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24
424회. 누가 문유백이에요?
노도경이 팔십 문 운운하자 연적하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저씨,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어요. 지금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기가 한 약속을, 계약서까지 쓰고서 어기겠다는 건가요?”
“아닌 말로 계약서는 자네가…….”
“하지만 아저씨도 동의했잖아요. 그래서 수결한 거고요. 내 말 틀렸어요?”
“끙! 그렇기는 하네만.”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질 말고,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마교는 안 그러나 봐요?”
끝내 마교까지 걸고 넘어지자 노도경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있나. 본교만큼 약속에 철저한 곳도 없네. 내가 잠깐 실언을 했군. 비록 형평성에 어긋난 계약이지만 지키기로 하지. 대신에 작은 부탁이 있네.”
“뭔데요?”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명왕교와 대화를 하러 왔네. 그러려면 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나? 아무쪼록 이런 내 입장을 고려해서 행동했으면 하네.”
“명왕교에서 사고 치지 말아 달라는 건가요?”
“나도 저들에게 용무가 있으니까. 나와 함께 있을 동안은 자제해 달라는 걸세.”
“그럴게요. 저도 남들과 싸우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고맙네.”
노도경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으니 양심이 있다면 미친놈처럼 날뛰지는 않으리라.
“그럼 명왕교를 찾아보자고요.”
연적하는 빠르게 사찰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명왕교의 근거지를 찾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여산에서 명왕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산 중턱의 협곡에 화전민촌이라고 볼 수 없는 거대한 마을이 나타났다.
협곡 입구의 양편 바위에 ‘천상천하’와 ‘명왕독존’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명왕교였다.
협곡 입구로 연적하와 노도경의 신형이 표표하게 떨어져 내렸다.
협곡 안쪽을 가볍게 둘러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와아! 돈이 많은가 보네. 언제 이렇게 전각을 많이 지었대?”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들어가서 몇 사람 잡아서 물어봐야죠. 불영사 사람들 본 적 없냐고.”
“귀신도 모르게 해야 할 텐데, 그런 일을 해 본 경험은 있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하다 보면 느는 거지.”
“쩝, 오늘은 내가 해 줌세.”
내내 뒤따르기만 하던 노도경이 나섰다.
행여나 초심자인 연남천이 소란을 일으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럼.”
연적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귀찮은 일을 스스로 해 준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노도경이 먼저 협곡 안으로 진입하며 말했다.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게.”
“예, 숨도 쉬지 않을게요.”
다소 과장된 연적하의 말에 노도경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저놈은 지금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만약 그가 자신보다 하수였으면 귀싸대기를 한 대 날렸을 것이다.
노도경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유령처럼 움직였다.
협곡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나무 목책이 나왔다.
둑처럼 높게 세워진 목책은 협곡을 외부로부터 차단하고 있었다.
목책 중앙에 굳게 닫힌 나무 문이 보였다.
협곡이라는 자연 지형을 이용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든 게 분명했다.
다행히 목책 외부에는 감시자가 보이지 않았다.
노도경은 천마행공으로 일 장(약 3미터) 높이의 목책을 뛰어넘었다.
연적하도 어기충소로 날아올라 가볍게 목책을 넘어갔다.
목책 뒤에 경비 무사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두 사람의 침입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도경은 시야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안쪽으로 망설임 없이 쭉쭉 들어갔다.
연적하는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노련한 노도경은 혼자 앞서가거나, 뒷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노도경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목책에서 멀어지자 더 이상 출입을 감시하는 인원도 없었다.
안쪽은 여느 평범한 시골 마을과 비슷했다.
이런 평범한 곳에서 경신술을 쓰면 오히려 사람의 눈에 띄게 될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노도경이 중얼거렸다.
“이제 한고비 넘긴 것 같군.”
거리는 시장통처럼 여러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입구의 광오 한 글귀만 아니면 활동적인 마을이라 생각했을 정도다.
노도경과 연적하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
문유백의 처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 하나가 불쑥 집으로 쳐들어와 문유백을 가리켰다.
“너, 나와라.”
“지금요? 이제 막 저녁을 먹으려고 하던 참인데…….”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신형을 돌렸다.
문유백은 행여나 봉변을 당할까 싶어 부랴부랴 그를 따라 나갔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남자가 ‘광명정’이라는 현판이 걸린 큰 전각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현판을 힐끔 확인한 문유백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광명정? 벌써 제사가 있는 날인가.’
제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명왕교도 유명교처럼 살아 있는 수도자를 제물로 바친다.
피로 흥건해진 바닥을 닦아 원상태로 만들어 놓는 건 보통 사람들의 몫이다.
그 일은 지금처럼 부지불식간에 주어진다.
처를 찾아 불영사에 왔다가 사로잡힌 지 어언 한 달.
불행 중 다행으로 명왕교에서 처와 재회해 한집에 살게 되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명왕교를 위해 일하고 있으니 죽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집에 두고 온 자식들과 실종된 처제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하아!”
문유백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자 남자가 힐끔 돌아보았다.
“네놈은 죽을 일이 없는데 청승맞게 웬 한숨이냐?”
“집에 두고 온 자식들이 생각나서요. 언제쯤이나 집에 가 볼 수 있겠습니까?”
“마누라가 있는 곳이 집이다. 원한다면 네 자식들도 데리고 와 주마.”
“…….”
