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23
423회. 내 계약서를 왜 자네가 챙기나?
연적하가 복잡한 눈으로 어린 남매를 보았다.
남매의 바람과 달리 여산에서 사라진 것이라면 끝이 좋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이제부터는 두 남매가 서로를 의지해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음식에 대한 불만이 사라졌다.
힐끔힐끔 청년의 안색을 살피던 문세아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소식이 끊긴 부모님에 대해 말하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마른 입술을 물어뜯으며 고민하던 문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혹시 무림인이세요?”
청년 옆에 있는 건 대나무 등짐이지만, 중년인이 검을 지니고 있어 확인차 물어본 것이다.
“왜?”
“그럼 부탁 좀 하려고요.”
“맨입으로?”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줄 아세요? 돈을 원하신다면 드릴 수 있어요.”
“얼마?”
“칠…… 팔십 문요. 그 정도면 실력 좋은 낭인을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맞죠?”
연적하가 소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하는 실력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은 풍월은 있나 보다.
문제는 그게 평범한 낭인의 하루 일당에 불과한 금액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목적지가 여산이니 이건 그냥 일석이조(一石二鳥)였다.
“잘 아네. 팔십 문이면 저 아저씨 정도는 고용할 수 있겠다. 아저씨, 봤어요? 이게 현실이라니까요. 내가 오십 문까지 받아 봤다는 얘기했었죠?”
연적하가 돌아보자 탈혼마검 노도경은 ‘부숴 버리고 싶다’던 죽엽청으로 손을 뻗었다.
무인의 삶이 이렇게 시궁창일 줄은 미처 몰랐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야.’
역시나 마교의 가르침은 진리다.
이런 개만도 못한 세상은 빨리 망해야 한다.
노도경의 심장이 또다시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증오로 끓어올랐다.
그가 술로 노기를 달랠 때, 연적하는 문세아와 팔십 문짜리 계약을 성사시켰다.
노도경의 이름으로.
“아저씨도 수결해요.”
연적하가 계약서를 노도경 앞으로 내밀었다.
술을 마시던 노도경이 의아한 눈으로 연남천과 문세아를 번갈아 보았다.
“자네가 하는 게 아니었나?”
“나는 그보다 조금 더 받아야죠. 지금 나랑 같은 금액을 받겠다는 거예요?”
“그건 아니네만.”
“그럼 수결이나 해요.”
연적하가 재촉하자 노도경은 마지 못해 눈앞의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하지 않아도 될 낭인 계약을 하고 만 셈이다.
수결이 끝나자 연적하가 계약서를 접어 갈무리했다.
“내 계약서를 왜 자네가 챙기나?”
“나도 관여됐으니까 그러죠. 내가 받을 중계료가 사십 문이라고요.”
“그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린가? 내가 저 아이와 계약을 했는데 무슨 중계료?”
“잘 생각해 봐요. 아저씨는 술이나 마셨지 한 게 뭐가 있어요? 계약서도 내가 작성했구만.”
“글 한 줄 쓰고 사십 문을 가져가겠다고?”
“계약서 안 봤어요? 이 계약 보증인이 나라고요. 일종의 공동 책임 같은 거예요. 아저씨가 실패하거나 달아나면, 내가 해결해 주는 식이죠. 그러니 절반은 내 몫인 게 맞죠.”
뭔가 그럴싸한 이야기에 노도경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문세아가 한마디 했다.
“이제 얘기 다 끝났어요? 약속대로 부모님 행방을 알아 오세요. 믿고 사십 문 먼저 드릴게요. 나머지는 결과를 듣고 계산할게요.”
문세아가 사십 문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노도경이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연적하가 한발 빨랐다.
그가 번개처럼 사십 문을 챙기며 말했다.
“아저씨는 일을 마치고 받아요. 그때는 내가 손도 안 댈게요.”
그러자 노도경이 내밀었던 손을 오므리며 멋쩍은 얼굴로 톡 쏘아붙였다.
“자네는 당연한 소리를 무슨 선심 쓰듯 말하나?”
