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46
546회. 첫눈이라 궁금해서 와 봤어요
구주의 종문들은 무턱대고 싸움박질만 하지는 않는다.
대화와 타협으로 필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게 조절하기도 한다. 종문들의 전쟁으로 구주가 멸망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종문에서 그 일을 주도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독요’의 고수들이다.
그보다 아래인 ‘원영’의 고수가 나서지 않는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다.
최소한 ‘검령’은 쓸 줄 알아야 종문에서 말이 먹히기 때문이다.
중재자 역할을 하는 위치라 그런지 ‘독요’의 고수들은 좀처럼 싸우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독요’의 경지, 정확히는 ‘검령’을 얻은 뒤로는 무위의 고하를 판별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알고 싶으면?
서로 간에 검격을 나눠 보면 된다.
하지만 경지가 높을수록 위험부담이 커지므로 독요의 고수들은 싸우기를 꺼려 했다.
그걸 보면 혈주종의 우이단녹록은 꽤나 호전적인 사람이다.
먼저 싸움을 건 것으로도 부족해 악착같이 따라가 죽이겠다고 하는 걸 보면. 물론 자신이 우세하다는 걸 알아서 그러는 걸 테지만 말이다.
우이단녹록이 옥청 진인과 구천노도 심통의 앞에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클클, 고작 이 정도밖에 못 오다니? 실망이야. 그 늙은이는 설마 종복인가?”
살기를 감지한 심통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기, 어르신.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는 이쪽 분의 종이 아닙니다. 그저 헤어진 일행을 찾아다니던 중에 우연히 만난 것뿐입니다.”
그러자 우이단녹록이 차갑게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천관산맥에서 일어난 일은 천관산맥에 묻혀야 하니까.”
종문 간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거나 상하게 하면 동일한 형태의 복수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우이단녹록이 옥청 진인을 죽인 게 알려지면 천뢰종에서도 반드시 혈주종의 독요 고수 하나를 죽일 것이었다. 그러니 우이단녹록으로서는 목격자까지 죽여야 했다.
녹림의 마두인 심통은 단번에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우이단녹록의 말을 알아들었다.
외통수에 걸린 상황임을 인지한 심통은 즉시 옥청 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내가 호락호락 당할 줄 아시오!”
심통이 옥청 진인을 힐끔 보았다.
비록 그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한 손 거들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옥청 진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대는 종문의 고수에 대해 전혀 모르나 보군.”
“예?”
“저 사람의 천목(天目)을 보게.”
“천목요?”
심통이 못 알아듣자 옥청 진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양미간을 보라는 말일세.”
그제야 심통은 죽장을 든 노인의 두 눈썹 사이를 유심히 보았다.
손톱만 한 크기의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작은 문신(文身)이 있는데, 그걸 보라는 겁니까?”
“이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군. 저건 문신이 아니라, 검령을 얻은 자만이 받는 성흔(聖痕)일세. 그가 ‘독요’의 고수라는 뜻이지.”
“‘독요’요?”
“인선(人仙)이라 불리는 ‘독요’도 모른단 말인가?”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이단녹록이 죽장을 힘차게 휘둘렀다.
“잔머리 쓰지 말고 그냥 죽어라!”
돌연 허공에서 살검령인 흑룡이 튀어나와 옥청 진인을 향해 날아갔다.
검날로 뒤덮인 흑룡의 몸통이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심통이 놀라 입을 쩍 벌릴 때다.
옥청 진인이 마지막 영기를 쥐어짜 자신의 활검령을 불러냈다.
그의 앞에 바다처럼 시퍼런 검벽이 펼쳐졌다.
검벽에 튕겨 났던 흑룡이 비늘을 거꾸로 세우고 다시 달라붙었다.
가가가각-.
기괴한 소리와 함께 검벽이 조금씩 깎여 나갔다.
옥청 진인이 넋을 잃고 서 있는 심통에게 소리쳤다.
