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06
606회. 너를 낙숫물이라고 생각해라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 매사가 부정적인 사람, 생판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 자기 이익을 위해 오랜 지인의 뒤통수를 치는 사람 등등.
그런 점에서는 구주의 사람들도 강호와 다르지 않았다.
목강산 진인이 속이 배배 꼬인 사람이라면, 한마관 진인은 친절했다.
연적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마관 진인을 보았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한마관 진인이 말했다.
“본래 종문의 사람들은 적전제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경험을 말해 주지 않는다. 약육강식인 구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생존의 지혜지.”
“동문 간에도요?”
“가까운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니라. 당장 너만 해도 목강산 진인과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았느냐. 만에 하나 네가 ‘천애불문비’에서 기연을 만나 목 진인보다 높은 경지로 올라간다고 생각해 보아라. 목 진인이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기연을 얻을까 봐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천애불문비’가 사라졌는데도?”
“기연을 예측할 수 있으면 기연이라 하겠느냐?”
“그렇구나.”
연적하는 목강산 진인이 끝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사라진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여하튼 나의 경우 처음에는 꿈을 꾸었다. 명상 중에 꿈이라니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 건 적전제자에게만 알려 주는 거라면서요?”
“그래서 듣기 싫으냐?”
“아뇨. 가르쳐 주세요.”
연적하가 다급히 매달리자 한마관 진인은 피식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비몽사몽(非夢似夢) 한 가운데 수련에 매진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았다. 어른의 눈으로 어린 시절의 나를 보니, 절로 깨달음이 오더구나. 그때야 비로소 내가 수련한 것들에 숨겨져 있던 오의(奧義)를 알게 되었다고 할까?”
연적하는 눈을 빛내며 한마관 진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이야기였다.
“혹자는 ‘천애불문비’이니 문자(文字)와 관계가 없을 거라고도 하지. 그러나 나는 문자를 본 적도 있다.”
“글자를 보았다고요?”
“그래, 내가 익힌 토납법(吐納法, 호흡법)의 구결이었다.”
“아!”
“하지만 내가 외우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내 경지가 깊어짐에 따라 토납법의 구결에도 변화가 생겼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눈앞에 보여진 새로운 토납법의 구결로 원영(元嬰)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길고 긴 연단(鍊丹)의 과정을 마치고 노사가 됐다. 그 뒤로 벽을 만날 때마다 ‘천애불문비’ 앞에서 명상을 했지. 나에게는 아직 ‘천애불문비’가 필요한데, 저렇게 되다니…….”
돌무더기를 보는 한마관 진인의 눈빛은 허허로웠다.
머리를 긁적이던 연적하가 물었다.
“그러니까 진인의 말씀은 ‘천애불문비’가 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더 나은 걸 가르쳐 준다는 뜻인가요?”
“고작 ‘방사’에서 ‘노사’가 되는 것도 죽을 만큼 노력해야 가능하다. 하물며 삼천(三天)의 신에 이르는 가르침은 어떻겠느냐?”
방사인 연적하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벽초의 경우만 봐도 이십오 년이나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던가.
“신의 영역에 이르는 지혜다. 그걸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을 내려 주려면 경험보다 좋은 것도 없지.”
“머리에 천하의 모든 걸 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요?”
“출발부터 범인들과 다르겠지. 그런 사람이라면 바로 신지(神智)를 깨달을 게다. 종문에서 ‘영기의 질’을 구별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렇구나. 그런데 왜 그런 걸 저에게 가르쳐 주는 거예요?”
“너도 소격각이라고 들었다. 맞느냐?”
“예.”
연적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마관 진인을 보았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은 소격각이라는 걸 알면 다가왔다가도 멀어졌다.
그걸 알면서도 다가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나와 말을 트고 친하게 지냈던 동기가 소격각에 배치되었었다.”
“와! 그분은 어떻게 됐나요?”
“……오래전에 죽었다.”
“아…….”
연적하는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상대가 진인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그 친구는 어찌어찌 노사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수명이 다해 죽고 말았다. 종문에서 방사를 하루살이, 노사를 날파리에 비유하는 것도 그래서다.”
