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91
391회. 영웅은 산만 보고 간다
먹구름이 걷혔다.
하얀 달빛이 연가무관을 환하게 밝혔다.
강동삼악이라 불리던 전대의 마두 천살귀조의 자리에는 검게 탄 덩어리만 남아 있었다.
결과를 확인한 중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철혈방의 방도들은 물론 연가무관의 무인들까지도 충격을 받은 얼굴들이다.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던 연적하가 다시 부적을 골라잡았다.
뒤늦게 그걸 본 철혈방도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천살귀조도 고깃덩어리로 만든 부적 앞에서 칼을 들고 설칠 사람은 없었다.
부방주 거력신도 주연신이 황급히 나섰다.
“소협! 우리 철혈방이 연가무관에 패했음을 인정하겠소. 앞으로는 연가무관의 일에 나서지 않으리다. 아무쪼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아직 패하지 않은 것 같은데? 천살귀조인지 뭔지 하는 늙은이 하나만 나대다가 죽었잖아. 이제 본격적으로 싸워 봐야지.”
“아니외다. 철혈방 전부가 달려들어도 천살귀조를 당해 낼 수 없소. 그런 천살귀조가 소협 손에 죽었으니 굳이 싸우지 않아도 알 수 있소. 졌소.”
“이봐, 부방주라고 했나?”
“그렇소. 노부가 바로 거력신도 주연신이오.”
연적하가 주연신을 지그시 보았다.
그와는 몇 해 전 구천노도 심통과 낙양의 상조상방을 찾아갈 때 만났었다.
‘그때도 자그마한 창해무관을 괴롭히더니만……. 상습범이네, 상습범이야.’
딱히 의도치 않아도 자꾸 얽히게 된다.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르겠다.
“그런 말 들어 봤는지 모르겠네? 올 때는 네 맘대로 왔는지 모르지만 갈 때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
“보내 주시오.”
주연신은 비굴할 정도로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연적하는 고개를 갸우뚱할 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주연신이 소리를 낮추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혹 따로 원하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시오.”
“그래도 되나?”
연적하가 관심을 보이자 주연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빈말이 아니외다. 노부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 드리겠소.”
“‘무엇이든’이라. 아니 이렇게 훌륭한 분이 왜 시비를 걸어 오셨대?”
연적하의 너스레에 주연신이 웃으며 화답했다.
“허허, 이런 게 다 인연이 아니겠소? 하늘이 우리를 만나게 하려고 그랬나 보오.”
“어이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거절을 못 하겠네요. 부방주님이 약속하신 겁니다?”
어느새 부드러워진 연적하의 말투에 주연신도 자신감을 되찾았다.
“내가 맨손으로 철혈방을 일으킨 주연신이오. 말씀해 주시오.”
“그럼 말할게요. 연가무관에서 낭인을 고용하느라 쓴 돈이 은자 백 냥쯤 돼요.”
“우리 철혈방으로 인해 지출하게 되었으니 내가 배상해 드리리다.”
주연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 냥이라면 모를까? 철혈방에 백 냥은 푼돈에 불과했다.
하지만 연적하의 요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양 부인이 그쪽 당주의 말에 크게 상처를 받았잖아요. 내가 이런 얼굴로 다녀 보니 알겠더라고요. 말이 칼보다 아프다는 걸.”
“이철원에게 사죄하라 명하겠소.”
“사죄는 당연한 거고.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가 중요한데. 당주의 팔을 자르자니 그걸 잘라서 어디에 쓸까 싶고.”
“…….”
살아나던 주연신의 얼굴이 다시 죽어 갔다.
‘뭐지? 설마 이철원의 팔 하나로도 부족하다는 소리인가?’
“주 부방주님. 개가 사람을 물었으면 개를 나무라요? 개 주인을 나무라요?”
“쿨럭! 개 주인을 나무라는 게 맞습니다.”
주연신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저 괴상하게 생긴 놈이 원하는 것은 자신인 모양이다.
“철혈방의 주인이 누구예요?”
“사악도부라 불리는 좌양선입니다.”