문유백은 답하지 않았다.
앞날이 창창한 자식들까지 명왕교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흥! 건방진 놈. 조상들께 감사해라. 네놈의 재주만 아니었으면…….”
남자, 금춘우의 눈에 살기가 번득였다.
숙수(熟手, 요리사)는 어디에서도 대접을 받는다.
그건 명왕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여산에 숨다시피 한 명왕교이기에 숙수는 더 특별 대우를 받았다.
유명교 고수들도 먹고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숙수만 아니었다면 저 문유백의 몸뚱아리는 여산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여산에서 사라진 다른 많은 일반인 실종자들처럼.
사내가 쏘아보자 문유백은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비록 자신이 숙수지만 저 사람의 눈 밖에 나면 죽는다는 걸 알아서다.
광명정 안에는 청소를 위해 불려 온 다른 사람도 있었다.
그의 옆으로 가서 선 문유백은 제물이 있는 방을 힐끔거렸다.
‘불영사의 승려들은 몇이나 살아남았으려나…….’
굳게 닫힌 저 문짝 뒤에 불영사 승려가 있을 것이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처제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답답해졌다.
잠시 후 십여 명의 십두마병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섰다.
십두마병들이 미리부터 나와 기다리는 걸 보니 오늘은 백두마군의 제사인가 보다.
아니나 다를까?
백두마군 악불 방천각이 입장했다.
그가 등장하자 도열해 있던 십두마병들이 허리를 꺾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천상천하 명왕독존!”
방천각이 제단 앞에 서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순간 문유백은 눈을 부릅떴다.
제물로 끌려 나온 여승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처제였다.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팔을 옆 사람이 꽉 잡았다.
“아는 사람이오?”
“처젭니다.”
“그래도 참으쇼. 산 사람은 살아야지.”
“…….”
문유백은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다.
고작 숙수에 불과한 자신이 입을 놀리면 바로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것을.
알지만 방천각이 처제의 목줄기를 움켜잡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살려 주십쇼!”
막 제물의 목을 따려던 방천각이 고개를 돌렸다.
십두마병의 뒤쪽, 청소부 중 하나가 머리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었다.
“누구냐?”
십두마병 금춘우가 급히 뒤쪽을 확인하고는 그를 대신해 답했다.
“광명촌의 숙수입니다.”
숙수라는 말에 방천각은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다.
“어리석은 숙수여 들어라. 명왕교의 제물은 그 자신에게도 광영이다. 그리고 제물로 바쳐진 자는 죽지 않고 영생한다. 그러니 살려 달라는 너의 말은 옳지 않다.”
말과 함께 방천각은 다시 단검을 치켜세웠다.
“사, 살려 주십쇼!”
또 숙수가 끼어들었다.
부르르 떨던 방천각이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감히! 신성한 제사에 똥물을 끼얹다니! 저놈을 돼지 먹이로 던져 주어라!”
“존명!”
금춘우가 막 문유백에게 달려갈 때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몰아치더니 누군가 문유백의 앞에 내려섰다.
“웬 놈이냐!”
금춘우는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상대에게 갈고리 같은 손가락을 뻗었다.
연적하는 추호의 망설임 없이 검결지로 상대의 손바닥을 찔렀다.
푸욱-.
기묘한 파열음과 함께 금춘우의 손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그 상태에서 연적하가 검결지를 오므리며 손을 위로 잡아채자 금춘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금춘우의 몸은 허공을 크게 한 바퀴 돌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철퍼덕!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금춘우는 일어나지도 못했다.
아홉 명의 십두마병들이 빠르게 광명정에 난입한 불청객을 에워쌌다.
모두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감히 명왕교의 심장부인 광명정에서 십두마병을 상하게 하다니?
하지만 십두마병들은 선뜻 상대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단숨에 금춘우를 제압한 것도 그렇고, 느낌상 자신들보다 고수 같았다.
계속된 방해에 방천각은 들고 있던 단검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마가 낀 모양이다.
이런 날은 차라리 제를 올리지 않는 게 백번 낫다.
마음을 정한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불청객은 이십 대 초반의 앳된 얼굴에, 대나무 등짐을 지고 있었다.
‘강호에 저런 놈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맞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이도 나이지만, 저 커다란 대나무 등짐은 무인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그러는 너는 누구세요?”
“푸훗…….”
청년의 도발에 방천각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자신이 유명교에 입교하기 전에도 저런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하물며 십두마병을 거쳐 백두마군이 된 지금이야 오죽할까.
“너는 이곳이 어딘 줄은 아느냐?”
“유명교주의 뒤통수를 치고 나온 명왕교라면서요. 유명교주가 무서워서 꼭꼭 숨어 지낸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흥!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 지금의 유명교주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여산에 숨어 있어요?”
‘숨어 있다’는 말이 방천각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하지만 방천각은 펄펄 뛰는 대신 숨을 깊게 들이마셔 혈기를 가라앉혔다.
“숨은 게 아니라 이곳이 명왕교의 성산이다. 성산에 있는 것을 두고 숨었다고 하면 쓰나. 이제 대답해 보거라. 너는 누구냐?”
“연남천인데요?”
“사문은 어떻게 되느냐?”
“잠깐, 그 전에 나도 하나 물어볼게요.”
“뭐냐?”
연적하가 전각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두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기 두 분 중에 누가 문유백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