“수명이 짧다는 거죠?”
“허무할 정도로 짧다. 물론 고작 진인에 불과한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휴! 진인이 어때서요? 방사에 비하면 하늘이신데.”
“후후, 그래 봐야 노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여하튼 ‘천애불문비’가 사라졌으니 방사인 너는 내일부터 더 힘들어질 게다.”
“그렇겠죠.”
연적하는 남의 얘기하듯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다른 방사들, 특히 스승이 없는 방사들은 암울할 터였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내가 터득한 토납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다.”
뜻밖의 제안에 연적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설마 모두가 외면한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소리일까?
“그럼 제가 진인의 제자가 되는 건가요?”
“진인의 제자가 되어 봐야 딱히 좋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 ‘천애불문비’가 사라졌으니 원영을 만들기 어려울 게다. 운 좋게 노사가 된다 해도, 스승의 도움 없이 진인에 오르기는 불가능할 테고. 어떠냐? 나에게 배워 보겠느냐?”
연적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사실 딱히 스승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냄새나는 소격각을 떠올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저를 제자로 거둬 주세요. 어떻게, 지금 여기서 절을 올릴까요?”
“허허! 성격이 급하구나. 그 전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연적하라고 해요.”
연적하라는 이름을 들었어도 한마관 진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관음봉에 있는 무상각까지 그가 저지른 일들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 연적하. 정녕 나의 제자가 되고 싶다면 아홉 번 절을 올리거라.”
연적하는 지체없이 그에게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친 연적하가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저도 소격각에서 나가서 살게 되는 거죠? 스승님이 계신 곳은 어디인가요? 천주봉? 범천봉? 용화봉? 아니면…….”
연적하는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부산을 떨었다.
그러자 한마관 진인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런,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진인의 제자가 돼 봐야 딱히 좋을 게 없다고. 너에게는 사조(師祖)가 없다. 나 역시 스승을 모신 몸이 아니라는 게지.”
“그래서요?”
연적하는 한마관 진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게 소격각을 나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라고?
“노조가 돼야 제자들과 함께 거주할 자격이 생긴다. 진인에 불과한 나로서는 너를 소격각에서 데리고 나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예? 그럼 내가 계속 소격각에서 지내야 한다고요?”
“그렇다. 노사가 되기 전까지 너는 소격각에서 생활해야 한다. 실망했느냐?”
연적하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한마관 진인의 제자가 되었건만 소격각을 벗어날 수 없다니!
“너무 낙담하지 마라. 내가 익힌 토납법이라면 너를 금방 노사로 만들어 줄 테니까.”
“노사가 되면 칠각에 속하지 않아도 되나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제행각과 무상각의 의뢰를 맡아서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쪽 일은 주로 ‘야수’나 ‘마수’와 관계되어서 조금 위험하다고 볼 수 있지. 그래 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칠각에 배속 받기를 원한다. 그곳에서 일한 대가로 받은 금은으로 북명전에서 선단을 구입할 수 있으니까.”
“제행각이나 무상각의 의뢰만 처리해도 칠각에서 일하는 만큼 벌어요?”
“칠각만큼 버냐고? 단순히 결과만 두고 말하자면 오히려 제행각이나 무상각의 의뢰가 더 낫다. 위험이 따르는 만큼 보상도 확실하니까.”
“스승님은 무상각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죠?”
“그렇다만 그건 왜 묻느냐?”
한마관 진인이 의아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방사는 제행각이나 무상각의 의뢰를 맡을 수가 없었다. 가장 약한 ‘병급(丙級)’ 의뢰를 담당한 제행각도 노사부터 출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소격각에서 나가게 되면 그쪽 일을 해 보려고요.”
“제행각의 의뢰를 받겠다는 게냐? 흐음, 알겠다. 제행각에 지인이 있으니 좋은 일을 맡게 해 주마.”
“스승님이 계시는 무상각에서 받아도 되잖아요?”