주연신은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십두마병 좌양선을 내세웠다.
“좌양선이라. 흠. 이렇게 합시다. 그 사람을 내 앞으로 데리고 오는 겁니다. 그때까지 철혈방은 봉문하는 것으로 하죠.”
“헉! 봉문이라고 했소?”
주연신은 이야기가 뜻하지 않은 곳으로 튀자 크게 당황했다.
자고 일어나면 세력 판도가 달라지는 이 시기에 봉문이라니?
그건 말이 봉문이지 폐문이나 다름없었다.
“주인이 없으니까 개새끼가 설치고 다니는 거잖아요. 지금은 개가 사고를 쳐도 주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으니 봉문해야죠. 안 그래요?”
“소협, 그래도 봉문은 아닌 것 같소. 개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팔 하나를 자르고 넘어가는 게 어떻겠소이까?”
주연신이 슬그머니 남천의 눈치를 살폈다.
이철운의 팔 하나나 봉문 중에 택하라면 누구라도 팔을 택할 것이다.
“개에게 무슨 죄가 있어요? 개를 그렇게 키운 주인이 잘못이지.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기르지 말아야지요. 양 부인, 그렇지 않나요?”
연적하가 양이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보고 있던 양이화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연신이 양이화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양 부인. 제발 사정 한번 봐주십시오. 지금 저희에게 봉문은 폐문과도 같습니다. 저희 철혈방도들에게도 딸린 처자식이 있습니다. 폐문을 하면 그들까지도 이 엄동설한에 강호를 유랑해야 합니다.”
‘강호를 유랑해야 한다’는 말이 양이화의 마음에 와 닿았다.
양가장 식솔들의 처지가 딱 그랬기 때문이다.
“남천 소협. 조금 봐주는 게 어떨까요? 좌 방주를 찾는 것도 좋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양이화는 자기가 말을 하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철혈방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염려했는데 이젠 그 반대다.
자신의 입으로 철혈방을 봐주자고 말하게 될 줄이야.
“피해자이신 양 부인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제가 달리 할 말이 없네요. 주 부방주님?”
“말씀하시지요.”
주연신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천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공손히 답했다.
“양 부인에게 평생 감사하며 사세요. 양 부인은 마음씨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봉문하는 게 맞는 건데.”
“알고 있습니다. 양 부인, 부인은 우리 철혈방의 은인이시오.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소.”
갑자기 주연신이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자 양이화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강호에서 여협이 사파의 고수에게 희롱당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사망검 이철원의 말에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그게 왜 철혈방이 문을 닫느냐 마느냐로 이어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남천을 힐끔 보았다.
저 청년 술사가 그 모든 일을 만들어 냈다.
천지조화의 술법과 주연신 같은 고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이건 비범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는 누구지?’
물론 남천이 무당파 속가제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보여 준 술법을 생각하면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저런 기인이 왜 연가무관에 찾아왔을까?’
처음 그가 받은 냉대를 생각하면 연씨들과 모르는 사이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작은 친절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녀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다.
“뭐, 연가무관과 양 부인과의 계산은 그렇게 끝낸 것으로 하고. 그럼 이제 나만 남은 건가?”
연적하의 말에 주연신은 흠칫 놀랐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그는 마치 녹림도처럼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고 골수까지 빼먹을 기세다.
“소협에게는 무엇을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무엇이건 다 퍼 줄 것 같은 말과 달리 주연신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사악한 놈. 무당파가 아니라 마교의 제자라고 해도 믿겠다.’
그제는 이철원이 연무백에게 당했고, 오늘은 천살귀조가 죽기까지 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배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철혈방이었다.
“응? 손해 본 것도 없는 놈이 왜 그러냐는 눈빛인데요?”
“허허, 그럴 리가요. 철혈방이 소협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죄입니다.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너의 성질을 건드린 것 외에 우리가 잘못한 것은 없다는 소리다.
녹림에서 생활한 연적하는 배배 꼬인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사실은 내가 손해 본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죠?”
