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11
411회. 지금 도망간 거 맞죠?
백검표국의 이견우가 애매한 표정으로 합석을 청하는 흑의의 사내를 보았다.
네 사람이 앉는 탁자에 셋이 앉아 있었다.
물론 아직 한 자리가 남았지만 꽉꽉 채워 앉으면 불편해지는 건 자명한 사실.
하지만 이견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과 유지안도 타인의 자리에 합석한 처지라 왈가왈부하기 곤란해서다.
대신에 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죽립의 청년을 힐끔거렸다.
그렇게라도 불편함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연적하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흑의인이 의자를 빼서 털썩 앉았다.
그리고 점소이를 불러 몇 가지 요리와 술을 시켰다.
흑의인의 합석 여부를 두고 고민하던 이견우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흑의인은 이견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형제, 명왕교에 관심 있나?”
“그냥저냥요.”
흑의인의 질문에 연적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자신의 사정을 밝힐 이유가 없어서다.
흑의인이 묘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냥저냥으로 은자 두 냥을 쓴다라. 뭐, 그렇다고 치지. 난 노도경이네.”
“…….”
연적하는 사내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향설주를 홀짝거렸다.
“소형제의 이름은 뭔가?”
“연 모라고 해요.”
“연 형제였구먼. 톡 까놓고 말해서 나는 명왕교에 관심이 많네. 소형제는 명왕교를 찾고 있나?”
“왜요?”
“하나보다는 둘이 더 낫겠다 싶어서.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왔더니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빌빌거리던 유명교가 천하의 주인 행세를 하지 않나. 당최 적응이 안 돼. 내 눈으로 직접 보면 좀 나을 것 같은데.”
‘폐관’ 소리에 이견우가 관심을 보였다.
“저는 백검표국의 이견우라고 합니다. 어느 문파의 고인이신지요?”
그러나 노도경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떤가? 함께 다녀 볼 텐가?”
“아뇨.”
연적하는 재고의 여지도 없이 거절했다.
거절에 익숙지 않은 노도경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왜?”
“그냥요.”
노도경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냥 싫단다.
‘아니 뭐 이런 놈이…….’
한편 노도경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이견우가 울컥해서 한마디 했다.
“노형(老兄),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소?”
“지금 나에게 한 소리냐?”
노도경이 이견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속없는 아저씨 같던 그가 정색하자 섬뜩한 냉기가 풀풀 날렸다.
상대가 내뿜는 기백에 압도당한 이견우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방금 제가 소개를 했는데 답이 없으셔서…….”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옆에서 앵앵거리지 마라.”
“예…….”
기선을 제압당한 이견우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노도경이 다시 죽립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십 년 만에 세상에 나와 길잡이로 좀 쓸까 했더니 너무 튕기는 것 같다.
“소형제.”
“왜요?”
순간 노도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딘지 톡 쏘는 듯한 음성이지만 얼굴이 안 보이니 알 수가 없다.
“명왕교…….”
“안 간다고요.”
“이왕이면…….”
“글쎄, 관심없다니까요.”
죽립의 청년이 자신을 잡상인 취급하자 노도경은 탁자를 ‘쾅!’ 하고 후려쳤다.
그 소란에 주루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누가 물으면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을 해야지!”
“몇 번을 말해요. 같이 안 간다고요.”
“왜냐!”
“귀찮다고요.”
“이, 내가, 귀찮다는 말이냐?”
“지금도 귀찮게 하고 있잖아요.”
“…….”
노도경이 멍한 얼굴로 죽립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귀찮게 하고 있단다.
마교 순찰사자 탈혼마검 노도경의 인생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때마침 점소이가 주문한 음식을 내왔다.
노도경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머릿속에 내내 ‘귀찮게 한다’는 말이 맴돌았다.
그가 내뿜는 패도적인 기세에 이견우와 유지안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특히나 유지안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금우전장 장주 유낙성의 딸인 그녀는 노도경과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아, 배부르다. 이 소협, 그만 갈까요?”
음식이 태반이나 남았지만 그녀는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 그럴까요?”
일어나려고 이견우가 막 의자를 뒤로 뺐을 때다.
묵묵히 음식을 먹던 노도경이 한마디 했다.
“음식 아까운 줄 모르는군.”
그 말에 이견우는 다시 의자를 앞으로 밀어붙였다.
“유 소저, 조금 더 먹읍시다.”
“네…….”
유지안은 미미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얹힌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여기서 한 입이라도 더 먹으 면 확실히 체할 게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왠지 더 큰 화를 당할 것 같았다.
음식을 자근자근 씹어 삼키던 노도경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앞에서 음식을 깨작거리던 유지안이 어깨를 움츠렸다.
“둘이 어떤 관계냐?”
사내의 질문에 당황한 유지안이 이견우를 보았다.
관계라고 할 것도 없다.
백검표국과 금우전장이 거래하는 사이라 가끔 만나면 식사나 함께할 뿐이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하자니 집안 얘기까지 하게 될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머뭇거릴 때 죽립인이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대나무 등짐을 짊어졌다.
그리고 빠르게 나가 버렸다.
음식 지적을 받았던 유지안은 저도 모르게 죽립인의 자리를 보았다.
닭 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살 한 조각 남기지 않은 누런 뼈들을 보니 괴기스러울 정도다.
“이 공자님과 저는…….”
고민 끝에 유지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노도경이 먹던 음식을 내려 놓고 자리를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가 시킨 음식도 꽤나 많이 남은 상태였다.
울컥한 유지안이 언성을 높였다.
“뭐야! 자기도 저렇게 남긴 주제에! 누구더러 음식 아까운 줄 모른대!”
***
연적하는 주루에서 나오자마자 남쪽으로 향했다.
