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05
505회. 제 무덤을 파는구나
연적하가 구천노도 심통을 물끄러미 보았다.
처음 오봉산에서 만났을 때는 야비한 마두였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아무리 봐도 푼수기가 흘러넘치는 옆집 할아버지다.
“나 놀러 가는 거 아냐.”
그러자 심통이 뚱한 얼굴로 답했다.
“누가 놀러 간다고 했습니까? 공자님을 혼자 보내려니 걱정이 돼서 그러지요.”
“그런 거야? 장수하고 싶어서 괜히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니지?”
“공자님, 말씀이 조금 이상하십니다? 장수하고 싶은 건 욕심이 아니라 누구나 바라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 일찍 죽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닌데 왜 자꾸 저의 진심을 왜곡하십니까?”
“왜곡은 무슨, 알았어. 믿어 줄게.”
연적하가 한풀 꺾이자 심통이 다시 은근슬쩍 머리를 들이밀었다.
“저도 같이 가죠?”
“같이 가긴 어딜 같이 간다고 그래? 거기가 뒷동산인 줄 알아? 심 노인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이야.”
“걸어서 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유명교주의 술법으로 가는 건데 거리가 무슨 상관이라고.”
“거리도 거리지만, 아무튼 안 돼. 나는 책임 못 지니까 꿈도 꾸지 마.”
“언제 공자님에게 책임지라고 했습니까? 그런 걱정 하지 마십쇼. 저도 검진강호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 목숨은 제가 책임집니다.”
말과 함께 심통은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나이를 망각한 그의 행동에 연적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 노인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 같아. 저걸 혈기라고 해야 되나? 아님 망령(妄靈)인가? 진짜 알 수가 없네.”
“망령이라니요! 고독한 검객의 자신감을 두고 무슨 그런 말씀을.”
“고독해? 그럼 유명교주는 어때? 둘이 비슷한 연배 아닌가? 말도 잘 통하겠네.”
“그 할망구는 아니죠. 저도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유명교 주는 사오십 대로 보이는구만. 심 노인에게는 그 노인네도 과분해.”
두 사람은 한동안 유명교주를 두고 시시덕거렸다.
그때 구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교구현을 지척에 두고 유명교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배포가 크구려. 강호의 영웅들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십시다. 노부는 염라사자 재견우라고 하오.”
마교 남방 순찰사자 염라사자 재견우가 가볍게 읍을 해 보였다.
천하십대고수들이라면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칠파일문의 장로급이나 녹림 채주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계를 했으리라.
그러나 연적하는 무림사에 어두웠고, 몇 해 전까지 현급 고수(지역 고수)였던 심통은 마교 사방사자의 이름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닭다리를 물어뜯던 심통이 힐끔 돌아보았다.
만약 상대가 별 볼 일 없는 뜨내기였다면 야단쳐 쫓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부리부리한 눈매와 떡 벌어진 체구를 보니 척 봐도 보통이 아니다.
심통은 내심 긴장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쪽은 유명교와 관계된 사람이오?”
재견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친히 별호와 이름까지 밝혔는데 기대한 반응과 거리가 멀다.
‘낭인들이었나?’
유명교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씹기에 호기심에 접근했는데 괜한 짓을 한 모양이다.
한순간 ‘죽여 버릴까?’ 생각했지만 괜히 입맛만 버릴 것 같아 참았다.
“관계는 없소.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보군.”
재견우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강호의 잡배들과 통성명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막 떠나려고 하는 그를 보며 심통이 말했다.
“나는 구천노도 심통이오. 그리고 내 앞에 계신 분은 연 공자님이시고.”
깜짝 놀란 재견우가 급히 돌아섰다.
“남천 연적하가 맞소?”
심통은 두 번 말하지 않고 닭다리를 물어뜯었다.
앉든지 가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재견우는 잠깐 갈등했지만 이내 심통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들이 남천 연적하와 구천노도 심통이라면 자신과 교분을 나눌 자격이 있었다.
“두 분은 혹시 내 별호를 들어 본 적이 없소?”
심통이 닭다리를 입에 문 채로 되물었다.
“염라사자?”
“그렇소.”
“금시초문인데, 유명한 별호요?”
“끙! 유명까지는 아니오.”
재견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마교의 사방사자를 아는 이들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마교의 감찰이라는 신분에 맞게 드러내 활동하지 않은 까닭이다.
심통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살다 보면 알아줄 날이 올 게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지던 재견우가 화제를 돌렸다.
“노부는 유명교주를 만나 볼까 싶어 풍지산에 갔는데, 출타 중이라 인연이 없었소. 두 분은 유명교주를 만났다고 들었소. 유명교주는 어떤 사람이오?”
연적하가 별말 없자 심통이 나섰다.
“한마디로 고약한 마녀요.”
“고약하다?”
“생각해 보죠. 풍지산이 제 땅인 양 그 아래에 천고의 진법을 깔아 놓고, 위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앉았지 않소? 어디 그뿐이오? 유명교의 인신공양도 그 마녀가 퍼뜨렸지, 최근의 ‘팔황의 혈사’는 어떻고? 그게 전부 그 마녀가 벌인 짓 아니오? 그러니 고약하다고 할밖에.”
“허허, 귀하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고약하구려. 그런데 그 천고의 진법에 대해 좀 아는 게 있소? 염왕각에서 발길을 돌리려니 짜증이 나서 말이오.”
재견우는 다음에는 무조건 선녀암까지 올라갈 생각으로 슬쩍 물었다.
“그쪽은 진법에 대해 좀 아시우?”
