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07
507회. 구주(九州)와 마천(魔天)
팔황신모의 말에 연적하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팔황신모에게 십만 명을 참수하라고 했으니 그 사악함의 정도를 알 만도 하다.
팔황신모의 전음이 계속됐다.
-‘왕들의 하늘’은 세 천신(天神)과 여덟 왕 그리고 아홉 군주가 다스리는 곳이다. 신격을 가진 존재들과, 경쟁에서 밀려 타락한 반신(半神)들을 조심하거라.
연적하가 눈치껏 전음으로 물었다.
-타락한 반신요?
-‘왕들의 하늘’에서 신격을 가진 존재는 경쟁을 한다. 그 경쟁에서 밀려 낙오되면 욕망에 사로잡힌 반신급의 괴물이 되고. 반신급 괴물과 신격을 가진 존재는 위험하니 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고 대처하도록 해라.
-왜 나에게 그런 걸 알려 주는 거예요?
-말하지 않았느냐? 마녀의 변덕이라고. 십전무후가 살아 있다면 말이 통하는 구주(九州)로 갔을 테지. 그러니 구주로 가서 십전무후를 찾아라.
-구주요?
-십전무후라면 그중에서도 ‘완산주(完山州)’일 게다.
팔황신모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적하에게 ‘범천욕계왕재천’에 대한 설명을 해 줄 시간이 없어서다.
-구주는 뭐고 완산주는 뭔가요?
-그 이상은 네가 직접 알아내거라. 물론 살아남는 게 먼저겠지만.
전음을 끝낸 팔황신모는 검은 염소를 끌고 너른 곳으로 걸어갔다.
연적하는 단호한 팔황신모의 태도에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던 것에 비하면 이게 어디란 말인가.
벌써 절반쯤 남궁연을 찾은 기분이다.
원수에게 도움을 받으니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착잡한 마음에 연적하는 한마디 던졌다.
“당신은 연 누님을 건드리면 안 됐어요. 연 누님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하세요.”
“후후, 그러마. 그런데 지금은 네 처보다 네 걱정을 해야 할 때인 것 같구나.”
말과 함께 팔황신모가 검은 염소의 목을 뽑았다.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익숙하게 역오망성을 그려 나갔다.
연적하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역오망성의 제작 과정을 응시했다.
눈에 불을 켜고 보는 게 어떻게든 외울 기세다.
“이 술식(術式)은 벌써 네 처가 보았으니 심기를 낭비하지 마라.”
“…….”
그제야 연적하는 눈에서 힘을 풀었다.
남궁연 앞에서도 같은 문양을 그렸다면 굳이 자신까지 애쓰지 않아도 됐다.
팔황신모는 들고 있던 검은 염소의 몸통을 휙 내던진 후에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어쩌면 이게 현세에서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 역시도 이것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하거라.”
남궁연에게도 같은 소리를 했었다.
그건 어쩌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아니라 불로불사의 세계로 보내 준다고.
그제야 무겁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마침내 팔황신모의 입술이 열렸다.
“레나 티아그 아이에 야하 자두 삼라트.”
역오망성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파파파팟- 화르르륵-.
불꽃은 이내 거대한 불길로 변해 역오망성을 집어삼켰다.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화염이 충천하고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차올랐다.
남궁연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다.
그 압도적인 불길에 팔황신모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악의(惡意)로 가득한 연기가 계곡 전체를 휘감았다.
연적하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사방에 귀기가 넘실거리자 급히 구천여일진경(九天如一眞經)을 암송했다.
구천기가 움직이자 오소소 돋았던 소름이 가라앉았다.
계곡 전체를 덮었던 연기가 제단으로 빨려 들기 시작했다.
휘리리링-.
검은 연기가 제단 위로 응집하며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위쪽을 응시하던 연적하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무기?’
청사만큼이나 커다란 검은 이무기가 하늘 위를 유유히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이무기와 연적하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이무기가 아가리를 벌려 포효하더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래로 떨어질수록 이무기의 입은 점점 커졌다.