“허허, 제가 그렇게 뻔뻔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주연신은 끝내 물질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긴 뭘, 얼굴에 적혀 있구만.”
“허허, 무슨 그런 말씀을. 노부가 비록…….”
연적하가 주연신의 말을 끊었다.
“내가 철혈방 때문에 부적을 몇 장이나 만들었는지 알아요?”
“많이 들고 계신 것은 보았습니다.”
“서른 장이에요.”
“아!”
“무당파의 부적이 한 장에 얼마인지 모르죠?”
그제야 주연신은 그가 손해 운운한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이놈. 설마 부적값을 달라는 건가?’
살다 살다 싸움 상대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놈은 처음이다.
부적값을 요구하는 건 무인이 ‘너와 싸우다가 칼날이 상했으니 돈을 내라’는 것과 같았다.
“무당파 부적은 기본이 은자 세 냥이에요. 그 이하로는 팔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오룡궁 도사의 가르침은 아니다.
그건 팔선각의 수련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이었다.
“구십 냥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어허. 모르는 말씀. 술법에도 급이 있어요. 주 부방주님이 보기에 제 술법은 어때 보이던가요?”
“하아! 인세에 보기 드문 경지십니다.”
주연신은 남천의 속셈을 뻔히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하하, 이거 참.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가 민망한데. 난 수도 중이라 거짓말을 할 수가 없거든요. 내 술법의 경지는 저 위쪽에 있어요. 당연히 그런 사람이 만든 부적은 비싸겠죠? 세 냥이 아니라 열 냥에 팔아도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거예요.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맞습니다.”
“저도 부적을 팔아서 팔자를 고칠 생각은 없어요. 딱 열 냥만 받을게요.”
삼백 냥이다.
피 튀기던 싸움터가 거래의 장소로 변했다.
주연신은 기가 막혔지만 군말하지 않기로 했다.
예상 밖의 지출이지만 그 정도는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때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소협, 소협이 만든 부적은 서른 개지만 실제로 사용한 건 아홉 개가 아닙니까?”
“맞아요.”
“허면 아홉 개의 값을 드릴까요? 물론 소협의 부적이라면 서른 개 모두를 살 의향이 있습니다만.”
주연신이 야릇한 눈으로 남천을 보았다.
천지조화를 불러일으키는 부적이니 그 가치는 무궁하다 할 수 있었다.
‘어떠냐 이놈아? 구십 냥을 먹고 떨어질 테냐? 아니면 남은 스물한 개의 부적을 넘기겠느냐?’
고개를 주억거리던 연적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남은 부적을 팔게요. 가지고 다녀 봐야 괜히 짐만 될 뿐이라서.”
연적하가 들고 있던 부적을 통째로 건넸다.
얼떨결에 부적을 받은 주연신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이런 미친! 천지조화를 일으키는 부적을 고작 열 냥에 팔았다고?’
“삼백 냥 줘요.”
연적하가 손을 내밀자 주연신은 급히 총관 천뢰도 조유백에게 손짓했다.
“들었겠지?”
“예.”
“연가무관에 백 냥, 남천 소협께 삼백 냥, 도합 사백 냥이 필요하다. 나에게 백 냥이 있는데, 너는 지금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
“이백 냥 정도가 있습니다.”
“내게 주고 당주들에게 돈을 걷어 오도록 해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유백이 내당과 외당 당주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돈을 긁어 왔다.
잠시 후 주연신이 연적하에게 한 무더기 전표를 내밀었다.
“소협, 연가무관에 줄 돈 백 냥과 부적값 삼백 냥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연적하는 꼼꼼하게 전표를 한 장 한 장 확인하며 세어 나갔다.
그런데 전표의 합산이 너무 느렸다.
급기야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동원하는 걸 보고 다들 눈을 질끈 감았다.
보다 못한 양이화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연적하는 아예 양이화에게 전표 뭉치를 넘기고 뒤로 물러났다.
주연신이 그런 연적하를 향해 한마디 했다.
“허허. 영웅은 본래 산만 보고 가는 겁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본래 그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