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73
573회. 죽음의 회랑(回廊)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눈에 거슬리면 안 보면 그만인데, 소요종 고수 곽상문은 굳이 이 남 일 녀를 시야에 두고 불쾌해했다.
북문에서 처음 출발할 때부터 그랬다.
그들이 먼저 북문으로 가는 걸 보았으니 거리를 벌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이 남 일 녀를 따라가며 분을 쌓았다.
물론 그들이 야수에게 당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의 회랑’ 입구에 도착하려면 한 식경(약 30분)은 더 가야 한다.
더구나 ‘죽음의 회랑’에서 저들이 앞서간다는 보장도 없다.
곽상문도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다.
‘가만, 저 방종한 자들이 정작 협곡 입구에서 물러나면 어쩌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아니 그렇게 될 게다.
‘죽음의 회랑’에서 선두에 서면 모든 야수들과 싸워야 할 테니까.
협곡 입구에서 저들이 뒤로 빠지면 지금까지의 바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어리석은 짓을 했어.’
양도 성내에서 저들을 후미로 보냈어야 한다.
그랬으면 한 식경 동안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걸 보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속세에 나오니 벌써부터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
‘제길, 든든한 후원자만 있었어도…….’
결국 종문 제자라고 해도 초반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돈이 없으면 ‘제행각’이나 ‘무상각’에서 원치 않는 일을 해 줘야 한다.
그의 씁쓰름한 표정을 보고 있던 소요종 고수 이휴가 넌지시 말했다.
“곽 사형. 저들이 눈에 거슬리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뒤로 보내시지요?”
물론 배분상 곽상문이 사형일 뿐, 두 사람의 스승은 서로 달랐다.
“이 공도(公道)가 내 것이 아닌데 어찌 눈에 거슬린다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할 수 있겠소?”
그는 자신의 불쾌함이 저 이 남 일 녀 때문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곽상문과 이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종문 제자 원요가 슬쩍 끼어들었다.
“제가 저들에게 주의를 주겠습니다. 협곡에서도 앞서가든지, 그게 아니면 뒤로 빠지라고.”
곽상문과 이휴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원영의 고수들이 그런 부잡스러운 일로 한참 후배와 의견을 나눈다는 게 한심해서다.
원요가 꾸벅 묵례를 한 후에 걸음을 빨리했다.
비록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두 선배의 의중이 어떤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원요는 서너 걸음 뒤처진 짐꾼을 지나 두 남녀의 뒤로 바싹 따라갔다.
급하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연적하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초로의 노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연적하는 노인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과 통성명을 하고 싶지 않아서다.
원요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모르는데요?”
연적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순간 원요는 살심이 일어났지만 선배들 앞이라 꾹 눌러 참았다.
“노부는 소요종의 사람이다.”
“아, 그러시구나.”
그게 끝이었다. 청년의 무덤덤한 반응에 원요는 황당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협곡에서 뒤로 물러날 거라면…….”
“이대로 쭈욱 갈 건데요?”
“‘죽음의 회랑’에서도 앞장서 가겠다는 소리냐?”
“아니면 우리가 왜 앞서가겠어요?”
“너는 혹시 ‘죽음의 회랑’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
“갈마산맥을 관통하는 길이라면서요?”
“맞다. 빠져나가거나 숨을 곳이 없는 위험한 길이지. 온갖 야수들의 서식처이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도 앞서가겠다는 것이냐?”
“예.”
“알겠다. ‘죽음의 회랑’에서도 너희가 선두를 지키거라. 종문 제자에게 허언을 한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겠지?”
“내가 본래 허언이라는 걸 몰라요.”
“그러냐. 알겠다. 지켜보겠다.”
원요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원요는 다시 곽상문과 이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대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저들이 ‘죽음의 회랑’에서도 앞장서 갈 뜻을 밝혔습니다.”
“…….”
곽상문과 이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요는 분한 마음에 한마디 보탰다.
“후배가 소요종 제자라고 밝혔지만 놈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든지, 일신의 재간을 믿는 것이겠지요, ‘제행각’의 임무 수행 중이 아니었다면 단칼에 베었을 것입니다.”
그제야 곽상문의 입이 열렸다.
“재간이 있으니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는 거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그래 봐야 일반인입니다. 몇 걸음 못 가 살려 달라고 매달릴 겁니다.”
“그것도 좋고.”
곽상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저 하룻강아지들이 울며불며 매달릴 걸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는 종문 제자를 경시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알게 해 줄 것이다.
***
죽음의 회랑.
연적하 일행은 협곡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협곡은 좌우 폭이 무려 오십 장(약 150미터)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협곡 양쪽 끝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이라 몸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단하다!”
왜 사람들이 이 협곡을 ‘죽음의 회랑’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입구 외에는 달아날 곳이 없으니 죽을 수밖에.
연적하는 뒤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오십 장쯤 떨어진 곳에 여섯 노인이 서 있었다.
자신들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인지 알 것도 같다.
계속 앞서가라는 소리다.
‘쯧쯧! 옹졸한 늙은이들 같으니.’
여럿이 같은 방향으로 가다 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저 늙은이들은 항상 오십 장 거리를 유지했다.