***
연적하와 노도경은 내친김에 점심까지 먹고 주가(酒家)를 나섰다.
연적하가 뿌듯한 얼굴로 배를 두드렸다.
“아! 배부르다. 그래도 계약했다고 점심은 공짜로 주네요.”
“돈 주고는 못 먹을 맛이었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요 좀. 가만 보면 매사에 부정적이야.”
“미륵불이 와서 세상을 다 깨부순 뒤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지. 그 전까지는 모두가 거짓일 뿐이네.”
“아이고, 어련하시겠어요?”
머리를 흔들던 연적하는 마침 앞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세웠다.
“아저씨, 말 좀 물을게요.”
“물어보슈.”
“여산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돼요?”
중년의 사내가 남쪽을 가리켰다.
“이리로 곧바로 반나절 가면 여산이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똑바로 가시오. 가다가 모르겠거든 아무나 잡고 다시 물어보면 될 거요.”
“고마워요.”
“고맙긴.”
중년 사내는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연적하와 노도경은 그가 가르쳐 준 대로 관도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갈림길이 몇 차례 나왔지만 크게 헷갈리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진(4시간)쯤 걸었을까?
석양이 뉘엿뉘엿 질 무렵, 멀리 높게 솟은 산이 보였다.
연적하가 마주 오던 상인들을 잡고 물어보니 ‘여산’이라 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막상 여산에 왔지만 하필이면 해거름 무렵이다.
“아저씨, 어떻게 생각해요?”
“뭘 말인가?”
“불영사 말이에요. 곧 해가 질 텐데 바로 가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근처에서 노숙(露宿)하고 아침에 올라갈까요?”
“나는 아무래도 괜찮네.”
“어쩐다. 시간이 애매하네. 명왕교도 찾아봐야 하는데…….”
명왕교 소리에 노도경이 연남천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당파 제자가 왜 뜬금없이 명왕교를 찾아다니는지 내내 궁금했다.
여산까지 왔으니 이제는 속사정을 말해 줄 것도 같다.
“그런데 자네는 왜 명왕교를 찾는가?”
“잡아갈 사람이 하나 있어서요.”
“삼년지약은 어쩌고? 아니, 명왕교는 유명교가 아니라서 괜찮으려나?”
“하하. 삼년지약은 괜찮아요. 약속 당사자인 유명교주가 부탁한 일이니까.”
“허! 자네에게 부탁할 정도면 보통 고수가 아닐 텐데……. 십두마병? 아니, 설마 백두마군이려나?”
“백두마군 맞아요.”
“백두마군의 무위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할 만하니 부탁한 거겠지?”
“모르죠. 워낙 음흉한 인간이라.”
“흠! 자네가 백두마군을 잡아갈 계획이면 우리는 이쯤에서 헤어져야겠군. 나는 그들과 척을 질 생각으로 온 게 아니라서.”
노도경은 슬쩍 발을 빼려 했지만 연적하가 놓아주지 않았다.
“아저씨, 이제 와서 오리발 내밀면 곤란해요.”
“오리발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아저씨랑 나랑은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예요. 벌써 낮에 한 계약을 잊었어요? 꺼내 보여 줘요?”
“그 사십 문짜리 계약서 말인가? 그거라면 사십 문을 자네에게 주겠네.”
노도경은 이쯤에서 연남천과 갈라설 생각이었다.
그의 목적은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단지 염탐 정도로 그칠 줄 알았는데 백두마군을 잡아가려고 왔다니?
명왕교 백두마군들과 교분을 맺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그와 떨어져야 했다.
“어허, 이 아저씨 약속 알기를 개똥으로 아시네. 일방적으로 계약서를 무르겠다고요? 그게 지금 무당파 제자 앞에서 할 소리예요? 내가 고작 사십 문을 받고 의리를 저버릴 사람같이 보여요?”
“…….”
연적하의 큰소리에 노도경은 얼굴을 붉혔다.
사실 자신도 지금까지 약속은 목숨 걸고 지키는 쪽이었다.
지금의 경우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낭인 계약’이라 생각해 대충 넘어가려 했다.
