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05
605회. 네 팔자도 더럽게 꼬였구나
삼전(三殿)의 주인인 세 명의 제군들 역시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수십만 년을 내려온 ‘천애불문비’가 사라지다니!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끔찍한 일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군들이 주춤주춤 흘러내린 바위 더미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이 본다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큰 조각에는 더러 온전한 문양도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 잘게 부서져 소실됐다.
조각난 단면이 깔끔하다면야 어떻게든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가루가 난 상태에서는 천 년을 노력해도 안 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소요종의 ‘천애불문비’는 사라졌다.
제군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그러나 소요종 최대의 위기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태을 존자가 제군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록 ‘천애불문비’가 사라졌지만 낙심하지 말게. 그래도 아직 소요종에는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야말로 소요종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노조만 돼도 따로 ‘천애불문비’ 앞에서 명상을 하지 않는다.
‘원영지체’를 이룬 자들에게 ‘천애불문비’는 소요종의 상징에 불과했다.
방사들에게 체계적으로 ‘원영지체’가 되는 방법을 가르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앞으로 더 깊은 경지의 깨달음은 없겠지만 말이다.
단지 ‘원영지체’를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초요산 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선대의 깨달음을 기록한 무경서가 무궁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소요종의 명맥을 잇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한산월 제군과 진곤 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궁전의 무경서야말로 소요종의 또 다른 뿌리라 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진곤 제군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외부에는 뭐라고 해야 할지…….”
당장 다른 종문에 ‘천애불문비’의 유실을 알려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태을 존자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종문의 제군(帝君)들이라면 백 리(약 40km) 밖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을 걸세. 어차피 알려질 거라면 굳이 감출 필요는 없겠지.”
이번에는 초요산 제군이 물었다.
“허면 천애곡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찌하다니?”
“계곡에 이렇듯 ‘천애불문비’의 잔해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제자들의 출입을 허락해야 할지, 막아야 할지…….”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저 조각들로 ‘천애불문비’의 재건이 가능하겠는가?”
세 명의 제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았으면 낙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가하다고 봅니다.”
“힘들 겁니다.”
“그건 신의 영역이라 생각됩니다.”
제군들이 한마디씩 했다.
말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태을 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도 재건할 방법이 없네. 최초의 종사가 되살아난다 해도 같은 말을 할 걸세. ‘천애불문비’의 재건은 삼천(三天)의 신이라 해도 힘들 게야.”
‘삼천의 신도 힘들다’는 말은 의심의 여지 없는 불가능을 의미했다.
제군들은 태을 존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아직 천애곡의 출입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아서다.
“자유로이 오갈 수 있도록 하게. 누가 알겠는가. ‘천애불문비’의 잔해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가 나올지. ‘천애불문비’ 자체에 영성(靈性)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초요산 제군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종사의 지혜는 하늘에 닿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천애불문비’의 영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허허, 하늘이라니. 그렇게 띄워 줄 것 없네. 그냥 돌무더기라고 생각하려니 너무 아까워서, 개인적인 바람으로 해 본 말이었으니까.”
제군들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어렸다.
새삼 소요종 최고의 신비이자 보물인 ‘천애불문비’를 잃었다는 게 실감이 나서다.
문득 초요산 제군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탁본(拓本)이라도 떠 놓는 건데…….”
물론 무경서를 보관하고 있는 무궁전의 주인으로 아쉬움에 해 본 소리다.
구름 문양은 절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태을 존자가 못내 아쉬운 눈으로 돌무더기를 보다가 빛과 함께 사라졌다.
진곤 제군과 한산월 제군도 운종술(雲從術)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떠나려는 초요산 제군을 대라각의 각주인 주역봉 노조가 불렀다.
“초요산 제군님.”
“무슨 일인가?”
“그나마 온전한 ‘천애불문비’ 조각을 따로 보관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려면 창고가 지어질 동안 제자들의 출입을 금해야 하는데…….”
주역봉 노조의 말을 초요산 제군이 끊었다.
“그럴 것 없네. 종사께서 평소처럼 자유로이 드나들게 두라고 하셨네.”
“부서졌다 해도 ‘천애불문비’ 조각인데,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씀이십니까?”
초요산 제군의 입가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요종의 제자라면 저런 반응이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저 잔해들은 복구가 불가능한 바위 조각에 불과했다.
그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깝지만, 놓아 주는 게 맞았다.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복구는 불가능하네. 삼천의 신도 하지 못할 일이지. 종사께서는 잔해를 통해서라도 제자들이 기연을 얻기 바라시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일세. 그래서 바위 조각을 천애곡에 그대로 남겨 두라고 하셨네. 그러니 제자들의 출입을 금하지 말고 자유로이 오갈 수 있도록 하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냥 방치하라는 소리다.
주역봉 노조는 안타까웠지만 종사와 제군들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었다.
“예, 허면 ‘천애불문비’의 조각을 취하려는 제자가 있으면 어찌할까요?”
역시 소요종의 크고 작은 일을 관리하는 위치라 그런지 생각이 남달랐다.
“비록 재건이 불가능한 바위 조각이라 해도, 소요종의 보물이네. 대라각에서 따로 관리하는 인원을 배치해 지키도록 하게.”
“하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주역봉 노조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가 채 고개를 들기도 전에 초요산 제군은 구름을 타고 산 위로 날아갔다.
잠시 후 천애곡을 막고 있던 노조들이 주역봉 노조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무슨 변고요?”
“정말 ‘천애불문비’가 부서진 거요?”
