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03
603회. 연 형은 진인이 끝이라고 본다
은소선의 지적에 공지유는 연적하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아, 연 대협과는 같은 마을에서 왔거든요. 연 대협이라는 호칭이 입에 배서. 그러고 보니 앞으로 연 대협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녀가 과거의 인연으로 어려워하자 은소선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연 대협의 나이가 스물넷이면 사형이네요. 제 말이 맞죠? 연 사형?”
은소선은 종사인 태을존자의 제자임에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연적하는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한날한시에 입문했으니까 호칭을 정해야 한다면 사형, 사매가 맞겠죠?”
연적하가 애매한 얼굴로 은소선을 보았다.
사실 그는 명문 출신이 아닌지라 서열에 약했다.
녹림에서는 입산한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졌지만, 무위에 따라 바뀌는 일도 많았다.
여하튼 연적하가 큰 틀에서 동의하자 은소선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연 사형은 어디 소속이에요? 스승이 없는 방사들은 다 칠각이라던데.”
“소격각요.”
말과 함께 연적하는 은소선을 빤히 보았다.
마치 ‘그래서,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묻는 것 같았다.
연적하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
은소선은 본래 털털한 성품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가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던 것은 전적으로 공지유 때문이다.
‘비승과해’에서 오십 근짜리 지종(地鐘)을 들고 온 은소선은, 공지유의 백 근짜리 천종(天鍾)을 본 뒤로 그녀를 꽤나 의식했다.
그러던 차에 무궁전에서 만난 것이다.
은소선은 공지유를 경쟁자로 인정했기에 거리낌 없이 다가갔을 뿐이다.
‘소격각’이라는 말에 그녀가 보인 반응은 다른 소요종 제자들과 비슷했다.
“소격각이라고요?”
은소선이 인상을 찌푸리며 반보 뒤로 물러났다.
소격각은 가장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들만 모아 놓은 폐품 창고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하는 일은 뒷간 청소, 왠지 구린내가 나는 것 같다.
그런 은소선의 행동에 연적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종사의 제자치고 소탈한 모습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해 봤는데 ‘역시나’다.
그는 은소선이 이유를 묻기 전에 빠르게 말했다.
“내 영기가 하품에도 들지 못하는 저질이랍니다. 그 덕분에 소격각에서 똥을 치우고 있어요.”
적나라해도 이보다 적나라할 수는 없다.
똥 이야기에 은소선은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공지유는 속으로 ‘쯧쯧’하고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방금까지 ‘연 사형’이라던 사람이 보일 행동은 아니었다.
보다 못한 그녀가 연적하를 위해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다.
중년의 남자 하나가 다가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여기가 저잣거리인 줄 아느냐? 그만 닥치고, 정히 떠들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라. 그래도 계속 시시덕거리면 다리를 부러뜨릴 것이다.”
허리춤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최소한 노사다.
노사가 왜 만류각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그는 제왕과도 같았다.
공지유와 은소선은 찔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이 연적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놈은?”
연적하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덮고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중년 남자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의 난입으로 어색하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공지유는 연적하와 은소선에게 눈 인사를 보낸 뒤 다른 서가로 걸음을 옮겼다.
은소선은 연적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공지유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떠나자 연적하는 다시 ‘금단양신진결(金丹陽神眞訣)’을 펼쳤다.
은소선의 설명을 들어서인지 더 이상 신비롭지는 않았다.
‘금양진결(金陽眞訣)’의 주해라고 했던가.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는 서가로 돌아가 ‘금양진결’을 찾아보았다.
두께가 족히 한 뼘은 됨 직한 거대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슬쩍 뽑아 보니 유명세에 비해 책은 손을 타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너무 두꺼워서 다들 포기한 모양이다.
‘금양진결’을 보니 ‘금단양신진결’이 돌아다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니면 소요종 제자들이 이미 아는 내용이라 흥미를 끌지 못했던지.
그 자리에서 ‘금양진결’의 앞부분을 펼쳐 읽어 보았다.
[소요종의 종사인 금선 존자가 후학(後學)을 위해 남긴다. 금양진결에는 천애불문비의 명상 중에 얻은 나의 깨달음이 담겨져 있다. 원영지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양신(陽神)을 만들어야 하는데…….]연적하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양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도 일치했다.
‘원영지체’라는 말은 소요종에 와서 처음 들었다.
‘유체이탈’과 ‘원영지체’가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양신의 설명에 이르러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선 채로 정신없이 ‘금양진결’을 읽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오늘은 무슨 장날인가 보다.
돌아보니 소요종에 입문한 뒤로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신이승이었다.
“연 형? 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소? 내가 한참을 쳐다봐도 모를 정도로.”
그의 태연한 목소리에 연적하는 어깨를 움츠렸다.
조금 전에 떠들었다고 욕을 먹어서 그런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읽고 있던 책을 덮어 표지를 보여 주었다.
“아, ‘금양진결’? 거기에는 불필요한 내용이 많아 요즘은 다들 ‘금단양신진결’을 읽는데. 연 형도 괜히 힘 빼지 말고 ‘금단양신진결’을 읽어 보시오.”
순간 연적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사람을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은소선과 신이승의 말이 서로 달랐다.
결국 참다못한 연적하가 나직이 속삭였다.
