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
5회. 구천현녀경(九天玄女鏡)
딸의 얼굴에 서린 분노를 발견한 남궁벽은 눈썹을 찡그렸다.
‘연이는 나이가 어리지만 어른보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잘 가리는 아이인데, 어쩐 일이란 말인가?’
외부와 담을 쌓고 사는 대신 누구보다 총명한 머리를 가진 딸이다. 그런 딸이 노기를 참지 못해 파르르 떨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벽은 슬쩍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는 안쓰러울 정도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 장하은과 지켜보고 있던 백미주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아주버님, 아직 어려서 모르고 저지른 일이니 그만 용서해 주는 게 어떨는지요.”
“아우님의 말이 맞습니다. 이제 여섯 살과 여덟 살이 아닙니까.”
아내까지 나서자 남궁벽은 장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하아! 연아, 적하는 아직 어려서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그러나 너는 다르다. 아비가 무당산을 찾아가는 이유를 알고 있지 않느냐?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
남궁연은 대답대신 사나운 눈으로 남궁벽과 연무룡을 쏘아보기만 했다.
그런 남궁연을 지켜보던 백미주가 장하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형님, 연이는 원래 말을…….”
당사자들 앞인지라 차마 ‘못하나요?’라고 묻지는 못했다.
“그건 아니에요. 의원이 말하기를 너무 예민해서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은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야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고.”
“아! 저런, 쯧쯧! 얼마나 마음이 여렸으면…….”
백미주가 혀를 차자 남궁연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적의를 띤 남궁연을 보고 백미주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장하은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은 마무리됐다.
다음 날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와룡장을 떠나갔다.
와룡장의 장자인 연무백도 그들과 동행했다.
와룡장에 거주하던 연씨 일족들은 장자를 쉽게 떠나보내는 연무룡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회에 남궁세가와 친밀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도 나왔다.
***
그해 칠월.
참월검객 연무룡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 연무룡의 나이는 고작 40세에 불과했다.
무림 고수인 연무룡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란 연씨 일족은 낙양에서 유명한 의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연무룡의 사망 원인을 알아내게 했다.
조사는 정확히 하루 만에 끝이 났다.
연무룡의 머리에서 주먹만 한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연무룡이 사망하자 백미주는 자신의 본가인 백가장에서 이십여 명의 무사들을 와룡장에 불러들였다. 장주가 죽어 와룡장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녀는 백가장 무사들을 ‘백호대’라고 이름 짓고 와룡장의 무력 부대로 임명했다.
자연히 와룡장에 있던 연씨들의 입김이 약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미주는 명실상부한 와룡장의 여주인이 되었다.
사실 백미주가 와룡장의 여주인이 된 데에는 연씨 일족들의 방관도 한몫했다.
그들은 남궁세가에서 수련 중인 연무백이 돌아오면 어차피 와룡장의 주인이 될 거라고 믿었다. 세 아이들(연무백, 연승백, 연설주)의 친모(親母)가 백미주인지라, 그들 간에 다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 나아가 연씨 일족은 백미주가 와룡장을 무림 세가로 키우려 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연씨 일족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와룡장 안팎의 연씨 일족은 백미주가 와룡장을 손에 틀어쥐는 것을 묵인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백씨들이 와룡장에 상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팔월이 되자 찌는 듯한 더위가 시작됐다.
어느 날 낮에 백미주가 총관 연무독을 안채로 불러들였다.
“오라버니, 와룡장에서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라버니밖에 없어요.”
백미주의 말에 연무독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며칠 전부터 백미주는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사촌형 연무룡이 살아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연무독은 계속된 백미주의 교태에 넘어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오라버니가 되어 주기로 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백미주가 서늘한 눈으로 연무독을 바라보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제가 데리고 온 종년에게 남편을 빼앗겼어요.”
“그래, 나도 형님이 좀 심했다고 생각한다.”
“요즘 적하를 볼 때마다……. 죽은 남편과 종년의 얼굴이 떠올라서 괴로워요. 그 아이를 제 눈에서 안 보이게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설마, 나에게 조카를 죽이라는 말이냐?”
연무독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아무리 백미주의 원한이 깊다 해도 그건 무림 세가를 꿈꾸는 와룡장에서 할 일이 아니었다.
“저도 그렇게 독하지는 못해요. 그저 제 눈에서 보이지 않게 해 달라는 뜻이에요.”
“보이지 않게?”
“어차피 그 아이는 정상도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고 봐요.”
“그건 그렇다만…….”
연무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연무룡이 사망한 뒤로 적하는 매우 이상하게 변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 가까워요. 짐승을 곁에 두고 살 수는 없어요.”
“허면 어쩌면 좋겠느냐?”
백미주가 연무독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리고 연무독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 넣었다.
“별채 뒤쪽에 창고가 하나 있잖아요.”
“그 창고는…….”
그곳은 본래 술 저장고로 쓰이던 곳이다.