그 이상 멀어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정면에 야수가 나타나도 이 거리는 좁혀지지 않으리라.
앞에 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천히 말려 죽일 작정인 거다.
‘이건 뭐 구도자(求道者)들도 아니고. 묘한 세상이라니까.’
강호의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문파들은 겉으로나마 대의를 추구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만나 본 종문의 고수들은 그런 게 없었다.
그들은 오직 ‘삼천의 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삼천의 신’은 ‘대의’니 ‘협의’니 하는 따위와 거리가 먼 모양이다.
그러니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저 모양이지.
고개를 젓던 연적하는 망설임 없이 협곡으로 들어섰다.
공지유가 황망히 그의 옆에 붙었고, 정덕행은 연신 뒤쪽을 힐끔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재밌군.”
곽상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 이 남 일 녀가 정말 협곡에 먼저 들어갈 줄은 몰랐다.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청년은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미친 걸까?
아니면 일신의 재간이 뛰어난 걸까?
소요종에서 ‘제행각’의 고수 여섯을 보낼 정도로 ‘죽음의 협곡’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문득 장사꾼도 아니면서 왜 이 길을 가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비승과해’의 참가자인가?
그런 생각을 곽상도만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이휴가 중얼거렸다.
“정말 먼저 가는군. ‘비승과해’의 참가자인가?”
그러자 원요가 말했다.
“그가 ‘비승과해’의 참가자라 해도 이 길은 무리입니다. ‘제행각’에서 여섯이나 보낸 협곡입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나도 ‘제행각’의 고수들만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다른 소요종 고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요종 제자들도 피해 가는 길을 참가자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섯 명의 소요종 고수들도 협곡에 진입했다.
상인과 호위 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 뒤를 이었다.
협곡에 들어선 지 일각(15분)이나 됐을까?
일정한 보폭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백 장(약 300미터)쯤 앞에서 덩치 큰 늑대 세 마리가 뭔가를 뜯어 먹고 있었다.
“덩치가 아주 큰 늑대도 야수인가요?”
“혹시 크기가 황소만 한가요?”
공지유의 물음에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놈 세 마리가 코끼리만 한 사슴을 뜯어 먹고 있네요.”
“그렇게 큰 사슴이면 거록(巨鹿)일 거예요. 초목급 야수인 거록을 사냥할 정도의 늑대면, 최소한 동급(銅級) 이상의 야수일 테고요.”
거록이 아무리 초식동물이라 해도 일반 늑대들이 사냥할 수는 없다.
흥분한 거룩의 뿔에 오히려 늑대들이 찔려 죽을 테니까.
정덕행의 얼굴이 굳었다.
‘죽음의 회랑’ 초입부터 동급 이상의 야수 세 마리라니 기가 막혔다.
연적하는 품에서 청사(靑蛇)를 꺼냈다.
갈마산맥의 영기 때문일까?
청사의 검날이 다른 때보다 더 파랗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늑대들이 거록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피에 젖은 주둥이로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다.
하지만 연적하에게 그런 위협은 통하지 않았다.
아니 협곡을 지나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옳다.
오히려 가까이서 늑대를 확인한 연적하는 청사를 도로 품에 갈무리했다.
연적하가 계속해서 다가가자 늑대 한 마리가 참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순간 연적하의 주먹이 늑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깨앵!”
요란한 비명과 함께 늑대가 나뒹굴었다.
남아 있던 두 마리 늑대들이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상대가 월등히 강하다는 걸 알고 싸움을 포기한 것이다.
연적하는 늑대들이 슬슬 기자 더 손쓰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연적하 일행이 저만큼 멀어져 가자 늑대들은 다시 거록에게 몰려들었다.
거록을 물어뜯던 늑대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더 많은 인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숫자에서 밀린다고 생각했는지 늑대들은 몇 번 으르렁거리다가 그냥 달아나 버렸다.
거록을 확인한 원요가 말했다.
“거록이군요. 애송이가 물리친 게 일반 늑대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동급이었네.”
이휴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은 영 꺼림칙했다.
동급이라 해도 세 마리나 되는 늑대를 청년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맨손으로 팼다.
지금 늑대들이 달아난 것은 조금 전 인간에게 당한 기억 때문이다.
곽상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설마 그 나이에 벌써 ‘연단(종문 입문단계)’을 넘어섰다는 말인가?”
청년은 늑대들과 대치할 때 전혀 긴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동급 야수 세 마리를 상대하려면 최소한 연허에는 들어야 한다.
이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를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지만 ‘연허’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원요가 말했다.
“연허라고 해도 혼자서는 절대로 ‘죽음의 회랑’을 통과하지 못할 겁니다.”
‘죽음의 회랑’에는 은급, 금급은 물론 종종 영물들까지 나타난다.
오죽하면 소요종에서 ‘원영’의 고수 둘과 ‘연허’의 고수 넷을 보냈을까.
거록의 사체를 지나쳐 앞으로 쭉쭉 나아가던 곽상문의 입술이 실룩였다.
“철사자 무리를 만났군. 철급의 야수들이라면 ‘연허’로는 확실히 무리지.”
소요종 고수들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철사자 무리와 앞서간 사람들의 결투가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