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31
631회. 여기도 산신령이 있다면 빡치겠는데?
두 달 전.
한산주 위례성.
천지종 종산 원덕산.
안학궁(安鶴宮).
해거름 무렵, 천지종 종사의 거처인 안학궁에 두 여자가 마주 보며 앉았다.
당대 천지종 종사인 추회 존자(追悔 尊者)와 면사를 쓴 빙설화 진인이다.
추회 존자는 묘한 눈으로 빙설화 진인을 응시했다.
반년 전 처음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뒤로 꾸준히 만남을 이어 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면사를 벗지 않았다.
종사인 자신의 앞에서, 그것도 같은 여자끼리,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듯 빙설화가 물었다.
“제가 왜 면사를 벗지 않는지 궁금하신가요?”
“궁금하다면 말해 줄 테냐?”
잠시 침묵하던 빙설화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저는 ‘삼천(三天)의 신’이 되기를 바라요. 그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답니다. 면사는 그런 제 마음의 표현이지요. 세상과 저를 나누는 벽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나도 그런 뜻을 품고 정진한 적이 있다. 지금은 그런 과거를 도리어 후회하고 있지. 그래서 이천여 년 전에 이름도 ‘추회’로 바꾸었다.”
“저는 ‘삼천의 신’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나는 네가 우리 천지종에도 조금쯤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그건 누구를 위해서죠?”
“그야 물론 ‘뒤 물결에 밀려갈 나’ 와 ‘차기 종사인 너’를 위해서지.”
빙설화는 종사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박하지 않았다.
추회 존자는 자신을 내세워 ‘구주의 종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다.
이천 년 전처럼 추회 존자는 오늘의 저 욕심을 후회하게 되리라.
“그래서 말인데, 나는 비경에서 네가 가장 먼저 고산준령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저는 이번이 처음인데 가능할까요?”
“가능하냐고?”
추회 존자가 피식 웃었다.
빙설화는 천지종의 무경서에 통달하고, 성물인 건곤벽(乾坤碧)의 모든 걸 이어받은, 그야말로 천인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초인이었다.
불타는 사막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장애물도 그녀를 막지 못할 터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될 게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죠?”
“예전에는 가장 먼저 사막을 종단(縱斷)한 사람이 모든 종문에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통해 진인들은 바른 방향을 알게 되었지. 더불어 누가 가장 뛰어난지도.”
빙설화 진인은 추회 존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구주의 종문에 알리고 싶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막을 건너 고산준령과 마주하게 되면, 더 이상 영기를 숨기지 말고 나의 봉황음(鳳凰吟)을 펼치거라. 그 소리를 들으면 구주의 종문들도 알게 될 것이다. 천지종에 ‘구주의 종사’가 있다는 것을.”
“다른 종문들이 ‘구주의 종사’가 나오는 것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홉 종문은 본래 하나의 몸통에서 나온 가지들이다. 원하는 원하지 않는 언젠가 하나로 묶일 운명이지. 나는 너의 등장과 성물의 파괴가 그 증표라 믿고 있다. 너는 ‘삼천의 신’이 되고 싶다고 했지?”
“…….”
“궁금하지 않으냐? 왜 종문에서 지금까지 ‘삼천의 신’이 나오지 않았는지?”
“왜죠?”
“종사들의 비전(秘傳)중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신격(神格)은 영석(靈石)으로 얻지 못한다.’”
“영석으로……. 얻을 수 없다고요?”
“그랬다면 신좌(神座)에 오르지 못한 종사는 없었을 게다.”
순간 빙설화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영기 흡수를 너무 당연시 여겨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했다. 종문이 모아 둔 영석과 혼석을 생각하면 종사들은 신좌에 올랐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추회 존자의 말대로 신좌에 오른 종사는 없었다.
“역대 종사들은 그것을 종문이 가진 공법의 한계로 생각했다.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한다. 그런데 종문에는, 신좌에 오르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게 뭔가요?”