연무룡이 그걸 창고로 개조하고, 연씨 일족에게 대대로 전해져 오던 온갖 잡동사니들을 옮겨다 놓았다. 빛도 잘 들지 않아 생전에 그는 농담 삼아 ‘나쁜 놈들을 잡아 이곳에 가두어도 되겠다’고 할 정도였다.
연무독이 복잡한 표정으로 백미주를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얼굴은 거의 맞닿을 정도로 붙었다.
백미주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그 아이는 우리 와룡장의 수치예요. 그곳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끄응…….”
연무독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다.
조카를 창고에 가두고 말고는 더 이상 그의 관심이 되지 못했다.
백미주의 향긋한 숨결에 취한 연무독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발정난 개처럼 백미주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날 오후, 연무독은 목수를 불러 창고문 옆에 머리통만 한 보조 문짝을 달았다. 음식물은 물론 대소변을 처리할 단지를 넣고 빼기 위해서다.
저녁이 되자 그는 여섯 살의 연적하를 데리고 창고로 갔다.
“너에게 문제가 많다는 거 알지? 너는 연씨 집안의 골칫거리다. 그러니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연적하는 삼촌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연무독은 어린 조카를 창고에 가두고, 직접 출입문을 봉했다. 그에게는 연적하보다 백미주와 함께 만들어 갈 미래가 더 중요했다.
‘오래 살지 못할 테지…….’
운 좋게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볕도 들지 않는 곳이니 결국 병에 걸려 앓다가 죽어 갈 것이다. 그를 위해 백미주가 의원을 부를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연무독은 자신의 손으로 어린 조카를 사지에 몰아넣고 모든 것을 백미주의 탓으로 돌렸다. ‘나는 그저 와룡장의 총관이며, 여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할 뿐이다’라고 말이다.
***
만약 총관인 연무독이 연적하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자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창고에서 연적하는 오히려 평화를 느꼈다.
큰엄마의 집요한 괴롭힘으로부터 해방된 것만으로도 연적하는 만족했다. 솔직히 연적하는 와룡장보다 창고가 더 마음에 들었다.
처음 며칠은 그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적하는 밀폐된 공간이 주는 공포에 잠식되어 갔다.
“으아아아!”
“꺄아아아아!”
쾅. 쾅. 쾅. 쾅.
밤이 되면 두려움은 더 심해졌다.
연적하는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명을 지르고, 문과 벽을 두들겼지만 소용없었다. 여섯 살짜리 아이의 외침과 그의 손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터무니없이 작았다.
아니, 설령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와룡장에서 여주인 백미주의 뜻을 거스를 사람은 없으니까.
그걸 모르는 연적하는 매일 밤마다 힘껏 소리를 질렀다.
창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별채다.
그러나 별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백미주의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백호대였다. 고수인 그들은 아이의 비명 소리를 들었지만 모두 외면했다.
그들은 주인인 백미주가 그동안 연무룡에게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알고 있었다. 창고에 갇힌 연적하의 어미는 백가장 출신의 여종이다. 그들에게 연적하는 단지 주인을 물어뜯은 개의 새끼였다.
그래서 연적하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면 백호대 무사들은 인과응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철저히 무시했다. 심지어 비웃고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
***
그렇게 십여 일이 지났다.
어린 연적하는 밀폐된 창고에 익숙해져 갔다. 어쩌면 백미주의 괴롭힘에 그의 정신이 단련된 덕분인지도 몰랐다. 특별한 계기도 없이 연적하는 더 이상 좁고 어두컴컴한 창고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연적하는 벽 위에 뚫린 작은 쪽창으로부터 바깥세상의 신선한 바람이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머리를 바닥에 대면 보조문짝 아래의 작은 틈새로 몇 그루 나무가 보인다는 것도 알았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연적하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거나 문이나 벽을 두드리지 않았다.
***
연적하의 일상은 극히 단조로웠다.
눈을 뜨면 먹고, 싸고, 창고의 물건을 구경하다가, 다시 먹고, 싸고, 잠들었다.
가끔씩은 무료함에 창고를 뒤졌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인 연적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제한적이었다.
창고에 버려진 잡동사니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며 구경하는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잡동사니를 너무 어지르면 걸어 다닐 공간이 줄어들어 상당히 신경을 써야 했다.
연적하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창고에 스미는 바람이 조금씩 선선해질 무렵이다.
잡동사니의 가장 밑바닥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뭔가가 깔려 있었다.
연적하는 낑낑거리며 끄집어냈다.
전체가 녹과 때로 뒤덮인 그것은 거울 같았다.
찬찬히 살피니 뒷면에 ‘구천현녀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연적하는 별생각 없이 헝겊으로 닦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잘 닦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연적하는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널린 게 시간이니까.
거울을 닦는 건 꽤나 힘든 일이어서 땀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연적하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되었다.
그제야 연적하는 거울의 묵은 때를 벗겨 낼 수 있었다.
거울의 표면을 반들거릴 정도로 닦아 내자 왜소한 어린아이가 보였다.
어느덧 일곱 살이 된 연적하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
거울 속의 아이도 따라서 손을 흔든다.
연적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청동거울은 신기하게도 눈동자에 담긴 것까지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재미 삼아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연적하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