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06
506회. 선악의 구별조차 없는 세계
교구현.
영후촌.
대작주루(對酌酒樓).
사시 정(오전 10시).
술장사를 시작하기에 이른 시간이지만 주인은 부지런히 술을 내왔다.
주루에는 오직 한 사람만 앉아 있었다.
붉은 도갑에 염소수염.
최근 남천 연적하와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는 구천노도 심통이다.
자작자음하던 심통이 돌연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쾅!’ 소리가 나자 계산대에 서 있던 주인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아니 걱정이 돼서 함께 가 주겠다는데! 기어코 혼자 가는 건 뭐냐고! 내가 오래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래두 믿지 않고! 사람을 뭐로 보고 말이야!”
씩씩거리던 심통은 죽엽청이 든 술병을 아예 입에다 대고 들이부었다.
절반은 입으로 나머지 절반은 상체로 흘러내렸다.
이윽고 심통이 술병을 바닥에 내던지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술맛 젓 같네!”
술병이 산산조각 났지만 주인은 감히 가서 치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분을 이기지 못해 씨근덕거리던 심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두 발 달린 짐승이 어딘들 못 가? 갈 거야. 가서 봐야지. 잘 가나 못 가나.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가는 거라도 봐야지. 안 그래?”
심통은 듣는 이도 없는데 열심히 자신이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맞아, 가야지. 배웅 정도는 해도 되잖아. 그게 의리고 정인 거지. 암!”
자문자답(自問自答)한 심통은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철전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취객 전용의 팔자걸음으로 주루를 빠져나갔다.
주루를 나설 때까지 비틀거리던 걸음은 열 걸음 정도 걷자 반듯하게 바뀌었다.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질풍처럼 내달렸다.
일다경(약 20분)쯤 지났을까?
풍지산에 도착한 심통은 경공술을 멈추고 빠르게 염왕각(閻王閣)으로 다가갔다.
심통의 얼굴을 알아본 유명교도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월하교당에 소속된 탈명도 고진석이 교도들을 이끌고 나왔다.
“나는 탈명도 고진석이오. 어쩐 일로 오셨소?”
심통은 대답 대신 고진석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전해지는 기운이 십두마병이다.
그래도 법보인 금강곤이 수중에 있어서인지 전과 달리 부담은 없었다.
“연 공자님의 제사를 참관하러 왔다.”
“남천 연 공자를 말하는 거요?”
“그럼, 나에게 연 공자님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또 있느냐? 안내해라.”
“기다려 보시오. 올라가도 되는지 윗선에 확인을 받아야겠소.”
고진석은 시종일관 정중했다.
눈앞의 심통도 연적하처럼 십두마병을 참살할 수 있다는 걸 알아서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라.”
시건방진 심통의 말에 고진석은 울컥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심통과 시비를 일으켜 봐야 자신만 손해인 까닭이다.
고진석은 애써 무덤덤한 얼굴로 염왕각을 빠져나가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한창 산길을 오르던 고진석은 때마침 하산하던 태백 선인과 육통존자를 마주쳤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고진석을 보고 태백 선인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구천노도가 연적하의 제사에 참관하고 싶다며 염왕각을 찾아왔습니다.”
“흠.”
태백 선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백두마군은 물론 팔황들까지 물린 마당에 구천노도를 올려보내도 되는지 모르겠군.’
그냥 돌려보내야 하는데 구천노도가 연적하의 심복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교주가 연적하를 아끼니 별것이 다 신경 쓰인다.
태백 선인의 고민이 길어지자 육통존자가 한마디 했다.
“뭘 고민하십니까? 교주님께서 우리 팔황들까지 물리셨는데 구천노도가 무슨 대수라고.”
“그가 연적하의 심복이라 그러네. 교주님께서 연적하를 각별하게 대하시니 혹시 모르지.”
“설마 초혼제에 참관을 허락하시려고요.”
“그건 모르는 일이네.”
육통존자는 태백 선인의 말을 부인하지 못했다.
연적하에 대한 교주의 관대함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랄 바는 아니었다.
숙고 끝에 태백 선인은 직접 심통을 데리고 제단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초혼제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도 있었다.
단숨에 염왕각으로 내려온 태백 선인은 심통과 함께 다시 산을 올랐다.
정면을 바라보며 묵묵히 걷던 태백 선인이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귀하는 언제부터 연 공자와 함께 다녔소?”
“오봉산에서부터다. 그건 왜 묻느냐?”
“허면 와룡장 시절에 대해서는 모르겠구려?”
“공자님에게 들어서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 흐흐, 궁금한 게 있나 본데, 말을 뱅뱅 돌리지 말고 물어라.”
노회한 심통은 금방 태백 선인의 속을 꿰뚫어 보았다.
태백 선인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연씨들에게 핍박받았다고 들었소. 삼장불립도 그래서 나온 말이라고.”
“그랬지.”
“와룡장의 다른 연씨들과 종자가 달랐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연 공자님에게는 배다른 형제들이 있다.”
“혹시……. 아니오.”
태백 선인은 혹시 그의 생모에 대해 아느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교주에게 너무 불경스러운 짓을 하는 것 같아서다.
“흥! 싱거운 놈. 사내대장부가 말을 하다가 말다니. 물건은 왜 달고 다니누.”
그의 조롱에 태백 선인이 발끈했다.
“귀하는 연 공자의 생모가 누군지 아시오?”
“알지.”
“누구요?”
“왜? 연 공자님이 너희 교주의 아들이라도 될까 봐?”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요? 살고 싶다면 다시는 그런 망발을 입에 올리지 마시오.”
“흐흐,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이놈아.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흰소리하지 말고 생모를 안다면 누군지나 말해 보시오.”
“연 공자님의 생모는…….”