“천문(天門)이다. 천문은 상위 차원과 연결된 문으로, 그곳에 신격의 열쇠가 있다. 마천의 마귀들이 호시탐탐 천문을 노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지. 그들은 천문을 통해 상위의 존재로 거듭난다고 믿는다.”
“아…….”
“하지만 애석하게도 종문의 역대 종사들은 천문을 열지 못했다.”
“…….”
“얼마 전 구주의 성물이 모두 파괴됐을 때, 나는 생각했다. ‘창조신께서 인간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을 거두어 가시는 건 아닐까?’라고.”
성물의 파괴로 끝이 아니라는 소리다.
빙설화의 심정을 대변하듯 면사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렇기에 너는 ‘구주의 종사’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천문의 비밀을 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기회’라는 말이 빙설화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너는 천지종의 천문만을 보았다. 만약 네가 구주의 모든 천문을 얻는다면. 건곤벽처럼, 천문의 비밀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빙설화는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추회 존자의 말은 씨앗이 되어 그녀의 가슴에 심겨졌다.
***
그리고 현재.
빙설화의 봉황음은 한창 사막을 달리던 연적하의 귀에도 들렸다.
연적하는 그 무지막지한 음공(音功)에 놀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다.
‘설마 은소선은 아닐 테고, 누구지?’
그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바람처럼 내달렸다.
소리를 따라 움직인 것은 연적하만이 아니다.
비경에 들어온 아홉 종문의 진인들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치달렸다.
***
고산준령.
고산준령이 깊고 넓다지만, 그 속에 뛰어든 이들은 종문의 진인들이다.
천여 명의 진인들이 신행부(身行符)까지 써 가며 산과 계곡을 누비고 다니니, 마주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곳곳에서 생사 혈전이 벌어지면서 고산준령에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졌다.
차차차창-.
“윽!”
검격을 막아 내던 소요종의 진인 천소정이 어깨를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천지종의 청해 진인은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악착같이 따라붙으며 기어코 상대의 가슴에 검 끝을 밀어 넣었다.
“끄윽!”
천소정 진인의 신형이 천천히 무너졌다.
그의 죽음으로 남아 있던 소요종 진인은 더욱 위기에 몰렸다.
소요종의 좌경인 진인이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셋 중에 둘이 죽고 혼자만 남았다.
그에 비해 적은 처음 그대로 셋이니 자신의 목숨도 끝났다고 봐야 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즉시 품에서 ‘천리전송(千里傳送笛)’을 꺼내 힘껏 분 것이다.
삐이이이-.
세 명의 천지종 진인들은 멈칫했지만 그 뒤에도 특별히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천지종의 청해 진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희망을 품지 마시게. 그래 봐야 시체만 늘어날 뿐이니. 모르겠는가? 우리 세 사람은 모두가 ‘원영 십 성’이라네.”
순간 소요종의 생존자인 좌경인 진인이 버럭 소리쳤다.
“흰소리하지 마라! 지금까지 ‘원영 십 성’이 너희들처럼 몰려다니는 일은 없었다!”
이번에는 퇴로를 막고 있던 천지종의 증관일 진인이 끼어들었다.
“과거에는 그랬겠지. 하지만 우리는 이번 비경에서 소요종을 모두 쳐죽이기로 했네. 오백 년 전의 전쟁을 이번에 마무리 짓기로 했거든.”
오백 년 전의 전쟁이라는 말에 좌경인 진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천지종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저들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때 일 남 일 녀가 허공에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왕우 진인과 은소선 진인이었다.
두 진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좌경인 진인이 소리쳤다.
“두 분 모두 자리를 피하시오! 저들은 모두 ‘원영 십 성’의 고수들이오!”
하지만 좌경인 진인보다 천지종 고수들이 한 걸음 더 빨랐다.
세 고수는 어느새 소요종 진인들을 품자(品字) 형태로 포위하고 있었다.
