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94
494회. 우리는 검사(劍士)야
풍지산.
신당.
반 시진(1시간)쯤 산을 오르자 거대한 바위 앞에서 길이 갈라졌다.
육통존자는 ‘선녀암’이라고 적힌 표지목 앞에서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마치 빠짐없이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연적하가 쏘아보자 육통존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째 느낌이 이상한데.”
연적하는 조용한 풍지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두마군이라도 나타나 시비를 걸어온다면 귀찮을지언정 마음은 편할 것 같다.
충돌이 없으니 좋아야 하는데 어째 점점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다.
청운검 남궁천이 한마디 했다.
“좋게 생각하자고. 사실 지금까지 유명교주가 시비를 일으킨 적은 없었잖아.”
동감이라는 듯 구천노도 심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백두마군과 십두마병이 지랄맞았지 교주는 잠잠했습니다. 공자님.”
“그렇기는 한데, 우리가 친절하게 안내나 받고 있을 관계는 아니잖아. 내가 팔황을 셋이나 폐인으로 만들었어. 그런데 교주가 이렇게 친절을 베푼다고? 심 노인은 강호 경험도 많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아?”
“원래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누가 압니까? 공자님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건지. 교주가 제정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래? 교주가 제정신이 아니면 더 조심해야지.”
“그래서요?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리기를 바라십니까? 공자님만 남겨 두고 하산하라고요?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심통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빠르게 걸어갔다.
남궁천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그렇다. 교주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너만 보낼 생각은 없다.”
“형님.”
“너 혼자 모든 짐을 지려고 애쓰지 마라. 힘들고 위험한 일일수록 동료가 필요한 법이다. 우리는 네 보호가 필요한 어린애들이 아니야.”
“어린애로 생각한 게 아니라…….”
“적하야. 우리는 검사(劍士)다.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평화나 안전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그게 싫다면 칼을 버리고 농사를 지어야지. 안 그래?”
“하아.”
연적하는 반박하지 않았다.
더 이야기를 했다가는 동료의 사기만 죽일 것 같아서다.
착잡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그에게 십전무후 남궁연이 다가가 속삭였다.
“오라버니도, 석경장의 사람들도, 약하지 않아. 설사 어려운 일을 겪더라도 너를 원망할 사람은 없어. 살아가는 데 어떻게 좋은 날만 있겠니. 풍파를 함께 겪어야 식솔들의 정도 깊어지는 법이야.”
그게 무림세가에서 자란 남궁연의 마음가짐이었다.
‘풍파를 함께 겪는다’는 말에 연적하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그럴 테니까.
오늘따라 검진강호(劍震江湖)라는 말이 무겁게 마음에 와 닿았다.
남궁천의 말이 맞다.
검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평화나 안전과는 거리가 멀다.
그게 싫다면 칼을 버렸어야 한다.
연적하는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 내겠다고.
선녀암으로 다가갈수록 연적하 일행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형형색색의 깃발을 든 수백 명의 유명교 고수들이 질서 정연하게 선녀암 입구 앞에 도열해 있었다.
풍지산 초입의 염왕각은 비교도 안 될 엄청난 규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혹시 유명교 집회라도 열리는 것일까?
연적하는 훌쩍 몸을 날려 육통존자 옆에 내려섰다.
“어이, 아저씨. 오늘 무슨 행사 있어?”
“없소.”
“그런데 이 사람들 뭐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개파대전이라도 열리는 줄 알겠네.”
“교주님께서 그만큼 석경장을 인정하는 거라고 생각하시오.”
“인정 두 번 받다가는 경기 들려 죽겠네. 누가 봐도 무력시위잖아.”
“그래서 두려우시오?”
육통존자가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솔직히 자신도 의외였다.
산 위에서 이 정도로 거창하게 환영 준비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교주님은 호천맹이 쳐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으실 분인데…….’
척 봐도 풍지산의 모든 인원이 동원된 모습이다.
고작 석경장의 방문에 이 정도 준비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 무서워서 지릴 것 같아.”
“표정은 이미 볼일을 끝낸 개운한 얼굴이오만.”
육통존자는 연적하의 대담함에 감탄했다.
말과 달리 그의 얼굴은 석경장에서 보았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십두마병인가?”
연적하가 좌우편에 늘어선 삼십여 명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각각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눈썰미가 뛰어나구려. 맞소. 십두마병은 돼야 깃발을 들 자격이 있소.”
“와아. 십두마병이 바글바글하네.”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과거 개봉의 우국사에서 본 기억으로 해 본 말인데 정말 십두마병이란다.
선녀암이 깃발에 파묻힌 것 같다.
기수들 뒤로 유명교에 투신한 정사파 고수들 수백 명은 덤이다.
“너무 과한 환영 아니야?”
“…….”
육통존자는 대꾸하지 않고 빠르게 선녀암 정문으로 들어갔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해 줄 말도 없었다.
막 정문으로 들어가던 연적하는 따가운 시선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유아독존’이라는 깃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기수와 눈이 마주쳤다.
‘헉!’
원념으로 번들거리는 핏발 선 눈동자의 주인은 큰어머니인 백미주였다.
흠칫 놀란 연적하가 멈춰 서자 남궁연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에요.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연적하는 살기 어린 백미주의 시선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큰어머니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석경장 사람들의 걱정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십두마병과 교도 들로 바글거리는 바깥과 달리 선녀암 안쪽은 한산했다.
신당의 섬돌 앞에 백두마군으로 보이는 세 노인이 일렬로 서 있을 뿐이었다.
