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04
604회.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두정(頭頂)은 여닫는 구조로 되어 있다.
흔히들 몹시도 화가 나면 ‘뚜껑이 열렸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지면 두정이 열린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과몰입하면 두정이 열려 신비 체험을 하게 된다.
흥분과 관계없이 열릴 때도 있다.
내공의 수련이 깊어지면 부지불식간에 유체이탈로 이어지는데, 그때도 두정이 열린다.
그 열린 두정으로 혼이 빠져 나가는 것이다.
연적하는 갑자기 구천기가 두정으로 몰리자 유체이탈의 순간임을 알았다.
과거에도 종종 그랬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는 괴랄한 세계를 접하게 될까 봐 급히 내가수련을 중지했다.
무인과 무속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게 싫어서다.
하지만 지금은 무속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서라도 ‘천애불문비’의 비밀을 풀고 싶었다.
그는 유명교주가 초월적 지식을 얻기 위해 염매(魔基)를 만든 것처럼, 유체이탈을 선택했다.
‘유체이탈이든 뭐든 사양하지 않을 테니까, 저 고불꼬불한 구름 문양이 뭔지 알려 줘!’
그 와중에도 연적하는 ‘천애불문비’를 응시했다.
혼이 빠져나간다면 ‘천애불문비’에 찰싹 달라붙어 저 기이한 문양들을 직접 매만져 보리라.
누가 알겠는가, 저 신묘한 구름 문양 속에 글자가 숨겨져 있을지.
그런데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구천기에 두정이 열린 순간, 빠져나가라는 혼은 안 빠져나가고 ‘천애불문비’의 구름이 움직였다.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미한 움직임이 아니다.
‘천애불문비’를 담고 있는 절벽 전체가 하얀 뭉게구름에 휩싸여 버렸다.
‘헉! 이러면 더 안 보이는데?’
연적하는 반개(半開)하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저렇게 구름이 석벽을 뒤덮으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지 않은가!
‘망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더 이상 ‘천애불문비’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금선 존자는 대체 뭘 보고 ‘금양진결(金陽眞訣)’을 깨달았던 걸까?
혹시나 금선 존자의 앞에는 구름이 아니라 글자가 떠올랐을까?
왠지 그랬을 것도 같다.
그렇게 연적하가 금선 존자를 떠올리고 있을 때다.
구름 위로 누군가 부드럽게 날아왔다.
그 얼굴은 맙소사!
구천현녀(九天玄女)였다.
연적하는 숨조차 멈추고 구천현녀를 응시했다.
와룡장의 창고에서 마지막으로 본 뒤로 무려 팔 년 만이다.
놀랍게도 ‘천애불문비’에서 나온 구천현녀는 와룡장에서 본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구주(九州)의 진선(眞仙)과 자신이 만난 구천현녀가 동일인임을 확인한 순간이다.
구천현녀와 눈이 마주쳤다.
남궁연을 빼닮은 구천현녀를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왜 구천현녀가 남궁연을 닮았는지 의아해하기보다는 그냥 남궁연이 그리웠다.
지금은 ‘천애불문비’의 비밀을 떠나 구천현녀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구천현녀는 그러지 않았다.
애잔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던 구천현녀가 손을 휘저었다.
‘천애불문비’를 가리고 있던 구름이 좌우로 갈라졌다.
자연스럽게 연적하의 시선이 구천현녀에서 ‘천애불문비’로 옮겨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석벽에 가득하던 구름 문양은 어디로 가고, 매끈한 석경(石鏡)이 나타났다.
마치 대패로 절벽을 밀어 버린 것 같았다.
연적하는 거대한 석경과 구천현녀를 번갈아 보았다.
갑자기 석경이라니?
‘천애불문비’는, 아니 구천현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때다.
오색구름 위에 있던 구천현녀가 돌연 석경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
모든 건 연적하가 눈 한 번 끔뻑일 동안에 일어났다.
