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04
504회. 완전하지 못한 존재
팔황신모가 기가 막힌 얼굴로 되물었다.
“깊은 뜻이라고요?”
“너는 천하제일의 초능을 얻은 것과 유명교 교주가 된 것이 우연인 줄 아느냐? 이 세상에 그저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 모두가 너를 향한 나의 안배였느니라.”
운명론자인 팔황신모의 눈빛이 흔들렸다.
금사가 설명하듯 말을 이어 갔다.
“왕들의 하늘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태일관에서의 너는 ‘왕들의 하늘’에서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일은 단계가 있느니라. 그때의 너에게 필요한 것은 불로불사가 아니라, ‘왕들의 하늘’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아!”
팔황신모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태일관 시절의 자신은 삼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십두마병이 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금사의 말대로라면 고육지책(苦肉之策)인 셈이다.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하늘만 알 수 있으리라.
생각에 잠겨 있는 팔황신모의 귓가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나를 많이 원망하였겠구나.”
“……예.”
팔황신모는 속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동안의 데면데면한 관계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망은 하되 내 진심을 의심하지는 마라. 너와 나의 관계는 염마왕과의 관계처럼 단순하지 않다. 염마왕의 권속에서 풀려나면 나와 새로운 계약을 맺자꾸나.”
“계약요?”
“왕들의 하늘은 현세나 저승과 달리 공평함을 기초로 한다. 나와 대등한 관계를 맺으면 상위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아, 예.”
팔황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마왕의 권속’만 면할 수 있다면 계약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팔황신모가 답하자 금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작은 신당은 이내 고요해졌다.
팔황신모는 눈을 반개하고 명상에 잠긴 금사를 힐끔 보았다.
‘원망은 하되 의심은 말라’고 했다.
의심을 넘어 자신이 신살자(神殺者)를 계획하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될까?
묘한 배덕감에 짜릿한 흥분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금사는 다른 세상의 신적 존재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 금사의 관계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오죽하면 신살자를 꿈꿀까.
그런데 금사는 왜 자신을 도울까?
자신은 공물을 바치거나 제사를 드리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금사는 태일관 시절부터 아낌없이 베풀고 있었다.
“금사님.”
“무슨 일이냐?”
“금사님은 왜 저를 도와주고 계시는 건가요? 금사님에게 제가 필요한 것 같지 않은데 도움을 주시니 감사 하면서도 송구해서요.”
“‘왕들의 하늘’에 있는 신격들은 미완의 상태니라.”
“미완요?”
“‘완전하지 못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욕계에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여하튼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욕망이 있느니라.”
“욕망이 있다면 더더욱 남을 도울 이유가 없지 않나요?”
“후후. 욕망은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 무엇이 어찌 한 가지뿐이겠느냐?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것조차 욕망이다. 나는 나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니 송구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도사들은 적선(積善,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최고의 수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적선 수행’도 다니고요. 그런 욕망이라면 오히려 완전에 가까워지는 게 아닙니까?”
“지나침은 모자란 것만 못하니라. 적선으로 도를 얻으려는 마음이 깊어지면 그것은 욕망이 된다. 무심무사(無心無事)를 터득하지 못한 자는 욕계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격을 가진 내가 ‘왕들의 하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을 알고 있으시면서, 왜 ‘돕는다’는 욕망을 버리지 않으십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는 ‘왕들의 하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버리지 않는 게 아니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라.”
팔황신모가 기이한 눈으로 금사를 보았다.
남을 돕는다는 마음이 욕망이라니?
태일관 시절에 ‘적선 수행’을 했던 자신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쩌랴.
신이 그걸 욕망이라 말하고 있음에야.
‘왕들의 하늘’이라는 세계가 생각보다 복잡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금사가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불로불사에 대한 생각을 끊어 본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러하다. 네가 ‘왕들의 하늘’에 간다 해도, 너는 끊임없이 불로불사를 추구할 것이다. 그걸 추구하는 동안 너 역시 ‘왕들의 하늘’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로불사의 세계이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천자마처럼 불로불사로 십만 년쯤 살아 본 뒤에도 그런 마음일까?”
“…….”
팔황신모는 일순 머뭇거렸다.
십만 년 뒤의 마음 상태를 알 수가 없어서다.
“더구나 ‘왕들의 하늘’보다 훨씬 뛰어난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래도 ‘왕들의 하늘’에서 치열하게 살고 싶어질까?”
“‘왕들의 하늘’보다 좋은 세계가 있나요?”
“있다마다. ‘왕들의 하늘’은 불가에서 말하는 ‘욕계’에 불과하다. 그 위로 ‘색계’와 ‘무색계’가 있으니 그곳이야말로 극락이니라.”
“…….”
금사의 설명에 팔황신모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중에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의 관심은 ‘왕들의 하늘’에 있었다.
그런데 ‘왕들의 하늘에서 치열하게 살고 싶어질까?’라는 물음이 마음에 걸렸다.
“금사님. ‘왕들의 하늘’은 어떤 곳인가요?”
“어떤 곳이냐니?”
“조금 전에 ‘왕들의 하늘에서 치열하게 살고 싶어질까?’라고 물으셔서요.”
“아하. 일전에 얼핏 이야기한 적이 있다만,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네가 일전에 ‘천자마를 아느냐’고 물은 걸 기억하느냐?”
“예, 금사님과 경쟁하는 관계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때 말해 주지 않았더냐. ‘왕들의 하늘’에서는 모두가 경쟁을 한다고. 신격을 가진 존재는 군주가 되기 위해, 군주들은 왕이 되기 위해, 왕들은 천신이 되기 위해.”