“종사의 제자가 된 은소선은 원문인 ‘금양진결’을 읽으라고 하던데요?”
“그건 스승에게 들은 원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오. 그렇게 말하면 원문은 ‘천애불문비’가 아니오? 거기에서 ‘금양진결’이 나왔고, ‘금양진결’을 간추린 게 ‘금단양신진결’이니까. 선택은 연 형의 자유지만 나라면 ‘금단양신진결’을 읽겠소.”
청산유수 같은 설명에 연적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다.
원문에 충실하려면 ‘금양진결’이 아니라 ‘천애불문비’ 앞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럼, 수고하시오.”
신이승은 대선배의 풍모를 보이며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뒤늦게 그가 무궁전의 전주인 초요산 제군의 제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말을 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심지어 그가 떠드는 동안에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았다.
만류각의 다른 방사와 노사들도 그가 초요산 제군의 제자라는 걸 안다는 뜻이다.
신이승은 공지유와 은소선을 차례로 만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신이승의 낭랑한 목소리가 만류각에 울려 퍼졌다.
문득 연적하는 아까 자신을 나무라던 중년인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찾았다.
그는 커다란 탁자 한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저 큰 소리가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무경서에 푹 빠져 있다?
‘어이! 기개 넘치는 아저씨 뭐해요! 여기는 저잣거리가 아니라면서요!’
중년 남자를 뚫어져라 노려보았지만 그는 펼쳐 놓은 무경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소격각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돌아보니 신이승이 두 사매를 향해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었다.
“공 사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연 형은 진인이 끝이라고 본다. 존자와 제군들이 그를 제자로 삼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고. 지금이야 그의 무위가 우리보다 앞서 있지만 일 년 후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지. 스승님께서는 종문 제자와 일반인을 가르는 기준이 ‘원영의 유무’라고 하셨다. 은 사매는 알 것 같은데.”
신이승은 자연스럽게 은소선을 끌어들였다.
사매라고 부르며 말을 놓는 걸 보니 그사이에 관계를 정리한 모양이다.
“맞는 말씀이에요. 소격각에 이십오 년이나 된 방사가 있다면서요? 하품(下品)의 영기가 그 정도인데, 그보다 못한 영기라면 생각할 것도 없죠. 그가 소격각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통성명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저도 하루빨리 그에 대한 환상에서 깨시기를 바라요.”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공 사매도 보는 눈이 있으니 오래가지 않을 게다.”
이쯤 되면 거의 막말 수준이다.
마지못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공지유가 반박했다.
“아니요. 연 사형은 두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그분에게는, 영기의 질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어요. 연 사형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그러자 은소선이 기이한 눈으로 공지유를 보았다.
가만 보니 현실이 아니라 본인의 희망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 사저가 연적하를 좋아하나?’
산음현에서 연적하와 함께 왔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사랑에 빠지면 뭔들 희망적이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 해도 그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은소선은 더 이상 연적하와 소격각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강력한 경쟁자 하나가 소격각과 어울린다 생각하면 나쁜 일만도 아니었다.
연적하는 신이승이 ‘공 사매도 보는 눈이 있으니 오래가지 않을 게다’라고 할 때 자리를 떴다.
무궁전에 정나미가 뚝 떨어진 그는 터덜터덜 산을 내려갔다.
‘금양진결’과 ‘금단양신진결’을 그냥 두고 온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금선 존자가 ‘천애불문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자신도 얻게 될 테니까.
그보다는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공허가 밀려왔다.
그들에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자신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흥! 너희들이 나를 배척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니야. 내가 싫어. 그러니 부탁인데 동기니 뭐니 해 가며 내 근처에서 알짱대지 말아 줘.’
“특히 신이승 이 승냥이 같은 놈아! 웃는 얼굴로 뒤통수치지 말라고!”
마지막 말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연적하는 슬쩍 앞뒤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천애곡 방향으로 구불구불 나 있는 숲길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
천주봉.
천애곡.
마음이 위축되면 구석진 자리를 찾아다니게 되어 있다.
연적하는 천애곡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난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오전에만 해도 보란 듯이 정중앙에 앉았었는데, 그 패기는 반나절을 못 갔다.
반개한 눈으로 ‘천애불문비’를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상념으로 들끓었다.
종사와 제군들이 포기한 쓰레기 같은 영기, 평범한 머리, 이십오 년이나 소격각에 있는 벽초, 그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신이승의 말처럼 될 것이다.
‘일 년 후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지’라던 신이승의 말이 귓가에 쟁쟁 울렸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자 십전무후라 불리던 남궁연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녀라면 타고난 영기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문득 남궁연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가혹한 운명을 맞닥뜨려도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때는 하늘이 또다시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해. 순응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남궁연은 분명히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운명에 순응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했다.
천하에서 가장 지혜로운 그녀의 말이니 사실일 게다.
‘운명에 순응하면 신이승의 말대로 되겠지. 하지만 극복할 수 있다면?’
아니, 그녀를 위해서라도 극복해야 한다.
연적하는 머리에 가득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나둘씩 떨쳐 냈다.
이윽고 절망을 뚫고 무사무심(無事無心)의 싹이 텄다.
순간 단전에 침잠해 있던 구천기가 정수리까지 일직선으로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