심통은 뜸을 들일 뿐 속 시원히 가르쳐 주지 않았다.
본래 누가 궁금해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줄 사람도 아니고, 유명교도들의 오해가 깊을수록 자신도 대접받는다는 걸 알아서다.
***
풍지산 계곡.
연적하가 한창 검은 염소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허공에서 팔황신모가 떨어져 내렸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느냐?”
“재밌는 얘기가 아닌데요?”
연적하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염소에게 ‘너 곧 죽는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재미있을 리가 있나.
“그래? 재미있어 보이던데.”
“인생도 멀리서 보면 재밌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참하다고 하잖아요. 여기 분위기도 그랬다고 생각하면 돼요.”
“비참이라. 너는 비참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
“글쎄요.”
연적하가 애매하게 답했다.
지인도 아닌, 어쩌면 원수에게 자기 마음속의 이야기를 왜 한단 말인가.
팔황신모가 연적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염소가 매인 줄을 달라는 뜻이다.
연적하가 줄을 건네자 그녀는 염소를 끌고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나는 사천성 성도 북쪽의 백사하 강변에서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았다. 가난했지만 근면한 아버지 덕분에 굶는 일은 없었지. 개구쟁이 남동생은 다정다감했고, 막내는 재롱둥이였다.”
“저기요, 그렇게 화목한 집에서 자란 사람이 지금은 왜 그런데요?”
연적하는 속으로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나도 착하게 사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남들은 그를 ‘소악마’라고 불렀지만 연적하는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했다.
십전무후 남궁연과 심통이 입만 열면 착하네, 마음이 여리네 해 댄 결과다.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 갔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지. 처음에는 어머니가, 그 뒤로 아버지와 막내, 그리고 남동생까지 죽었다. 파리에 뒤덮인 가족들의 시체를 묻은 게 나다. 마을을 떠나던 날 본 백사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백사하 강변의 우리 집은 멀리서 보면 그림 같지만, 실상은 비참했으니까. 나는 죽은 가족들의 몫까지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불로불사가 인생의 목표가 된 거예요?”
“부인하지 않겠다. 너의 처를 제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금사가 원했기에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연적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뒤 사정은 이미 지난번에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범천욕계왕재천’이라는 잡서(雜書)가 상방에 유통되고 있다 들었다. 십전무후의 작품이겠지?”
“그래요? 난 처음 듣는 소린데.”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세가를 급하게 오가느라 그런 소식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범천욕계왕재천’이라면 유명교주에게 돌려준 책인데, 아무래도 남궁연이 혼자서 모종의 일을 추진했던 모양이다.
“내가 네 처에게 한 짓이 있으니 탓할 생각은 없다. 뒤늦게 소란을 피우고 싶지도 않고. 그걸 회수하려 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테니까.”
팔황신모는 ‘범천욕계왕재천’이 잡서로 떠돌다 잊혀지기를 바랐다.
“그렇겠죠.”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 때문에 ‘팔황의 혈사’가 났다는 걸 알면 천하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 것이었다.
“혹시 너는 그 책을 읽어 보았느냐?”
“아뇨?”
“쯧쯧! 읽어 두지 그랬느냐. ‘왕들의 하늘’에 대해 기록한 유일한 책이거늘.”
“누가 그러더라고요. 책 같은 거 읽지 말고 그럴 시간에 칼을 휘두르라고.”
“쯧쯧! 누가 그런 무식한 소리를! 육체의 벽을 칼질로 넘는다면, 깨달음의 벽은 책으로 가능하다. 머리가 트이지 않는다면 평생 그 너머의 경지를 알지 못할 것이야. 게다가 이제 곧 네가 가야 할 세상이 아니더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했거늘.”
팔황신모는 마치 제자에게 가르치듯 잔소리를 했다.
“혹시 나한테 미안한 마음 있어요?”
연적하가 팔황신모를 빤히 보았다.
호의는 적의든 감정은 상대에게 전해지기 마련이다.
잔혹하기로 소문난 팔황신모가 유독 자신의 앞에서는 물렁물렁했다.
넉 달 전에도 그랬다.
그날 금사와 합공했다면 석경장 식솔들은 다 죽었을 게다.
어디 그뿐이랴.
홧김에 막 나갈 때는 받아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이해를 시키려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지금도 마음 쓰는 게 눈에 보였다.
지금까지 천 명이 넘는 수도자의 목을 베었고, 이제 또 십만 명의 목을 베겠다는 마녀가, 자신에게는 왜 이토록 인간적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있느냐? 그저 마녀의 변덕이라고 생각해라.”
“아, 변덕이구나.”
연적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지금이야 친절하지만, 당장 등에 칼을 꽂아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유명교주였다.
팔황신모는 계곡물 앞 널찍한 공터에 우뚝 서서 연적하를 보았다.
“‘왕들의 하늘’은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다. ‘범천욕계’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잊지 말아라.”
“욕망요?”
“그래, 욕망을 벗어 버리지 못한 존재들의 세상. 깨달음은 선한 존재만의 것이 아니니라. 도(道)에는 선악의 구별조차 없지 않더냐.”
“그, 그렇죠.”
낙천적인 연적하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무지를 반성했다.
무당파 속가제자임에도 불구하고 팔황신모의 말은 너무도 어려웠다.
“상위의 존재가 되어서도 벗어 버리지 못한 욕망이라면, 그 크기가 어떠하겠느냐?”
“엄청 크려나?”
어딘지 자신 없는 음성이다.
“‘왕들의 하늘’을 무릉도원과 비슷한 곳으로 생각했다면 꿈에서 깨거라.”
“…….”
그 말뜻을 조용히 되새기고 있는 연적하의 귓가로 팔황신모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금사와 같은 존재가 다스리는 곳이 무릉도원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