“어서 가게! 나는 저 살검령을 막지 못하네! 물론 저 노괴가 보내 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맥없이 죽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심통이 유엽도를 뽑아 들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이 자리에서 끝을 봐야지요!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습니까?”
“용기는 가상하나 저것은 검령이네. 검령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검령’과 ‘법기’뿐이야. 그것 외에는 설사 자네가 진검강(眞劍罡) 을 쓴다 해도 당해 내지 못해.”
“…….”
심통이 기막힌 얼굴로 ‘검벽’과 ‘흑룡’을 보았다.
‘진검강’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검강’과 비슷한 것이리라.
그런데 궁극의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검강’이 ‘검령’을 당해 내지 못한다니?
너무도 엄청난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냥 가게! 여기서 허망하게 죽을 작정인가!”
사실 옥청 진인이 ‘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심통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첫째는 우이단녹록의 주의를 돌리기 위함이요, 둘째는 운 좋게 그가 살아나가 천뢰종에 오늘의 일을 전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아니나 다를까?
우이단녹록의 시선이 심통을 향했다.
그 순간 옥청 진인은 허공으로 도약하며 검령을 불러들였다가, 다시 끄집어냈다.
다시 나타난 검벽이 우이단녹록의 주변을 크게 휘감았다.
모두가 우이단녹록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윽고 흑룡이 방금까지 옥청 진인과 나란히 서 있던 심통을 덮쳤다.
우이단녹록은 검벽이 자신을 옥죄어 오자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지독한 놈! 범부(凡夫)를 방패로 삼다니!”
말과 함께 그는 자신의 살검령인 흑룡을 회수하려고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꽈꽝!
요란한 폭음과 함께 살검령인 흑룡이 뒤로 튕겨 났다?
뜻밖의 광경에 당사자인 우이단녹록은 물론 옥청 진인조차도 멈칫했다.
특히 옥청 진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심통을 제물로 반격에 들어갔는데, 그 심통이 오히려 살검령을 때려잡고 있다니!
눈에 힘을 주고 살피니 심통의 손에 금강저가 들려 있었다.
‘저건 설마 법기(法器)인가?’
한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법기는 종사의 영기가 깃든 신물(神物)로 지선(至仙)이라 일컬어지는 ‘현인’들이나 가지고 다닐 뿐, ‘독요’에서도 구하기 힘든 보물이었다.
그 귀한 게 왜 일반인 손에 있단 말인가?
심통이 법기로 흑룡을 쫓아내자, 옥청 진인은 황급히 심통의 곁으로 돌아갔다.
우이단녹록은 자신의 살검령인 흑룡이 피해를 입자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옥청 진인의 편에 법기가 있다면 자신이 패할 게 뻔하니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찰거머리 같던 우이단녹록의 기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자 옥청 진인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를 의식해 억지로 버티고 서 있었지만 실은 이미 기운을 다 소진한 상태였다.
깜짝 놀란 심통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잠시 운기를 할 터이니 주변을 지켜 주시게.”
“예.”
옥청 진인은 눈을 반개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일각(15분)에 걸쳐 대주천을 하고 나니 비로소 상체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잠시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난 옥청 진인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에게 큰 도움을 받았군. 오늘 자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 걸세.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일세.”
‘그대’에서 ‘자네’로 호칭도 한결 친근하게 바뀌었다.
심통은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운기조식을 마친 옥청 진인은 그야말로 신선과도 같아 감히 눈도 마주 보기 어려웠다.
그런 존재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치켜세워 주니 가슴이 떨릴 지경이다.
“어이쿠! 별말씀을요. 저도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그 괴인에게 당했을 겁니다.”
흐뭇한 눈으로 심통을 보던 옥청 진인이 물었다.
“그런데 그 법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흔치 않은 모양새인데.”
“아, 이 금강저요? 오래전 조원촌의 신당(神堂)에서 얻은 겁니다.”
옥청 진인은 조원촌이 어디에 있는 지를 물으려다가, 말을 바꿨다.
장소보다는 누구에게 받았는지가 더 중요해서다.