설화인 천우생의 말대로 강서성 여산을 먼저 가 볼 생각이다.
그의 뒤를 노도경이 느긋하게 따라 붙었다.
한참 말없이 걷던 연적하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왜 따라와요?”
“누가 따라간다고. 그냥 방향이 같을 뿐인데.”
“그럼 아저씨 먼저 가실래요?”
“아저씨가 뭔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형장(兄丈)이라 부르게.”
“모르는 사이 맞고요. 형장이라고 하기에는 나이 좀 드신 듯?”
“하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세. 마음이 통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마음이 통했다고요? 언제?”
“소형제가 귀찮다고 할 때, 내 마음에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 왔네.”
“아저씨, 혹시 욕먹는 거 좋아해요?”
“그럴 리가. 나는 그런 근본 없는 개쌍놈이 아닐세.”
“그런데 왜 감동을 혼자 받고 그러세요?”
“소형제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 나에게, 귀찮다는 말을 한 사람은 소형제가 처음일세.”
“그래서 감동을 받으셨다?”
“그렇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형제는 내 앞에서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위선일세. 그런데 세상은 위선이 판을 치지. 소형제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사실을 다시 깨우쳐 주었네.”
“그냥 욕먹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고요?”
“천만에. 지금까지 나를 욕한 자들은 모두 백골로 누워 있다네.”
노도경의 진심 어린 표정에 연적하는 할 말이 없었다.
세상이 위선적이고, 귀찮다는 말 한마디에 감동까지 받았다니?
“아저씨, 무슨 황족(皇族)이에요?”
“아니네.”
노도경의 얼굴에 자부심이 어렸다.
황족은 아니지만 한때 십만에 달했던 마교도를 감독하는 순찰사자다.
물론 지금은 죄다 이리저리 흩어지고, 교세도 기울었지만 말이다.
“계속 그렇게 따라올 건가요?”
“가는 방향이 같은 거래도. 소형제처럼 나도 남쪽으로 가는 중이거든.”
“아저씨는 왜 남쪽으로 가는데요?”
“본래 유명교를 좀 알아보고 싶었는데, 유명교는 좀 어려울 것 같고. 차선책으로 명왕교를 택한 걸세.”
노도경이 덥수룩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자신이 마교 순찰사자라 해도 유명교는 살짝 부담스러웠다.
정의맹과 천지맹을 격파하는 것은 마교에도 쉬운 일이 아닌 까닭이다.
그에 반해 명왕교는 왠지 만만했다.
본체인 유명교에서 떨어져 나온 곁가지라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유명교를 알아보고 싶다고요?”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천하를 경동시키지 않았나? 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는지 궁금 해서.”
“아저씨는 어느 문파 사람인데요? 검을 쓰는 것 같은데.”
“혹 들어 봤는지 모르겠군. ‘마도(魔道)의 극의’를 추구하는 문파인데.”
‘마도의 극의’라면 마교다.
하지만 연적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마교가 세상에서 종적을 감춘 지 수십 년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유명교의 이름에 가려진 것도 있었다.
“그런 문파도 있어요?”
“정말 모르나 보군. 소형제의 스승이라면 여기까지만 듣고도 십 리 밖으로 달아났을 걸세.”
노도경의 말에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구천현녀와 우화등선한 청불노 중에 누구도 그럴 것 같지 않아서다.
“그래서 이름이 뭔데요?”
“마교일세.”
“왜 하필 그런 이름을 지었대요?”
“그런 이름이라니? 마교가 어때서?”
노도경이 기막힌 얼굴로 죽립인을 보았다.
지금까지 마교도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魔)가 좋은 뜻은 아니잖아요.”
“편견일세.”
“그게 왜 편견이 돼요?”
“소형제는 이 세상이 참되고 진실되게 굴러간다 생각하나?”
“별로요.”
“그렇지. 세상은 타락했네. 타락한 이 세상을 깨부숴 없애고, 도래할 새 천지를 준비하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마교일세.”
“뜻은 좋은데 왜 ‘마귀[魔]’라는 말을 써요?”
“새 천지를 만들기 전에 먼저 옛것을 부숴야 하네. 낡아 빠진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날벼락이겠지.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마귀들이라 부른다네. 천리(天理)에 따라 마귀 짓을 한다고나 할까.”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을 마교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렵네요.”
“어려울 것 없네. 어차피 깨부숴야 할 세상이니 마음 가는 대로 박살 내면 되거든.”
역시나 마교도다운 소리다.
도래할 새 천지를 위해 구악(舊惡)을 부순다더니 이쯤되면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
“거기에도 교주가 있나요?”
연적하는 문득 유명교 교주 팔황신모를 떠올렸다.
만약 마교라는 곳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면 왠지 끔찍할 것 같았다.
“우리 마교에는 미륵불보다도 더 존엄하신 분이 계시네.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소형제도 그분의 존안을…….”
“저는 안 봤으면 하네요.”
“그래도 되고. 그런데 소형제는 날도 더운데 왜 머리에 그런 걸 뒤집어쓰고 다니나?”
노도경이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야기만 해서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어서다.
“대낮에 주루를 드나드는 걸 보면 현상금 걸린 죄인은 아닌 것 같은데.”
“궁금해요?”
“그야 이를 말인가.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동행하는 사람인데.”
“내 얼굴 보고 도망이나 가지 마요.”
“껄껄! 이, 내가, 고작 남자 얼굴을 보고 달아날 사람으로 보이는가?”
노도경이 ‘이, 내가’에 맞춰 제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연적하는 군말하지 않고 죽립을 벗었다.
순간 노도경의 걸음이 느려졌다.
방금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노도경이 반걸음 뒤로 처졌다.
“지금 도망간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