뒤이어 다시 한번 난전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고작 반각(약 7분) 만에 우열이 드러났다.
“크윽!”
왕우 진인이 증관일 진인의 무자비한 검격에 밀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그의 전신은 피에 물들어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왕우 진인의 머리 위로 환영처럼 검이 내려앉았다.
‘눈 뜨고도 당한다’는 천지종의 상급 검공인 분검공(分劍功)이었다.
당장 눈앞의 검에 정신이 팔려 있던 왕우 진인은 한순간 절명하고 말았다.
미끼를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청해 진인이 손려 진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손려 진인은 단숨에 좌경인 진인의 목을 찔러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검 한 자루가 날아와 손려 진인의 검신을 때렸다.
채앵-.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손려 진인의 검이 뒤로 튕겨 났다.
깜짝 놀란 손려 진인은 즉시 검을 수습하고 한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울창한 숲에서 두 여자가 걸어 나왔다.
검서린 진인과 그녀의 사저인 진소유 진인이었다.
검서린 진인의 검은 보란 듯 손려 진인의 머리 위에 둥둥 떠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영기에 손려 진인은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구사일행 한 좌경인 진인은 급히 검서린 진인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고했다.
검서린 진인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 모두가 사실이라면 당신들은 곱게 죽지 못할 거예요.”
그러자 천지종의 청해 진인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물었다.
“당신의 특별한 이기어검은 잘 보았소. 소요종에 당신과 같은 진인이 남아 있었다니 놀랍구려.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려 줄 수 있겠소?”
“내 이름은 검서린이에요. 당신들의 조상을 만나면 검서린이 보냈다고 고하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려 진인의 정수리로 검이 뚝 떨어져 내렸다.
단순한 이기어검이 아닌, 요검탄주(曜劍彈誅)라는 상급 검공이 가미된 수법이었다.
손려 진인은 다급하게 이기어검을 쳐 냈다.
쩡-!
마치 꽁꽁 얼어 있던 호수의 얼음이 깨지는 듯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손려 진인의 검은 요검탄주를 당해 내지 못하고 뚝 부러졌다.
그와 동시에 빛살처럼 떨어져 내린 이기어검이 손려 진인의 몸을 수직으로 갈랐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손려 진인의 몸이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양단됐다.
망연히 쳐다보던 청해 진인과 증관일 진인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검서린 진인에게 날아갔다.
기다렸다는 듯 진소유 진인이 증관일 진인의 앞을 막았다.
그사이 검서린 진인은 청해 진인을 파죽지세로 몰아쳐 갔다.
차차차창-.
상대의 막강한 검격에 밀린 청해 진인이 연신 뒷걸음질 칠 때, 어디선가 부드러운 경력이 흘러 들어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헉!’
깜짝 놀란 검서린 진인은 황망히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분이신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붉은 하늘에서 면사를 한 여자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천지종의 빙설화였다.
위기에서 벗어난 청해 진인이 그녀의 앞으로 달려갔다.
“빙설화 진인, 이들은 소요종의 기둥들이니 살려 두면 대업(大業)에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장내를 가볍게 둘러보던 빙설화 진인이 손을 흔들었다.
고오오오-.
천붕낙월(天崩落月)의 가공할 압력이 소요종 진인들을 찍어 눌렀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검서린 진인조차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뒤이어 거대한 만월(滿月)이 소요종 진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검서린 진인과 은소선 진인, 좌경인 진인은 항거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하지만 하늘이 아직 소요종의 진인들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콰콰콰콰-.
돌연 계곡 입구에서 진검강의 용권풍(龍卷風)이 몰아쳐 와 만월을 비스듬히 밀어냈다.
쿠쿠쿠쿵-!
만월과 용권풍에 직격당한 계곡 한 귀퉁이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뒤이어 낭랑한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와아! 여기도 산신령이 있다면 빡치겠는데?”
그는 ‘천리전송적’이 울리자 만사 제쳐 두고 달려온 연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