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22
422회. 너 장이 뭔지는 아냐?
물론 자신이 황제를 아는 것은 아니다.
알기는커녕 배알을 한 적도 없다.
솔직히 황제가 자신의 뒤를 봐줄 거라는 확신은 없다.
그럼에도 큰소리를 친 것은 금의위가 자신을 ‘황상의 숨겨진 검’으로 만들어서다.
금의위는 황제의 직속 기관이다.
그 말은 ‘황상의 숨겨진 검’에 어느 정도 황제의 의중이 반영되어 있다는 소리다.
정적들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경고도 없을 테니까.
후궁의 사촌이 얻어맞은 한심한 이유로 그렇게 좋은 패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겠지. 암.’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불안했다.
황제를 본 적이 없어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여색에 푹 빠져 사는 멍청이라면 왠지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 않을까?
탈혼마검 노도경은 연남천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자신 없는 얼굴을 하나? 미인(美人, 후궁의 관작)보다 끗발이 떨어지나 보지?”
“이 아저씨 대놓고 속물이네. 어차피 무림과 관부는 ‘강물과 우물물’ 같은 사이인데 무슨 끗발 타령이에요? 미인이 아니라 황후의 사촌이라고 해도 신경 안 써요. 어차피…….”
“어차피?”
“내가 어디 출신인지 잊었어요? 관부와 나는 원래 친하지 않았다고요.”
“아.”
노도경은 뒤늦게 연남천의 말을 알아들었다.
맞다.
저놈은 무당파 제자 이전에 녹림의 태상호법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버린 몸이니 미인의 원한쯤은 새 발의 피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겠어요?”
“번거롭게 될지언정 지금 당장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니 하는 말일세.”
“피는 아까 많이 묻었거든요?”
“알겠네. 자네는 의외로 속이 물러터졌구먼. 그러니 무당파에서 받아들였겠지.”
“아, 이 아저씨가 정말.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말해 줘요?”
“아니, 됐네. 충분히 알겠네. 더 들으면 무서워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으니 사양하지.”
노도경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고는 선실로 들어갔다.
***
장거문과 그의 호위들은 반나절을 더 가 채원두촌에서 하선했다.
그들은 배에서 내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듯 선착장을 떠났다.
연적하가 뱃전에서 선원들이 짐 하역하는 걸 구경하고 있을 때다.
장거문에게 맞았던 이기보라는 청년이 다가왔다.
“괜히 저 때문에 연 소협이 곤란해지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장거문요? 괜찮아요.”
“그는 뒤끝이 있기로 유명한 자입니다. 십중팔구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가 보세요.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이기보는 연남천이 자신과의 대화를 피하는 듯하자 꾸벅 인사하고 돌아갔다.
노도경이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그에게도 사례비를 받지 그랬나? 꽤나 번거로운 일에 휘말려 든 것 같은데.”
“피해자에게 사례비를 받는 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라고요. 나를 뭐로 보고.”
“아, 사례비를 받는 것에 그런 원칙이 있다는 걸 몰랐군.”
“그나저나 아저씨는 명왕교를 찾아서 뭘 어쩌려고 그래요? 그 사람들이 순순히 진언을 알려 줄 것 같아요? 그리고 진언을 배우면 아저씨도 그걸 해 보게요?”
“그 부분은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네. 자네 말만 들었지 실제로 명왕교나 유명교가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 않나? 우선은 만나서 그들의 말을 들어 볼 생각이네.”
“뭘 하든 아저씨 마음인데, 나랑 다시 만날 일은 벌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은근한 협박에 노도경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마교 동방사자가 협박 따위를 듣고 있다니!
마교의 천인(天人)들이 알면 ‘혀를 물고 자결하라’고 난리 칠 게다.
“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저씨 잘되라고 그런 거니까 고깝게 듣지 마요.”
연적하가 사족처럼 붙인 말에 노도경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은근한 협박’보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소리가 더 불쾌했다.