이윽고 쩍 벌어진 이무기의 입이 역오망성 문양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콰아아-.
아니, 집어 삼켜지는 건 검은 이무기였다.
이무기의 거대한 몸통이 빨려들 듯 역오망성 안으로 사라졌다.
“…….”
시간조차 정지한 듯 기이한 적막이 계곡에 감돌았다.
뒤이어 역오망성 중심에 키가 십 척(약 3미터)쯤 되는 남자가 나타났다.
“헉! 천자마(天子魔)?”
팔황신모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 손에 거대한 창을 든 거인은 분명 오래전 만났던 천자마였다.
‘왕들의 하늘’에서 왕이 강림한 것이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창대 끝에 걸려 있는 기이한 글자가 적힌 깃발이 사납게 펄럭거렸다.
구천노도 심통과 태백 선인이 계곡에 들어선 것은 초혼제가 끝났을 때다.
심통은 설마 제사가 벌써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연적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심통에게 태백 선인이 말했다.
“초혼제가 끝난 것 같은데 그래도 교주님을 만나 보겠소?”
“뭐? 끝났다고? 누구 마음대로!”
버럭 소리치던 심통이 연적하를 부르며 계곡 안쪽으로 달려갔다.
“공자님! 공자님!”
깜짝 놀란 태백 선인이 황급히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바람처럼 내달린 심통은 팔황신모 앞에서 멈춰 섰다.
허겁지겁 뒤따라온 태백 선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리를 조아렸다.
“교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구천노도가 초혼제에 참관하게 해 달라고 해서 교주님께 데리고 오던 중이었습니다.”
팔황신모가 심통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청객이 난입했음에도 의외로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늦었다. 초혼제는 이미 끝이 났느니라.”
멍한 얼굴로 서 있던 심통이 머리를 숙였다.
“교주님! 저도 제물이 되고 싶습니다! 저도 공자님에게 보내 주십시오!”
“너는 자격이 없다.”
팔황신모가 냉랭하게 말하자 심통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저도 알 만큼 아는 놈입니다. 제물에 무슨 자격이 필요합니까!”
“구천노도, 죽지 못해 안달이 났구나.”
팔황신모가 살기를 일으켜 압박하자 심통은 구천기로 저항했다.
금방 심통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심통의 입가에 혈흔이 비치자 팔황신모는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연적하에게 충성하는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다.
“자격이 없다고 한 것은 네가 ‘왕들의 하늘’을 견디지 못할 거라는 뜻이니라.”
“괜찮습니다.”
“현세에서 보장된 네 삶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팔황신모에게 심통의 부탁은 이해 못 할 것이었다.
죽을 자리로 보내 달라니?
“교주님은 연 공자님과 가모님이 현세로 돌아온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모른다. 현세와 ‘왕들의 하늘’을 오간 자는 아직 없었다.”
“범천욕계왕재천의 저자는요? 그는 어떻게 ‘왕들의 하늘’에 대해 알았답니까?”
“구전범천(俱全梵天)이라는 자가 있었느니라. 어느 날 그가 수도 중에 ‘왕들의 하늘’을 기억해 냈다. 삼생(三生)을 관조하던 중에 본 것이지. 육신(肉身)으로 욕계를 넘나든 자는 아직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가겠습니다.”
“귓구멍이 막혔느냐? 조금 전에 육신으로 오간 자가 없었다고 했거늘.”
“예, 확실히 들었습니다. 연 공자님과 가모님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제가 가서 모셔야지요. 저의 남은 삶은 제 것이 아니라 연 공자님의 것입니다.”
“‘왕들의 하늘’은 현세보다 상위의 세계다. 너도 삼두견을 보았겠지? 길에서 만난 개조차도 너보다 강할지 모른다. 너의 무위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인데도 가겠느냐?”
“살고 죽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늘이 이 목숨을 원한다면 내드려야지요. 그게 아니라면 연 공자님을 모시고 다닐 테고.”
