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50
650회.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수약주.
수미성.
소요종 종산 불우산.
소요궁.
연적하는 천태종 종사인 혜문 존자가 만들어 준 두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태을 존자가 두루마리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이건 뭔가?”
“소요종의 제안은 받아들이겠지만, 두 종문의 생사존망이 걸린 문제를 어찌 말로 끝낼 수 있겠냐며 양해각서를 만들자고 하시더라고요.”
“흠! 양해각서라.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로군. 연 제군의 보증만으로 부족하다는 건가.”
태을 존자는 마치 연적하 제군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연적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듣고만 있었다.
“지금과 같이 변화무쌍한 전란 통에 양해각서라니. 되지도 않을 소리를 잘도 하는군.”
태을 존자는 아예 두루마리를 펼쳐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그의 태도에 연적하가 슬쩍 물었다.
“변화무쌍해서 한시적으로 동맹을 맺겠다고 하신 게 아니었나요?”
혜문 존자가 만든 양해 각서는 그 변화무쌍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쯧! 차후로 아홉 종문은 난마(亂麻)와 같이 얽히게 될 걸세. 소요종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때그때 변화를 잘 감지해야 하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각서 따위로 스스로의 손발을 묶어서야 쓰겠나.”
알 듯 말 듯 한 소리에 연적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양해각서를 만들지 않겠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런 제안을 하는 걸 보니 천태종이 어지간히 궁지에 몰린 모양이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떻던가?”
“도리포(천뢰종)와 천리포(천태종) 다 조용했는데, 천리포가 좀 더 가라앉은 분위기였어요.”
“그렇겠지. 나는 지금 혜문 존자의 심정을 알 수 있네. 오백 년 전에 우리도 그랬거든.”
“혹시 그래서 한시적으로 천태종을 돕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
태을 존자는 답하지 않고 무심한 눈으로 양피지 두루마리를 응시했다.
어지간하면 궁금해서 열어 볼 만도 한데 그는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없던가?”
“다른 말요?”
“내가 자네를 보냈던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네. 혜문 존자가 그 뜻을 짐작했다면, 내가 거절하리라는 것도 알았을 것 같아서. 내가 양해각서를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
“어떻게 할 다른 수가 천태종에 있나요? 천태종을 둘러싼 다섯 개 종문이 죄다 전쟁 중인데. 믿고 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혜문 존자가 그렇게 말하던가?”
“예.”
“알았네. 오늘 중으로 출정(出征)할 테니 자네도 돌아가 준비하게.”
“완산주로 가는 건가요?”
“그야 이를 말인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산으로 가야지.”
“아, 예.”
연적하는 꾸벅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떠났다.
***
삼관정.
칠 일 만에 다시 삼관정을 보니 그래도 머물던 거처라고 반가웠다.
비록 시설은 은수객잔보다 못했지만 말이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느낀 병휴 방사가 튀어나왔다.
“오셨습니까?”
“어, 그런데 병휴야.”
“예.”
“태을 존자님이 출정 준비를 하라는데, 뭘 준비하라는 걸까?”
“출정요? 드디어 천지종과 붙는 겁니까?”
“그건 모르고. 뭘 준비해야 하는지 넌 좀 아냐?”
“제군님이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제군님의 동기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아, 그랬지. 늦기 전에 좀 알아 와 봐라. 내가 뭘 챙겨 가야 하는지.”
“예, 무상각의 진인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병휴 방사는 부리나케 산 아래로 달려갔다.
연적하는 툇마루에 철퍼덕 걸터앉았다.
‘전쟁이라…….’
종문 간의 전쟁은 강호에서 유명교를 상대로 한 싸움과는 격이 다르다.
전설에나 등장하는 어검비행은 기본이고, 구름을 타고 다니는 고수들도 수두룩하다.
비경에서 겪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떠올랐다. 낮은 등급의 진인들만 모여서 싸우는데도 아비규환의 지옥도였다.
노조, 제군, 종사들의 칼부림은 또 얼마나 살벌할까.
‘많은 종문 고수들이 죽어 나가겠지…….’
내키지 않지만 아홉 종문의 천문을 손에 넣으려면 외면할 수만도 없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상황인지 모르겠다.
그런저런 생각을 이어 가는데 그간의 여행으로 쌓인 피로가 천천히 밀려왔다.
만사가 귀찮아진 연적하는 스르륵 뒤로 몸을 눕혔다.
땡. 땡. 땡. 땡. 땡-!
뒷마루에서 까무룩 잠들었던 연적하는 묵직한 종소리에 눈을 떴다.
대낮에 앉았는데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병휴야.”
순간 마루 끝에서 졸고 있던 병휴 방사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예?”
“너는 왜 마루에서 자냐?”
“잔 게 아니라 제군님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자던데?”
“안 잤다니까요.”
“그래서, 뭘 준비하래?”
“제군님이 준비할 건 없을 거라는데요? 노사들이 다 챙겨 간다고.”
“노사가? 노사도 전쟁에 데리고 간대? 그 사람들이 뭘 할 줄 안다고?”
노사라고 해 봐야 짐밖에 안 될 텐데, 왜 그들을 데리고 가는지 모르겠다.
“전부는 아니고요. 밥 짓고, 잠자리 만들고, 번을 세우기 위해서 오십 명쯤 뽑아 간답니다. 잡부로 쓴다고 하네요. 그걸 진인들에게 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태을 존자님은 나한테 준비하라고 한 거지?”
“마음의 준비 아닐까요?”
“내가 그렇게 어리바리해 보이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까 종사님이 신경 쓸 만도 하죠.”
