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74
574회. 오십 장의 의미
연적하와 소요종 고수들과의 거리는 오십 장(약 150미터).
어느 한쪽이 야수에게 공격당할 때 즉각적으로 돕기 어려운 거리다.
둘의 거리는 양도의 성문 앞에서 결정됐다.
만약 상단이 제때 출발했다면 연적하는 자연스럽게 상단의 후미에 합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 개 상단주들은 소요종 고수들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그들이 자기 의지대로 하는 것은 ‘숨 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소요종 고수들이 선두에서 뭉그적거릴 때 누구도 출발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남는 시간에 양도의 상인들을 줄 세웠다.
양도의 상인들이 만만한 까닭이다.
북문에 도착한 연적하는 그 대열에 끼지 않았다.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줄까지 서 가며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어서다.
당연히 연적하는 세 개의 상단이 양도의 상인들에게 한창 유세를 떨 때, 북문으로 나갔다.
항상 최상의 대접을 받던 소요종 고수들에게 그건 일종의 도발이었다.
보호받아야 하는 일반인들이 보호자 행세를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게 오십 장의 거리 유지다.
그건 선두의 이 남 일 녀가 야수에게 당해도 돕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죽음의 회랑’ 초입까지 오십 장의 거리는 잘 지켜졌다.
그런데 철사자를 발견한 뒤로 소요종 고수들의 평상심이 살짝 흔들렸다.
이 남 일 녀와 철사자들의 싸움을 좀 더 생생하게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오십 장의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전방에 아홉 마리의 사자가 보이자 연적하는 청사를 뽑아 들었다.
사자 무리를 살피던 공지유가 말했다.
“가죽과 갈기가 회색인 걸 보니 철급(鐵級) 야수인 철사자네요.”
“철급 맞아요?”
“네, 보통의 검기로는 가죽이 베어지지 않을 거예요.”
막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연적하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오십 장 거리를 유지하던 소요종 고수들이 사십 장(약 120미터)까지 접근해 있었다.
‘구경을 하시겠다?’
싸움 구경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없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구경거리가 되는 입장이면 말이 다르다.
‘내가 광대는 아니잖아.’
끓어오르던 투기가 급속도로 식었다.
하지만 이쪽에서 싸울 마음을 버렸다고 해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회색 갈기의 수사자 세 마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수사자 뒤로 암사자 여섯 마리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왔다.
철사자들이 몰려오자 연적하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피할 곳은 없었다.
‘가만 철사자들이 우리를 먹이로 봤다는 거잖아?’
먹이가 아니라면?
철사자보다 월등히 강한 포식자라면? 그래도 철사자들이 어슬렁어슬렁 몰려올까?
그러지는 않을 게다.
연적하의 시선이 청사(靑蛇)로 향했다.
청사의 실체는 이무기다.
자신이 몇 번이나 본 이무기는 최소한 영물, 어쩌면 신수일지도 몰랐다.
마물로 변한 독안귀마와 비교해 볼 때 청사는 신수에 가까웠다.
철급 야수가 신수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연적하는 즉시 ‘일점무량(一點無量)’과 ‘포라천지(包羅天地)’의 구결을 떠올렸다.
손바닥의 ‘청사’가 꿈틀했다.
엄지손가락의 소상혈(少商穴)을 통해 구천기를 청사에 밀어 넣었다.
우우웅-.
청사가 부르르 떨며 검명을 토해 냈다.
이윽고 칠색 서기에 휩싸인 청사가 연적하의 손바닥에서 펄떡거렸다.
연적하는 쥐고 있던 청사를 슬쩍 풀어 주었다.
꾸아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삼십 장 길이의 푸른 이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사가 뿜어내는 절대자의 격(格)에 철사자들이 반응했다.
마치 뱀을 만난 쥐처럼, 철사자들의 몸이 한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철사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연적하는 즉시 구천기를 거두어들였다.
거짓말처럼 이무기가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절대자의 격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마치 향기처럼 청사의 검신에 은은하게 맺혀 있었다.
굳어 있던 철사자들의 몸이 풀렸다.
이무기가 사라졌지만 철사자들은 감히 연적하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아니 신수(神獸)의 잔향(殘香)에 철사자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연적하 일행은 유유히 철사자 무리를 지나쳤다.
잠시 후 흉포함을 되찾은 철사자들 앞에 소요종 고수들이 나타났다.
아직 ‘원영’의 고수를 경험해 보지 못했는지 철사자들은 소요종 고수들을 겁내지 않았다.
철사자 무리가 다가오자 곽상문이 중얼거렸다.
“먹이가 아닌 인간도 있다는 걸 아직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
이윽고 곽상문은 검을 뽑아 들고 철사자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수사자들이 일제히 곽상문을 덮쳤다.
“크르르!”
“크형!”
“커헝!”
처음에는 덩치가 큰 세 마리 수사자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곽상문의 검에서 검강이 줄기줄기 뻗치자 분위기는 역전됐다.
수사자들의 철판 같은 거죽이 쫙쫙 갈라지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먹이로 생각했던 인간의 역습에 수사자들은 쩔쩔맸다.
암사자들은 수사자들이 일방적으로 몰리자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몸을 사렸다.
기어코 검강에 수사자 한 마리의 목이 잘렸다.
머리를 잃은 수사자가 풀썩 꼬꾸라지자 나머지 두 마리의 수사자는 허겁지겁 달아났다.
철사자 무리와 곽상문의 싸움은 반 각(약 7분)도 되기 전에 끝났다.
철사자들이 달아나자 곽상문은 느긋하게 납검했다.