방금까지 석경 밖 허공에 둥실 떠 있던 구천현녀는 그렇게 모습을 감추었다.
연적하는 아쉬운 눈으로 구천현녀가 사라진 석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때 석경 속에 와룡장의 창고가 보였다.
좁고 어두운 창고 속을 한 소년이 폴짝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연적하는 단번에 소년이 누군지를 알아봤다.
자신이 거울 속에 갇혀 있을 때, 거울 밖에 있던 또 다른 자아(自我)였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모든 게 보다 더 분명해졌다.
소년은 그저 천방지축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게 아니라, ‘구천현녀경’ 주위를 뱅뱅 돌고 있었다.
거울 속에 갇힌 자신에게 돌아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거울 속에서 자신이 꾀지 않았더라도, 소년은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소년의 자리는 어디일까?
거울 속일까? 거울 밖일까?
소년이 있어야 할 자리를 궁금해하고 있을 때, 소년이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연적하는 생각을 비우고 석경에 집중했다.
자신은 지금도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거울 속에서 울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거울 밖에 나와 있었다.
그게 기억하는 전부다.
그러니 저 석경은 지금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를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두근두근.
소년과 거울이 가까워질수록 심장 뛰는 소리가 커졌다.
마치 가슴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소년이 거울로 손을 뻗는가 싶더니, 이내 거울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마치 조금 전 구천현녀가 석경 속으로 사라지듯 말이다.
“…….”
누구도 거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뭐야? 나는 분명히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방금도 석경이 거울 밖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보여 줬잖아?’
그런데 거울 밖으로 나온 사람이 없다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럼 오봉산은 뭔데? 무당산과 발바닥이 닳도록 돌아다닌 강호는?’
거울 속에는 ‘거울에 비춰진 창고’가 전부였다.
그건 처음 거울 속에 갇혔을 때 몇 번이고 확인했으니 틀림없다.
무당산에서 천둔검을 배우고, 팔황신모와 얽혀 결국은 ‘왕들의 하늘’까지 오지 않았던가!
연적하가 진실을 알려고 애쓸 때, 석경에서 신비한 음성이 들려왔다.
-연적하. ‘구천현녀경’과 ‘석경’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나와 진아(眞我), 육체와 원영(元嬰)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개의 가지에 불과하다.
“그래서요? 내가 있는 세상은 거울 안인가요? 밖인가요?”
-안과 밖을 구별하지 마라. 너와 진아(眞我)가 다르지 않듯 안과 밖도 그러하다.
“구별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육체에는 무한한 신격(神格)을 담지 못해 ‘원영지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건 ‘다르다’는 말이 아닌가요? 내가 본 거울 속 세상도 분명히 달랐어요. 거기에 창고밖에 없었다고요!”
-그들이 말하는 ‘원영지체’도 결국은 육체다. 영기를 담기 위해 인위적으로 그릇을 뜯어고친 것에 불과하지. 하지만 너는 다르다. 너의 자아가 거울 속의 너와 합일(合一)할 때, 너는 경계를 초월하게 되었다. 그릇의 경계조차 없다는 말이다. 너는 그 차이를 알겠느냐?
“그럼 내가 본 거울 속 세상은요? 거기엔 분명히 창고밖에 없었다고요! 숨 막히게 좁았는데, 그게 어떻게 바깥세상과 같을 수 있나요?”
-자아와 합일하기 전의 네 세상은 창고가 전부였으니까. 자아와 합일하고 난 후에 너의 세상은, 지금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지만, 연적하는 더 확실한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럼 지금의 내 삶은 진짜인가요? 내 자아는 분명히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거울 속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요. 이 모두가 거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해 줘요!”
-진짜가 아니라면 포기할 테냐?
“그럴 리가요!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연적하. 너의 자아는 처음부터 거울 안이나 밖에 있지 않았다. 네가 안이라고 생각하면 안이고, 밖이라고 생각하면 밖이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이 여여(如如)함을 알아라.
