싸였다.
휘이이이-.
이번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천살귀조의 신형도 먹구름에 집어 삼켜졌다.
쿠르르릉! 꽈광! 꽝! 꽝-!
무지막지한 뇌성벽력에 바닥의 청석이 들썩거리고 전각까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