“고맙네만 세상 물정 모른다는 건 좀 아니지 싶네. 내가 칩거를 좀 오랜 기간 하긴 했지만…….”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 말 몰라요?”
“물론, 그런 부분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것은 좀…….”
“아저씨 요즘 객점 하나에 얼마 하는지 알아요?”
“갑자기 웬 객점인가?”
“스스로 세상 물정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객점 하나에 얼마 정도 할 것 같아요?”
“삼천 냥?”
“쯧! 그러니 모른다고 하지요. 삼천 냥이면 산속에 있는 암자 하나 정도 살 수 있겠네요. 황하 강변의 허름한 객점도 육천 냥은 한다고요.”
연적하가 큰소리를 쳤다.
자신도 사기를 당해 그걸 일만 이천 냥에 샀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비싼가?”
객점을 사고 판 적이 없는 노도경은 머리를 긁적였다.
무림 고수가 객점의 시세를 안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연남천이 당연하다는 듯 물어보니 그냥 분위기에 쓸려 간 것이다.
“쯧쯧!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저씨가 폐관하기 전에는 삼천 냥쯤 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은 두 배가 뛰었다고요. 이제 현실을 알겠어요?”
“끙!”
노도경의 입에서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강호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것들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정사파 고수들의 특징이라거나, 그들의 습관, 무공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객점의 시세는 모르겠다.
그건 마치 점소이의 월봉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뒤늦게 그는 질문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험, 객점 시세를 아는 무인이 얼마나 있으려고.”
“끝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죠? 그럼 낭인의 하루 일당이 얼마인지는 알아요?”
“은자 열 냥 이상은 받겠지.”
물론 그의 눈높이에서 생각한 일당이었다.
연적하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아저씨, 어디 가서 세상 물정 좀 안다고 입도 뻥끗하지 마요. 내가 상방에서 일당으로 오십 문까지 받아 봤어요. 은자 열 냥은 무슨 얼어 죽을.”
“자네가 오십 문을 받았다고? 사실인가?”
노도경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연남천 같은 천외천의 고수가 일당 오십 문을 받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가끔 더하고 빼는 건 있을지 몰라도 거짓말은 안 하거든요? 진짜 일당 오십 문 받았다니까요. 아저씨 폐관하기 전과 많이 달라졌죠?”
“허어. 인정하겠네. 나는 정말 세상을 몰랐었구먼. 이 빌어먹을 세상. 역시 때려 부숴야 해. 목숨 걸고 일하는데 하루 오십 문이라니? 나무 미륵불, 나무 천자마……. 씨벌.”
그는 염불 비슷한 것으로도 속이 풀리지 않는지 결국 욕을 내뱉었다.
연적하가 그런 노도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또 그놈의 망할 세상 타령이다. 이제는 하도 들어서 그런지 놀랍지도 않다.
***
호광성.
구강.
신항진.
정오 무렵.
거대한 선착장에 중급 목선이 도착했다.
잠시 후 이십여 명의 선객(船客)들이 배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연적하와 노도경이 선원과 선장의 배웅을 받으며 하선했다.
두 사람은 북적거리는 선착장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다.
이번에는 노도경도 앞장서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얼뜨기들처럼 눈만 끔뻑이며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어린 꼬마가 다가왔다.
“신항진에는 처음이세요?”
노도경이 어린애를 본체만체하자 연적하가 물었다.
“그런데 왜?”
“술맛 좋고 음식 잘하는 집을 알고 있는데 가실래요?”
“술 맛없고, 음식도 못하면? 책임질 수 있어?”
“예, 정말 잘해요.”
“그래? 앞장서.”
“예. 가까워요. 조금만 가면 돼요. 그런데 손님들은 어디에서 오셨어요?”
꼬마는 친화력이 좋은지 계속 말을 걸었다.
“무한.”
“아! 무한. 거기는 요즘 어떤가요? 구강은 요즘 뒤숭숭해서요.”
“뒤숭숭해?”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이 많대요. 도관 하나가 완전히 빈 곳도 있다니까요.”