순간 연적하는 자신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뒤늦게 목소리가 하는 말이 깨달아졌다.
거울 ‘속’과 ‘밖’은 처음부터 나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여섯 살의 어린 자신이 세상을 창고 ‘안’과 ‘밖’으로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
석경이 보여 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안과 밖, 나와 진아(眞我), 육체와 원영, 그 모두가 사실은 같은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구주에 와서 흔들렸다.
영기를 쓸어다 몸에 담으라고.
‘원영지체’를 이루어야 무한의 영기를 담을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도 구주에 만연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당연시했다.
외눈박이 세상에서 슬쩍 한쪽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럼 나는 괜찮은 거죠? 모두가 쓰레기라고 하는데, 정말 괜찮은 거죠?”
-연적하. 하늘의 문[天門]을 열어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내가요? 그건 종사가 할 일이 아닌가요?”
연적하의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는 석경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렸지만 석경은 조용했다.
“저기요? 석경님? 아니, ‘천애불문비’님? 하늘의 문은 그렇다 치고, 내 질문에 대답을 좀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저 쓰레기 아니죠?”
그때다.
대답 대신 석경에 ‘쩌저적’ 금이 가는가 싶더니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쿠르르릉-.
착각이나 망상이 아니었다.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에 지면이 은은하게 흔들렸다.
연적하는 물론 명상을 하고 있던 종문 제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태고(太古)에 창조신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천애불문비’가 사라진 까닭이다.
심상치 않은 진동 때문일까?
천주봉, 범천봉, 관음봉, 용화봉, 삼신봉에서 빛무리가 날아왔다.
이윽고 존자와 제군, 노조들이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뒤이어 소요종 종사인 태을 존자의 절절한 외침이 천애곡에 울려 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태을 존자는 ‘천애불문비’가 사라진 석벽 앞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열두 명의 노조들이 천애곡을 봉쇄했다.
이윽고 천애곡에서 명상을 하던 소요종 제자들이 태을 존자 앞으로 불려 갔다.
태을 존자가 호랑이 같은 눈으로 소요종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진인 다섯, 노사 스물, 방사가 서른다섯이다.
눈치를 보던 진인 중에 하나가 나섰다.
“제자, 무궁전의 목강산 진인이옵니다. 천애불문비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습니다. 제자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라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고 했느냐?”
“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태을 존자는 목강산 진인을 세심하게 훑어보았다.
흔들림 없는 그의 영기를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잘 있던 ‘천애불문비’가 왜 갑자기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천애불문비’에 가장 가까이 있던 자가 누구냐?”
그러자 진인 중에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무상각의 한마관 진인입니다. ‘천애불문비’로부터 십 장(약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목 진인 말대로 징조는 없었습니다. 갑자기 바위가 ‘쩍쩍!’ 갈라지더니 일시에 무너져내렸습니다.”
태을 존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진인 둘이 그렇게 느꼈다면 사실일 게다.
물론 소요종의 원수인 천지종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다.
하지만 ‘천애불문비’는 종문의 뿌리이자 유산이라 절대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연의 현상이라는 소리다.
‘허어! 이 일을 어찌할꼬.’
태을 존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십만 년을 이어 온 소요종의 역사가 자신의 대에서 사라질 판이다.
‘천애불문비’가 없으면 후학(後學)을 양성할 수 없다.
아니 양성은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결코 선대(先代)를 뛰어넘지 못하리라.
영감의 원천인 ‘천애불문비’가 사라졌으니까.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태을 존자는 무너져 내린 돌더미로 걸음을 옮겼다.
세 명의 제군이 침통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조심조심 바위 더미를 들추어 보던 태을 존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너무 훼손이 심해 맞출 수도 없겠구나. 내 대에 이르러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삼천(三天)의 신이 우리 소요종을 버리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