“귀동냥 수준이오.”
“그럼 올라가지 마시오. 정말 염라사자를 만나 보게 될 테니까.”
재견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절세지경이라 일컬어지는 구천노도 심통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귀하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대단하오?”
“대단하냐고 물었소? 그 이상이오. 혹시 십전무후라는 별호를 아시오?”
“물론이오. 오늘날 십전무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소?”
“그 십전무후 님과 우리 연 공자님, 그리고 곁다리로 무상도제 장무덕이 그 진법에 들어간 적이 있소. 물론 나와 귀영자군도 함께 있었소만.”
“아! 어떻더이까?”
“한마디로 죽다가 살았소. 십전무후 님의 박학다식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염라대왕과 대작(對酌)이나 하고 있을 게요.”
“십전무후 정도가 되면 도전할 수 있겠소?”
“거기에 우리 연 공자님 정도의 무위를 곁들인다면 올라 볼 만할 게요.”
“그러니까 문무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소.”
“허어! 결국 유명교주의 초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구려.”
“맞소. 괜한 객기로 대책도 없이 산을 오르다가는 필히 죽게 될 게요. 한잔 하실라우?”
심통이 술병을 가리켜 보였다.
한계에 봉착해 마음이 착잡해진 재견우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럽시다.”
재견우는 심통이 따른 술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크허! 역시 죽엽청은 산서성이지!”
그는 능청스럽게 안주도 몇 점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뒤이어 탁자에 놓인 술병을 들어 심통의 잔에도 한가득 따랐다.
“이거 내 술은 아니오만 한잔 드리리다.”
심통도 재견우처럼 한입에 술을 털어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서성에서도 이 집 죽엽청은 특별하오. 술에 대한 철학이 느껴지지 않소?”
주루 주인이기도 한 심통은 주인을 칭찬했다.
재견우도 술을 좋아하는지 심통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의 중심에서 비껴 나 있던 연적하가 딴지를 걸었다.
“죽엽청은 왠지 약재 맛이 나서 별로던데. 술은 향설주지. 뭔가 가슴을 적셔 주는 맛이라고 할까.”
하지만 심통과 재견우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들만의 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의외로 주루 주인인 심통과 재견우는 뜻이 잘 맞았다.
특히 재견우는 심통이 주루를 다시 열 거라는 말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심통이 고개를 돌렸다.
“벌써 주무시러 가시게요?”
“아니, 생각할 게 있어서 자리 좀 옮기려고. 여기는 너무 시끄러워서.”
“아, 예. 그렇게 하십쇼.”
오랜만에 뜻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심통은 그를 잡지 않았다.
그건 굴러들어 온 돌인 재견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혀 있던 돌인 연적하는 마음에도 없이 자리를 옮겨 가야 했다.
시끌벅적한 자리에서 비껴 나자 남궁연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심통과 있을 때는 억지로 눌러 두었는데, 홀로 있으니 신경이 온통 그리로 쏠렸다.
남궁연이 사라진 지도 어언 사 개월.
그녀의 능력을 믿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님은 잘 지내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
남궁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연적하에게 주인이 다가왔다.
“저어, 나으리. 술이라도 내올까요?”
“괜찮아요.”
연적하는 술 따위로 남궁연에 대한 근심을 덜어 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빠트리거나 간과한 게 없는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신당.
정오 무렵, 태백 선인이 앞마당으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교주님.”
“무슨 일이냐?”
“연적하가 염라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팔황신모가 읽고 있던 ‘범천욕계왕재천(梵天欲界王在天)’의 책장을 덮었다.
넉 달 만이니 남궁세가에 갔다가 곧바로 온 모양이다.
“어찌할까요?”
태백 선인의 물음에 팔황신모가 담 담하게 말했다.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니 계곡으로 안내하거라.”
“예.”
태백 선인이 물러가자 금사가 눈을 번쩍 떴다.
“연적하가 누구기에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냐?”
“십전무후의 남편으로 금사님도 본 자예요.”
“아! 그가 제물이 되기를 자처했다는 거냐?”
“예, 부부간에 정리가 깊은지 자신도 보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흥! 제 무덤을 파는구나. 감히 ‘왕들의 하늘’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해?”
“그를 제물로 사용해도 되겠는지요?”
팔황신모는 금사의 안색을 살폈다.
솔직히 자신은 연적하를 그곳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금사가 반대하면 그 핑계를 대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죽고 싶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지. 제물로 쓰도록 해라. 그를 바치면 너에게 더 큰 힘이 주어질 게다. 어쩌면 여덟 왕[八王]의 신격이 올지도.”
팔황신모는 암암리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동생을 보는 것처럼 애틋했는데, 운명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풍지산 계곡.
태백 선인이 연적하와 함께 계곡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육통존자가 검은 염소가 매인 줄을 잡고 뒤따랐다.
주변을 둘러보던 연적하가 태백 선인에게 물었다.
“계곡이 한산하네? 아저씨, 원래 초혼제를 드릴 때 이렇게 조용해?”
“아니오. 교주님께서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으셔서 그런 거요.”
“왜?”
그러자 태백 선인이 연적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신도 그게 궁금했다.
연적하라는 놈의 어디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특별 대우를 하는지.
제단 근처에 도착하자 육통존자는 검은 염소가 매인 줄을 연적하에게 건넸다.
교주가 자리를 비우라고 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이윽고 태백 선인과 육통존자가 바람처럼 계곡 밖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연적하가 검은 염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염소야, 너는 곧 죽을 줄 모르고 천하태평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