“저는 군주나 왕, 천신에 관심이 없으니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습니까?”
“너야 관심이 없겠지만 다른 존재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존재들요?”
“신격을 잃고 타락한 ‘왕’과 ‘군주’들 말이다.”
“예.”
“그들은 욕망에 사로잡힌 반신급의 괴물이 된다. 그들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모두가 군주나 왕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군주나 왕의 신격을 얻으면 반신급 괴물도 어쩌지 못하니까.”
“아!”
“괴물뿐 아니라 군주급 이상의 존재는 모두가 위험하다. 그들의 욕망을 알고 대처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죽임을 당할 수 있지. 그러니 치열하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저를 천두마왕의 길로 이끄셨던 겁니까?”
“그러하다. 그들의 지배에서 살아남아야 불로불사든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팔황신모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왕들의 하늘’에만 가면 끝날 줄 알았는데 파고들수록 ‘산 넘어 산’이다.
이제야 금사에 대한 오해가 조금은 풀어지는 듯하다.
‘왕들의 하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구나.’
마치 삼류 무사가 무림의 대마두들 틈 속에서 살아남는 것과 비슷했다.
불현듯 팔황신모가 말했다.
“참, 날이 풀리는 대로 황군과 함께 북방 정벌에 나설 예정이에요. 혼자 다녀올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십두마병의 마물과 달리 ‘왕들의 하늘’에서 온 흑기사, 금사는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았다.
당연히 함께 갈 수도 있지만, 세간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두고 갈 생각이었다.
“내가 도와야 하는 게 아니라면 남아 있도록 하마.”
“네, 그럼 흑기사를 잘 부탁드려요.”
팔황신모가 슬쩍 금사의 안색을 살폈다.
다소 냉랭하던 처음과 달리 훈훈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마무리됐다.
북방 정벌 후에도 이런 분위기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십만 명의 참수로도 안 된다면 정말 ‘신살자’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
산서성.
교구현.
임정객점.
해거름 무렵.
이두 마차 한 대가 객점 문 앞에 멈춰 섰다.
뒤이어 한파에 얼굴이 발갛게 얼어붙은 마부, 지일강이 조심조심 내려왔다.
추위에 몸이 굳어서 그의 움직임은 부드럽지 못했다.
그사이 마차 문을 열고 연적하와 구천노도 심통이 밖으로 나왔다.
“연 나으리, 말씀하신 임정객점입니다.”
“수고했어요. 내일 아침에 풍지산으로 갈 테니까 그때까지 푹 쉬세요.”
“예, 예.”
지일강이 시원하게 대답했지만 연적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뿐이지 그가 마차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다.
연적하는 지일강을 스쳐 지나 객점으로 들어갔다.
넉 달 전에 머물고 간 손님이지만 주인은 용케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쇼! 나으리. 그간 뜸하셨습니다?”
“집이 멀어요.”
“아, 그러셨군요. 지난번에 묵으신 방이 비어 있는데, 내어 드릴까요?”
“그렇게 해 줘요.”
“지난번처럼 저녁과 아침을 드실 겁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일단 저녁부터 드셔야죠? 좋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주인은 점소이에게 객실 정리를 시키고. 주문을 직접 받아 갔다.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던 심통이 문득 한마디 했다.
“그래도 한번 머물렀던 곳이라고 집에 온 것 같네요. 이래서 다니던 곳을 가나 봅니다?”
“개봉의 남연객점이 딱 이랬는데. 안 가 본 지도 꽤 되네. 장사는 잘 되나 몰라?”
“그래도 일 년에 한두 차례 따박따박 수익금을 보내 주지 않습니까?”
“나야 모르지. 누님이 받아서 관리했으니까.”
“공자님, 너무 가모님께 맡기고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닙니까?”
“왜? 나는 머리 쓰지 말고 그 시간에 칼이나 한 번 더 휘두르라면서?”
“그야 그렇습니다만 너무 무관심한 것도 아닌 것 같아서요. 물론 가모님이 잘 하시겠지만 최소한 장사가 잘되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고 계셔야지요. 객점 주인이 공자님이니 신경을 좀 쓰시는 게…….”
“신경은 개뿔. 남직례성에서 개봉에 있는 손바닥만 한 객점을 무슨 수로.”
“남 소저에게 팔아 버리시든지요.”
“한두 푼도 아니고, 갑자기 그 정도 돈이 있겠어?”
“그렇네요. 공자님이 이렇게 빨리 혼인할 줄 알았으면 안 샀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내일 일은 모르는 거야.”
“맞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 여전히 내일 일을 모르겠습니다.”
심통이 회한 어린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심 노인은 이제 몰라도 되는 나이잖아?”
“허! 잘 나가시다가 왜 또 그러십니까? 설마 남연객점에 관심을 두라고 한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여?”
“그렇게 물어보시면 저는 정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쪼잔하다는 소리네.”
심통은 듣지 못한 척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연적하가 구시렁거릴 때, 점소이가 음식을 내왔다.
탁자는 금방 따끈따끈한 요리로 가득 찼다.
“어휴! 너무 많이 시킨 거 아냐?”
연적하가 걱정하듯 말하자 심통이 어딘지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 드시고 가십쇼. 당분간은 구경도 못 할 거 아닙니까?”
“알겠는데, 뭐 기분 나쁜 일 있어? 왜 그렇게 입이 튀어나왔어?”
“정말 혼자 가실 겁니까?”
순간 연적하가 눈을 찌푸렸다.
걱정인지, 아니면 ‘그 좋은 곳에 혼자 가냐?’며 샘을 내는 건지 헷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