“허허, 무상각의 의뢰는 어려워서 최소한 진인은 돼야 가능하다. 솔직히 진인들에게도 힘든 일이 태반이다. 노조는 돼야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게다.”
“노사는 의뢰를 못 받아요?”
“지금까지 전례가 없을 뿐 딱히 금지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권하지 않겠다. 진인에게도 어려운 일을 노사가 무슨 수로.”
“뭐 나중에 제가 찾아가면 문전박대만 하지 말아 주세요.”
“허허허! 알겠다. 네가 노사가 되어 찾아온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마.”
한마관 진인은 연적하의 패기에 그저 웃기만 했다.
노사가 되기도 어려운 마당에 무상각의 의뢰라니. 실로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려면 먼저 노사가 되어야겠지? 따라오너라.”
말과 함께 한마관 진인이 계곡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적하는 흔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얼떨결에 사승 관계를 맺었지만 그래도 스승의 가르침이니 들어나 볼 요량이다.
한마관 진인은 반 시진(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용호진결’ 삼백 자를 가르쳤다.
하지만 지금의 연적하에게 그건 말 그대로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가뜩이나 평범한 머리를 가졌는데, 설상가상으로 원영을 만들 뜻도 없다.
그렇다 보니 반 시진 동안 연적하가 외운 것은 달랑 스무 자에 불과했다.
그래도 한마관 진인은 연적하를 닦달하지 않았다.
소격각에 들어갈 정도의 재능이니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오히려 한마관 진인은 연적하가 포기할까 봐 그를 다독였다.
“내가 볼 때 너는 대기만성형(大器晩成形)이다. 그러니 ‘나는 안 된다’며 포기하지 마라.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 너를 낙숫물이라고 생각해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그런데 스승님.”
연적하가 한마관 진인을 빤히 보았다.
“왜 그러느냐?”
“제가 만나 본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소격각이라면 멀리 달아나던데, 왜 스승님은 저를 제자로 거두었나요?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백 년 전에 목강산 진인을 윗분으로 모신 적이 있다.”
“헐! 목강산 진인이 이백 년 전에 진인이었다고요? 나이가 이제 오십 대로 보이던데?”
“외모만 보고 평가하지 마라. 목강산 진인은 ‘원영 십 성’의 고수다. 비경에서 검령을 얻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노조가 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사람이지.”
“그래서요?”
“그는 ‘영기의 질’을 신봉하는 사람이라 전부터 소격각 사람을 무시했다. 내 친구도 나를 만나러 왔다가 그에게 찍혀 괴롭힘을 받았지. 너를 보니 그 친구가 떠올라서, 목강산 진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달까.”
“아…….”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스승이 무슨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스승님, 혹시 제 이름 어디에서 들은 적 없어요?”
“왜? 몹쓸 짓이라도 하고 다녔느냐?”
“어이쿠! 전혀요. 그래도 제가 몹쓸 짓을 하고 다닐 얼굴은 아니지 않나요? 너무 순하게 생겨서 똥파리들이 꼬인다면 모를까?”
“그래, 그건 인정하마.”
한마관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하게 생긴 그의 얼굴이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데 한몫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중에라도 누가 괴롭히면 스승님의 제자가 연적하라고 하세요.”
“푸허헛!”
뜬금없는 소리에 한마관 진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도 암기를 못해서 의기소침할까 봐 걱정했는데 자존감이 하늘을 찌른다.
“그래, 항상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거라.”
“예, 그런데 스승님의 경지는 어느 정도나 되나요?”
목강산 진인이 오십 대로 보이는데 스승은 그보다 늙어 보여서 한 질문 이었다.
“나는 이제 ‘원영 사 성’이다. 내 나이가 이백팔십이니 늦은 셈이지.”
“늦은 거예요?”
“수명의 한계에 달했음에도 ‘원영 사 성’이니 늦어도 많이 늦었지. 어쩌면 네가 노사가 되는 걸 보지 못 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
“아니 그동안 뭐 하셨길래 그것밖에 안 돼요?”
한마관 진인이 황당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건 반 시진 동안 고작 스무 자밖에 못 외운 놈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