“혹시 중이나 도사가 사라진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수가 있어.”
“그래도 중이나 도사만 아니면 괜찮다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나도 도사랑 관계가 있어.”
“예? 정말요?”
“어, 나 무당파 속가제자야. 무서워서 지금 오줌 나올라고 그런다. 그런데 그 술맛 좋고 음식 잘하는 곳은 멀었냐? 지금쯤이면 간판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냐?”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그러고도 반 각(약 7분)을 더 걸은 후에야 세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꼬마는 신항진 포구 외곽의 허름한 주가(酒家) 앞에서 멈춰 섰다.
다 쓰러져 가는 주가를 둘러보던 연적하가 말했다.
“야, 분위기가 폐가 수준인데? 너 우리가 초행길이라고 물 먹인 거야?”
“외관만 그렇지 술과 음식은 구강 최고예요. 맛없으면 제 손에 장을 지질게요.”
“너 장이 뭔지는 아냐?”
“첨면장? 황장?”
“인마, 그건 요리할 때 쓰는 거고. 맛만 없어 봐. 어떻게 되나. 너 저 아저씨가 뭐 하는 사람인 줄 알아?”
연적하가 노도경을 가리켜 보였다.
“모르는데요?”
“마음에 안 들면 뭐든 때려 부수는 그런 아저씨야. 이 주가도 오늘 사라질지 몰라.”
그제야 꼬마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뭘 그렇게 놀라? 맛있다면서? 맛있으면 괜찮으니까 긴장하지 마.”
연적하가 주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정말 다 부숴 버리고 싶군.”
노도경이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연적하는 목울대에 걸릴 것 같은 들척지근한 술을 억지로 꿀꺽 삼켰다.
오랜만에 마시는 죽엽청은-노도경의 분노가 이해될 정도로-맛이 없었다.
뒤이어 고노육(古老肉, 탕수육과 비슷)으로 젓가락을 가져가던 그는, 그 옆의 청채를 집어 들었다.
시커멓게 졸아는 고노육은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청채도 먹지 말았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간이 안 맞는 건 물론, 신선하지도 않아 식감이 더러웠다.
한쪽에서 연신 눈치를 살피던 꼬마가 자신 없는 얼굴로 물었다.
“어, 어떤가요? 입맛에 맞으세요?”
“내가 굶주린 돼지라면 입맛 생각하지 않고 먹을지도 모르겠다.”
“아, 안 맞으시나 보다.”
“안 맞는 게 아니라 이건 요리를 못한 거야. 내가 발로 해도 이것보다 맛있겠다. 아무리 우리가 뜨내기들이라고 해도 이런 걸 팔면 안 돼. 요리사 나와 보라 그래.”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꼬마가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꼬마와 그보다 네다섯 살 많아 보이는 소녀가 조심스럽게 탁자로 다가왔다.
연적하가 뚱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요리사냐?”
“네…….”
이제 열네 살쯤 되어 보이는 곱상한 얼굴의 소녀가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너희들 남매냐?”
“네.”
“남매 사기꾼이네?”
“사기 아닌데요.”
사기꾼 소리에 소녀, 문세아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선착장에 있는 뜨네기들을 꼬셔 와서, 이런 걸 음식이라고 팔면, 그게 사기야.”
“그, 그냥 요리를 못하는 거지, 사기는 아니에요.”
“그래도 못하는 건 아나 보네? 여기 요리는 원래 누가 했는데?”
“아버지요. 지금은 어머니를 찾으러 밖으로 다니고 계시지만요.”
“…….”
연적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집 나간 처를 찾아보겠다고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출가(出家)한 이모를 만난다고 어머니가 ‘불영사’로 갔어요. 그 뒤 어머니 소식이 끊겨서 아버지가 찾으러 가신 거예요.”
“불영사?”
“여산에 있는 작은 절이에요.”
‘여산’이라는 말에 다소 게슴츠레하던 연적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얼굴의 부스럼이 사라진 것도 그렇고, 처음부터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