“크르르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연적하의 입이 쩍 벌어졌다.
황소만 한 몸통에 개를 닮은 머리가 셋이나 달려 있다?
턱 아래로 용암처럼 붉은 침이 뚝뚝 떨어졌는데, 그때마다 달아오른 쇠를 담금질하는 것처럼 하얀 연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마물과 싸운 경험이 풍부한 연적하도 놀랄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헉! 공자님. 저길 보십쇼.”
심통의 호들갑에 연적하는 시선을 돌렸다.
‘저건 또 뭐야. 마물인가?’
심통이 가리킨 곳에 칠흑처럼 검은 인마(人馬)가 흡사 석상처럼 서 있었다.
일행의 시선이 흑기사에 집중됐다.
“마물……인가?”
남궁천의 자신 없는 말에 남궁연이 고개를 저었다.
“마물이라면 저렇게 얌전히 있을 리가 없어요. 우리가 기존에 만났던 마물과는 다른 것 같아요.”
그때 갑자기 신당 문이 활짝 열렸다.
“과연 십전무후답구나. 잘 보았다. 흑기사는 너희가 전에 알던 마물과 다르다.”
팔황신모는 말과 함께 연적하 일행을 꼼꼼히 살폈다.
‘분명 저들 중에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물이 있으렷다.’
누가 선택받았을까?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의 위엄을 생각하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팔황신모의 시선이 남궁연에게서 멈췄다.
때마침 남궁연이 물었다.
“전에 만났던 마물과 어떤 점이 다르다는 거죠?”
팔황신모는 감출 생각이 없는지 흔쾌히 답했다.
“이전에 너희가 만난 ‘지옥의 마신’들은 모두 ‘저승의 사자’들이다. 하지만 저들은 ‘저승의 사자’가 아니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저승에서 온 게 아니라는 거군요?”
남궁연은 팔황신모의 말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범천욕계왕재천(梵天欲界王在天)’처럼 또 다른 세상에 관한 이야기일까?
“지혜로운 아이구나. 너는 저들이 온 세계에 대해 알고 싶으냐?”
“전혀요.”
남궁연은 칼같이 끊었다.
팔황신모의 입가에 보살 같은 미소가 어렸다.
“알겠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그건 그렇고 책은 가져왔느냐?”
팔황신모의 물음에 연적하가 답했다.
“가지고 왔죠. 책만 주고 가면 되는 거죠?”
“그래, 책을 주고 ‘가면’ 된다.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다.”
“‘저승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장난은 안 됩니다. 말의 중함을 아는 분이니 믿어도 되겠죠?”
“후후,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에게 저승이라니, 그럴 리가 있느냐? 나는 너희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안심이 되느냐?”
팔황신모의 확답에 연적하는 남궁연을 보았다.
남궁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러난 말속에서 다른 뜻은 느껴지지 않아서다.
그녀가 허락하자 연적하는 품속에서 ‘범천욕계왕재천’을 꺼내 들었다.
팔황신모는 연적하를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책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연적하의 신경을 건드렸다.
책이 맞는지, 필사해 둔 것은 없는지, 책을 훼손하지는 않았는지, 등등 여러 질문을 예상했다.
그에 따른 정답을 외우느라 애를 먹었는데 아예 묻지도 않는다고?
심지어 남궁연과의 대화와 달리 지금은 시큰둥한 얼굴이다.
고서에 대한 독점욕으로 ‘팔황의 살겁’까지 일으켜 놓고서 말이다.
연적하가 고서를 들고 신당으로 다가가자 백두마군들이 앞을 막았다.
정확히는 백두마군들에 막혀 전진하기 어려웠다.
머뭇거리는 연적하에게 태백 선인이 손을 내밀었다.
연적하는 순순히 고서를 건넸다.
팔황신모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이윽고 태백 선인이 고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교주에게 다가갔다.
책을 건네받은 팔황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천욕계왕재천이라.’
이쯤 되면 ‘왕들의 하늘’과 자신은 운명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녀는 천천히 책을 갈무리한 후에 연적하를 향해 말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구나.”
“그럼 갑니다. 더 할 말 없죠?”
팔황신모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백두마군들이 연적하와 일행의 사이를 차단했다.
“뭐 하자는 거죠?”
날카로운 연적하의 말에 팔황신모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백두마군들이 너를 배웅하겠다는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됐느냐?”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백두마군들이 왜 나와 일행을 갈라놓느냐 이 말입니다.”
“그야 당연히 너에 대한 예우가 아니겠느냐.”
“예우 같은 개소리하지 마시고. 비켜! 안 비키면 너희가 떠받드는 마신으로 만들어 준다!”
백두마군들을 향해 소리친 연적하는 즉시 품에서 청사(靑蛇)를 꺼내 들었다.
우우웅-.
청사 끝에서 눈부신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그 서슬에 놀란 백두마군들도 반사적으로 자신들의 애병을 뽑았다.
차차창-.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밖에 있던 십두마병과 유명교 고수들까지 몰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당 앞마당은 형형색색의 깃발과 유명교 고수로 가득 찼다.
연적하는 이를 악물었다.
극도의 긴장으로 주변 소음이 사라지고, ‘쿵쿵!’ 하고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언령’을 수련하는 유명교주가 뒤통수를 치다니!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피가 끓었다.
‘오냐! 원한다면 지옥의 문을 열어 주마!’
백두마군과 십두마병의 시체를 쌓으면 풍지산에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