“누구에게 그걸 얻었는가?”
“웬 늙은 신당지기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저에게 주고 죽었습니다.”
“신당지기가?”
옥청 진인이 심통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터럭 하나만큼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신당지기로 분해 그에게 법기를 전해 준 모양이로군. 그런데 죽었다고?’
법기를 전해 준 것까지는 알겠는데 죽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근 종사나 현인 중에 죽었다는 사람이 없어서다.
“내가 법보를 좀 봐도 되겠나?”
“……아, 예.”
심통은 잠시 멈칫했지만 순순히 금강저를 넘겼다.
옥청 진인이 빼앗으려고 들면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아서다.
그러면서도 빼앗길까 봐 불안한지 옥청 진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옥청 진인은 금강저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겉모습만 봐서는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곰곰 생각하던 그는 법기로 내력을 은근히 밀어 넣어 보았다.
‘응?’
옥청 진인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된 일인지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지던 내력이 금강저에 이르러 툭툭 끊어졌다.
종사가 만든 것치고 불량품이다?
‘아니지. 우이단녹록의 살검령을 물리친 법기가 어찌.’
고민하던 옥청 진인은 금강저에 깃든 영기를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에 금강저의 영기가 닿았다.
여기서 ‘흡자결’을 일으키면 금강저의 영기는 자신의 것이 된다.
탐욕에 휩싸인 옥청 진인이 막 ‘흡자결’을 운용하려는 순간, 금강저가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런!’
옥청 진인이 황망한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금강저와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금강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영기와 금강저의 영기가 상극이었던 모양이다.
‘큰일 날 뻔했구나. 만약 흡자결을 운영했다면…….’
영기를 느낀 것만으로 마비가 왔으니 그걸 받아들였다면 큰 사달이 났을 게다.
옥청 진인은 부정한 물건을 대하는 듯 다시 금강저를 잡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심통이 슬그머니 금강저를 집어 들었다.
“흐음! 이걸 어쩐다? 인근 삼백 리 (약 120km) 안에 자네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구먼. 혼자서 천관산맥을 빠져나가지 못할 텐데, 나와 함께 가겠는가?”
“예? 예, 예.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합지요.”
심통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살아남아야 연적하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현재.
수약주.
조양성.
산음현 현천문.
구주의 겨울은 ‘혹독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추웠다.
어찌나 추운지 한서불침인 연적하까지도 살짝 한기(寒氣)를 느낄 정도였다.
미시 정(오후 2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객사 앞마당을 거닐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나한테도 쌀쌀한 걸 보니 진짜 춥긴 추운가 보다. 심 노인이 있었으면 뼈가 시리다고 난리를 쳤겠는데?”
그는 심통의 호들갑을 떠올리며 씁쓰름하게 웃었다.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심통의 빈자리도-물론 남궁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꽤 컸다.
산책을 끝내고 막 숙소로 돌아가려 할 때다.
아침부터 뿌옇던 하늘에서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왕들의 하늘’에서 맞이하는 첫눈이다.
‘늦가을에 왔는데 어느덧 겨울인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니 털옷으로 중 무장한 공지유였다.
“연 대협.”
“예, 무슨 일이라도?”
“그냥, 첫눈이라 연 대협이 뭐하고 계실지 궁금해서 와 봤어요.”
“저야 평소와 같죠.”
연적하는 심드렁한 눈으로 공지유를 보았다.
첫눈이 뭐 그리 특별하다고 저러는지.
강호든 ‘왕들의 하늘’이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한 모양이다.
“그거 아세요?”
“뭐요?”
“이렇게 눈이 내리면요.”
왠지 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연적하는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구주의 문파들은 자경단을 조직해요.”
“자경단요?”
예상을 벗어난 말에 살짝 미안해진 연적하는 조금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네, 눈이 쌓이면 야수들이 인가로 내려오거든요. 사람들의 피해가 가장 극심할 기간이에요. 그래서 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아!”
강호와 ‘왕들의 하늘’에 사는 사람은, 첫눈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