팔십 문짜리 계약이라 쉽게 생각했는데 이놈은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험, 물론 나도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네. 하지만 지금은 대의(大義)를 위해…….”
“무림공적이 무슨 대의 타령이에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약속이나 잘 지키자고요.”
“허면 이렇게 하세. 그 아이의 부모를 찾기로 했으니 그 일을 먼저 끝내세나. 그 뒤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으로. 어떤가?”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럼 먼저 문씨 내외부터 찾기로 해요.”
“그러지. 그 일을 끝내면 각자 찢어지는 것으로 하세.”
노도경은 계속 헤어질 것을 강조했다.
그를 달고서는 명왕교 백두마군들과 교분 맺기가 불가능할 것 같아서다.
“좋아요. 그럼 지금 올라가요? 내일 올라가요?”
“나의 풍부한 경험에 의하면 사람을 찾는 일은 서두를수록 좋다네.”
“그럼 가요.”
말과 함께 연적하가 앞으로 쏘아갔다.
삽시간에 그가 멀어져 가자 노도경은 급히 천마행공으로 그를 뒤따랐다.
다행히 여산 초입에 불영사라는 표지목이 꽂혀 있었다.
연적하는 불영사 방향으로 달려갔다.
초상비로 달리던 그는 답답한지 돌연 나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나무 위를 평지처럼 달렸다.
한 걸음에 오 장(약 15미터)씩 날아가는 그의 뒤를 노도경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성한 나무 아래로 작은 사찰이 나타났다.
불영사였다.
하늘로 솟구쳐 올랐던 연적하는 이내 대웅전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녁 노을 아래 붉게 물든 불영사는 조용했다.
“저녁 공양 시간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적하는 대웅전과 주변의 전각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불영사는 텅텅 비어 있었다
다시 대웅전 앞으로 돌아와 멍하니 서 있는 연적하에게 노도경이 말했다.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네. 중들이 절을 떠난 모양이야.”
“떠났다고요?”
“그러니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지. 설마하니 모두를 제물로 썼으려고.”
노도경이 애매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리 머리가 비었어도 제집이라 할 수 있는 여산에서 그랬을 리 없지.’
“풍부한 경험 어쩌고 하더니, 짐을 그냥 두고 떠났다고요?”
“…….”
뒤늦게 노도경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명왕교와 대화를 하려고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다 보니 촉이 둔해졌던 모양이다.
“자네는 명왕교에서 불영사의 중들을 제물로 썼다고 생각하나?”
“여산에 백두마군이 셋이나 있잖아요. 그놈들이 모두 천두마왕을 꿈꾼다고 생각해 봐요. 얼마나 많은 제물이 필요하겠어요?”
“그도 그렇군.”
부족한 제물 탓일까?
그래도 그렇지 여산에 있는 사찰을 탈탈 털어 가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무림공적으로 알려진 마교도 천산에서는 행동을 조심한다.
자고로 제집 주변이 안정돼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까닭이다.
여산에서 사고를 치면 관부의 이목이 집중되는데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덕분에 사람을 찾는 계약은 흐지부지됐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제 고 계집애와의 계약은 자동으로 끝난 셈인가?’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는 그의 귓가로 연남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렇게 되면 명왕교를 조사해 봐야겠죠?”
“응? 그게 무슨 소린가? 불영사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바로 그거예요. 명왕교와 관계됐을 게 뻔하잖아요. 가서 알아보자고요. 불영사의 중들이 잡혀 있는지, 벌써 제물로 다 죽였는지.”
“하지만 계약서의 내용은…….”
“문씨 부부를 찾아 준다는 거잖아요. 문씨 부부도 명왕교와 관계돼 있을 거예요.”
“이보게. 내 비록 세상 물정은 모르나 돈의 가치는 안다네. 팔십 문짜리 의뢰는 불영사까지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누가 팔십 문을 받고 명왕교를 조사한단 말인가?”
동방사자 노도경은 굴욕을 무릅쓰고 자신이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걸 인정했다.
고작 팔십 문에 명왕교를 조사하는 건 지나치다고 말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