“설마 사람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 것은 아니겠지요?”
노조들이 ‘천애불문비’의 잔해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비록 ‘원영지체’를 이룬 뒤로는 다보지도 않던 ‘천애불문비’지만 그 상징성은 컸다.
주역봉 노조가 종사와 제군들의 뜻을 전하자, 노조들의 의견이 둘로 갈렸다.
한쪽은 종사의 뜻과 취지에 공감했지만, 다른 쪽은 ‘천애불문비’의 잔해라도 따로 보관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논란은 이내 가라앉았다.
종사인 태을 존자와 제군들이 정한 규칙을 감히 노조가 거스를 수 없어서다.
왈가왈부(日可日否)하던 노조들도 하나 둘 천애곡을 떠나갔다.
천애곡에서 명상을 하다가 불려온 방사와 노사, 진인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느끼는 충격은 남들과 달랐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천애불문비’가 천천히 부서져 내린 까닭이다.
그건 연적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매끈하게 깎여 나간 절벽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구천현녀, 하늘의 문[天門]을 열라는 음성, 그리고 무너져 내린 ‘천애불문비’까지.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런 그를 향해 목강산 진인이 차갑게 말했다.
“흥!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느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아, 안녕하세요?”
연적하는 무궁전에서 본 그를 떠올리고 반사적으로 인사부터 했다.
그러나 목강산 진인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소격각 사람에게 말을 건 것은 그저 조롱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갓 입문한 방사 같은데, 네 팔자도 더럽게 꼬였구나. 너 소격각이라고 했지?”
“예.”
“‘천애불문비’가 사라졌으니 너는 평생 소격각을 벗어나지 못할 게다.”
“왜요?”
“스스로 원영을 만들 기회가 사라졌으니 하는 말이다. 설마 소격각의 멍청이들에게 그걸 배울 생각은 아니겠지? 그걸 알았다면 그들이 소격각에 남아 있겠느냐?”
“…….”
연적하는 멀뚱멀뚱 상대를 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소요종에서 소격각만큼 ‘천애불문비’를 필요로 하는 곳도 없었다.
소격각에는 후배를 지도해 줄 만한 선배가 없다.
병휴와 자신의 경우에서 보았듯 선배가 이끌어 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아니다.
소격각에서는 청소부터 원영의 공부까지 모든 걸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 만큼 ‘천애불문비’는 필수다.
그게 사라졌으니 팔자가 꼬여도 더럽게 꼬였다는 그의 지적은 옳았다.
위로 올라갈 때 사용하던 사다리가 갑자기 산산조각이 난 셈이니까.
오늘 오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조금 전 ‘천애불문비’에서 깨달음을 얻은 연적하는 태연자약했다.
“목 진인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설마 나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꿈도 꾸지 마라.”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뭐냐.”
“‘천애불문비’에 관한 건데요. 목 진인님도 ‘천애불문비’에서 깨달음을 얻어 진인까지 올라간 거잖아요?”
“그랬지.”
“혹시 ‘천애불문비’에서 막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그랬어요?”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 ‘천애불문비’의 문양이 구름을 닮았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천애불문비’는 구름과 전혀 관계가 없다.”
목강산 진인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천애불문비’가 사라졌으니 자신의 깨달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게 됐다.
오늘 이후로 자신의 후배들은 영원히 자신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깨달음의 원천인 ‘천애불문비’가 사라졌으니까.
“아, 그래요? 그럼 ‘천애불문비’에서 선녀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그러기도 해요?”
“미친놈. 허튼소리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배가 아픈 모양이로구나.”
“그럼, ‘천애불문비’에서 음성이 들리기도 하나요?”
“오호라! 그렇게 빙빙 돌려서 물어 보시겠다? 그런다고 내가 술술 털어 놓을 호구로 보이느냐?”
그러면서도 그는 단호하게 끊지 않고 여지를 남겼다.
말로 상대를 가지고 놀기 위해서다.
“누가 깨달음의 내용을 물어봤어요? 그냥 어떤 방식으로 ‘천애불문비’가 목 진인님에게 가르쳐 줬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예요.”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말을 아느냐? 이제 와 그걸 알아서 뭐에 쓰겠다고? ‘천애불문비’도 다 부서져 사라진 마당에.”
“아, 진짜, 더럽게 빼시네. 목 진인님 말대로 ‘천애불문비’도 없는데 뭘 그렇게 아껴요? 어차피 이젠 다시 볼 수도 없게 됐구만.”
목강산 진인은 ‘더럽게 뺀다’는 말이 귀에 거슬려 눈을 부라렸다.
“방사 놈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오늘은 소요종에 변고가 생긴 날이라 참겠다. 다음에 나를 만나면 곡소리가 나도록 처맞을 줄 알아라.”
방사의 저급한 말투에 심기가 상한 그는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그를 보고 있을 때다.
“목 진인을 아느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돌아보니 무상각의 한마관 진인이 서 있었다.
“몰라요. 전에 무궁전에서 한 번 봤어요.”
“그는……. 흠, 이후로 그를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그에게 찍힌 사람치고 잘되는 경우를 못 봤으니까.”
“아, 예.”
연적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무궁전에 하루 한 차례씩 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천애불문비’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같던데. 무엇이 알고 싶은 거냐?”
“다들 깨달음, 깨달음 하는데, 어떤 식으로 깨달음이 찾아왔는지 궁금해서요.”
“후후, 그래서 구름이니, 선녀니, 음성이니 했던 게냐?”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까지 아는 걸 보니 자신과 목강산 진인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