그러나 단신으로 철사자 무리를 물리쳤음에도 곽상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런 곽상문에게 이휴가 다가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저에게 맡기시지 그러셨습니까?”
“먹이로 보였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그랬소. 그나저나 저자가 무슨 수법을 펼쳤는지 아시겠소?”
“환술이 아니겠습니까?”
이휴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이무기를 떠올렸다.
환술이다. 환술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곽상문은 환술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신수의 격(格)이 느껴졌소. 환술로 형(形)을 만들 수 있겠지만, 격은 불가능하지 않소?”
이휴는 감탄한 눈으로 곽상문을 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격까지 파악하다니? 과연 원영 칠 성의 고수는 다르다.
“그래서 철사자들이 물러난 거였군요. 격까지 갖춘 형태라면 환술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본 그 이무기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휴가 눈을 찡그렸다.
환술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한데, 아니라니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원요가 끼어들었다.
“혹시 법기(法器)가 아닐까요?”
그러자 이휴가 고개를 저었다.
“신수를 불러내는 법기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
법기는 종사의 영기로 만든다.
종사의 영기와 신수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 법기라 할 수 없었다.
원요는 자기가 말하고도 이상한지 더는 법기 소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소요종 고수들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가던 곽상문이 기막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 그러고 보니 다시 오십 장이군. 내가 철사자와 싸우는 걸 지켜봤다는 건가.”
순간 이휴의 얼굴이 굳었다.
반각이나 늦게 출발했는데 오십 장 거리라면 이 남 일 녀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자신들이 거리를 유지한다고 생각했는데 상대편도 그러는 모양이다.
놀라움과 동시에 분노가 밀려왔다.
“사형, 제가 저 분수를 모르는 연놈들을 죽여 버리겠습니다.”
막 앞으로 달려가려는 이휴를 곽상문이 만류했다.
“아니오. 조금 더 지켜봅시다. 저들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 손을 써도 늦지 않소이다. 어차피 이 길의 끝은 수미성이 아니오? 수미성에서 누가 우리 소요종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있겠소?”
그 말에 이휴는 노기를 가라앉혔다.
수미성에는 소요종 본산이 있기에 소요종의 영향력도 남달랐다.
하급 관리들은 물론 성주까지 소요종의 지시를 따르니 이 남 일 녀는 독 안에 든 쥐였다.
오십 장의 거리는 그날 저녁까지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소요종 고수들은 하루 종일 야수들과 싸웠다.
철급 야수까지는 그런대로 쉬웠다. 그러나 은급 야수인 백호(白虎)와 금급 야수인 천년인면지주(千年人面蜘蛛)를 상대할 때는 여섯 명의 소요종 고수 전부가 달라붙어야 했다.
특히나 천년인면지주와의 싸움은 생사마저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원영 칠 성에 도달한 곽상문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소요종 고수들과 천년인면지주의 싸움이 끝났을 때는 석양 무렵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천년인면지주를 죽였지만 소요종 고수들의 피해도 컸다.
‘연허’의 고수 네 사람은 천년인면 지주의 독에 중독이 됐고, 원영 삼 성의 이휴는 다리가 부러졌다.
그나마 사지가 멀쩡한 사람은 곽상문뿐이었다.
곽상문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독이 두려워 천년인면지주를 불태웠다.
우두커니 서서 불타는 천년인면지주를 보던 곽상문의 시선이 문득 전방으로 향했다.
오십 장 앞에 모닥불이 보였다.
이 남 일 녀는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구워 먹는 것 같았다.
순간 ‘울컥’ 하고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양쪽의 자리가 바뀌었다.
천년인면지주와 먼저 맞닥뜨린 건 저 이 남 일 녀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런 징조도 없이 출현한 이무기가 모든 것을 뒤틀었다.
금급의 천년인면지주는 신수에 맞서지 못하고 구멍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뒤따르던 자신들에게 강철 같은 거미줄을 난사했다.
이무기는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법기가 아니라고 확신하면서도, 법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수가 담긴 법기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남 일 녀 앞에 야수가 나타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걸 보면,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다.
‘법기든 아니든 상관없다.’
곽상문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이 남 일 녀는 얄미우리만치 정확하게 오십 장 거리를 유지했다.
어떤 야수와 얼마나 오래 싸우건 거리는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
구경을 하려다가 도리어 구경거리가 되고 만 셈이다.
불타던 천년인면지주의 몸이 풀썩 소리와 함께 한차례 무너져 내렸다.
매캐한 냄새를 뒤로하고 곽상문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죽인다.’
내일 점심 무렵이면 수미성에 도착할 테지만, 그때까지 참고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그는 굳이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개돼지를 잡으러 가면서 자신의 감정을 감출 이유는 없으니까.
곽상문은 모닥불로부터 오 보 앞에 멈춰 섰다.
나무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 굽던 청년이 힐끔 돌아보더니 말했다.
“우리가 야수로 보여요?”
“노부는 소요종의 곽상문이라고 한다. 너는 누구냐?”
“연적하요.”
“어느 종문의 제자냐. 설마 천지종이냐?”
곽상문은 연적하를 종문의 제자라고 믿었다.
일반인의 무위로 ‘죽음의 회랑’을 활보하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문의 제자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믿기 어렵지만 법기조차도.
어떻게 이전에 법기라야 가능한 결과물이니까.
수약주까지 와서 소요종 제자를 희롱할 종문은 천지종밖에 없으니, 아마도 천지종이 제자이리라.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종문요? 아닌데요? 난 소요종의 ‘비승과해’에 참가하러 가는 사람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