“어리석은 놈이로군. ‘구밀복검’이라고 하더니만 아주 못 쓰게 변해 버렸어.”
비난과 달리 팔황신모의 눈은 웃고 있었다.
연적하 부부의 정이 깊더니, 녹림도 출신인 종복(從僕)의 의리도 보통이 아니다.
“부끄럽습니다.”
심통은 교주의 입에서 잊고 있던 별호가 튀어나오자 얼굴을 붉혔다.
“유시 초(오후 5시)까지 검은 염소를 가지고 이 자리로 오거라. 네가 원한 일이니 혹여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죽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물러가라.”
“예.”
심통과 태백 선인이 이구동성으로 답한 뒤에 왔던 길을 돌아갔다.
산을 내려가던 태백 선인이 지나가듯 물었다.
“연적하가 사라졌으니 귀하의 뜻대로 살면 될 텐데, 왜 제물이 되려 하시오?”
“내 뜻이 연 공자님을 모시는 것이다.”
“별일이구려. 녹림의 의리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소.”
심통이 태백 선인을 힐끔 보았다.
해탈한 것처럼 표정이 담담해서 비웃는 것인지 감탄인지 알 수가 없다.
“너희 팔황은 어떠하냐? 교주의 제자면 의리가 남다를 텐데.”
“뭐가 어떻단 말이오?”
“폐인이 된 사형제들을 위해 복수라도 할 생각이냐?”
“우리 팔황의 정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깊지 않소. 서로 필요할 때 돕는 정도라고나 할까.”
이때만큼은 태백 선인도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팔황 중에 다섯이 남았지만, 여기서 더 줄어들어도 슬퍼할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
선녀암.
신당.
방 안에 한 사람과 두 신격(神格)이 마주 보며 앉았다.
팔황신모와 금사, 그리고 천자마다.
십 척에 달하는 천자마의 커다란 덩치로 신당의 절반이 차 버린 느낌이다.
팔황신모가 천자마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자마님을 위해서라도 신당을 다시 짓도록 하겠습니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실로 쥐구멍 같은 곳이로다. 황궁에 자리를 잡아도 시원치 않은데. 쯧쯧!”
천자마의 탄식에 금사가 나섰다.
“마천(魔天)의 왕인 천자마시여.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준비되었으니 기쁘게 받아 주십시오.”
“금사여, 그대는 사벌주(沙伐州)의 군주로 구주의 왕인 석제환인을 섬기고 있지 않은가?”
“현세에는 구주의 왕께서 계시지 않으니까요.”
천연덕스러운 금사의 대답에 천자마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과연 지혜로운 대답이로다. 금사여, 본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죽음을 목전에 둔 중생들의 번뇌를 탐식하신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다. 나를 위해 준비된 것도 그러한 번뇌인가?”
왕들의 하늘에서 온 천자마는 마교의 천자마와 결이 약간 달랐다.
‘파괴’와 ‘죽음’을 원하는 건 같았지만, ‘왕들의 하늘’에서 온 천자마는 탐식에 빠져 있었다.
어느 쪽의 신격이 더 높은지는 두 천자마가 만나면 알게 되리라.
“예, 저의 충실한 종복인 팔황신모가 천자마님을 위한 성찬을 준비하였습니다.”
금사와 천자마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팔황신모는 기가 막혔다.
역오망성으로 현신한 존재는 자신에게 종속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금사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종복이라 칭했다.
참다못한 팔황신모가 슬쩍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송구합니다만 종복이라니요? 오히려 금사님과 천자마님이 저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셨습니까?”
천자마의 얼굴이 굳어지자 금사가 급히 나섰다.
“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본래 신격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을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너에게 종속되어 있지만 너는 자신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천자마는 아예 한술 더 떴다.
“네가 죽으면 우리는 현세에서 소멸될 것이다. 하지만 본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격의 일부가 넘어왔다는 것은 그런 의미니라. 그래도 종속 운운할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