“뭐? 신경을 써? 인마, 그랬으면 나를 이런 데 처박아 두겠냐?”
“그건 또 그렇네요.”
병휴 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적하 제군을 삼관정에 처박아 둔 걸 보면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툇마루에서 일어난 연적하가 습관적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며 말했다.
“여하튼 내가 따로 준비할 건 없다. 이거지?”
“예, 다른 제군님들도 빈손으로 나오실 겁니다.”
“알았다. 너도 조금 전에 종소리 들었지? 다 모이라는 신호니 함께 가자.”
연적하가 손짓하자 병휴 방사는 빠르게 연적하의 곁으로 달려왔다.
이윽고 연적하와 병휴 방사를 태운 구름이 동편 천주봉으로 날아갔다.
***
천주봉.
소요궁.
연적하와 병휴 방사를 태운 구름이 소요궁 앞마당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마당에 도열해 있던 소요종 고수들이 부러운 눈으로 연적하와 병휴 방사를 힐끔거렸다.
병휴 방사는 종종걸음으로 방사들 무리 속에 섞여 들었다.
연적하는 정면에 세워진 임시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둥그런 탁자 주위로 세 제군과 태을 존자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게. 조금 늦었구먼.”
태을 존자가 가볍게 타박을 했다.
연적하는 눈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는 세 제군들을 보니 그냥 해 본 소리였던 모양이다.
연적하의 시선이 탁자 위의 지도로 향했다.
백리하, 천리포, 도리포가 적힌 지명을 보니 완산주의 지도였다.
그때 태을 존자의 손가락이 천리포를 찍었다.
“사흘 후, 천뢰종이 백리하를 도하(渡河)할 것이오. 우리는 천뢰종과 반 시진(1시간) 거리를 유지해야 하오. 제군들은 소요종 고수들이 성급하게 움직여 천뢰종과 조우하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오.”
“예.”
제군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그것으로 할 말을 다한 듯 태을 존자는 지도를 둘둘 말아 한쪽으로 치웠다.
별다른 정보가 없던 연적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리포가 전장이 되는 건가요?”
“그렇게 되겠지. 막 도강한 적을 상대하는 게 천태종 입장에서도 유리할 테니까.”
“천뢰종과 반 시진 거리를 유지하라고 하셨는데, 언제까지 반 시진 거리를 유지하는 거죠? 백리하를 건너기 전까지인가요? 아니면 건너고 나서도 그렇다는 건가요?”
연적하가 생각하기에 그건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왜 세 명이나 되는 제군들은 아무 말도 없는지 모르겠다.
태을 존자가 피식 웃었다.
“연 제군은 종문 간의 전쟁이 처음이지?”
“예.”
“가까이는 오백 년 전이지만, 천 년 전까지만 해도 소요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천지종과 싸웠네. 나는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전쟁에 참여했지. 여기 세 제군들도 백 회 이상 참전했을 걸세. 그렇지 않은가?”
태을 존자가 묻자 세 명의 제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백 회 이상 참전했습니다.”
“최소한 백 회 이상이지요.”
“저는 세다가 나중에 포기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에 기분이 좋은지 태을 존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천리포의 전투는 시작에 불과하네. 천뢰종은 천태종 종산까지 천천히 밀어붙일 걸세. 건곤일척의 승부는 천태종 종산에서 이루어질 테지.”
“천태종 종산까지 천 리 길인데요. 그때까지 반 시진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건가요?”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한시적 동맹을 맺자 해 놓고 숨어서 구경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앞서가지 말게. 병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기와 때를 아는 걸세. 우리는 천리포에서 참전할 수도 있고, 천태종 종산에서 참전할 수도 있네.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종사인 나고. 더 궁금한 게 있는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소리다.
아무리 둔한 연적하라도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은근 짜증이 난 연적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군과 존자라는 종문의 엄한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보이기 어려운 태도다.
당황한 세 명의 제군들은 태을 존자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태을 존자는 그런 연적하 제군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아, 연 제군은 아직 조직 체계를 모르겠구먼. 복잡하지 않으니 한 번만 들어도 알 걸세. 관음봉은 북명전의 진곤 제군, 천주봉은 무궁전의 초요산 제군, 용화봉은 초월전의 한산월 제군을 따르게 되어 있네. 범천봉과 삼신봉의 고수들은 종산을 지키기 위해 남겨 두었고.”
“아, 예.”
“더 할 말이 없다면 그만 나가도록 하지. 이 시간 이후로 세 제군들께서는 휘하의 노조와 진인들을 인솔해 주시오. 참, 그러고 보니 연 제군의 소속을 정하지 않았군. 연 제군은 세 제군 중에 한 사람과 함께 움직이는 게 낫겠지? 누구와 함께 다니겠는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연적하는 고민하지 않았다.
스승인 한마관 진인이 진곤 제군의 아래에 있으니 그를 따라감이 마땅했다.
“진곤 제군님요.”
“그러게. 연 제군이 동행한다니 진곤 제군께서는 든든하시겠소.”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연 제군,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오.”
“에이, 별말씀을요. 딱 봐도 그냥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라는 소린데 뭐.”
빈정거리는 듯한 말에 진곤 제군은 뜨악한 얼굴로 연적하 제군과 태을 존자를 번갈아 보았다.
태을 존자는 적응이 됐는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먼저 나가 버렸다.
초요산 제군과 한산월 제군이 서둘러 태을 존자의 뒤를 따라붙었다.
연적하 제군과 둘만 남겨지자 진곤 제군이 넌지시 말했다.
“연 제군의 승급 속도가 너무 빨라 자리를 준비하지 못한 것 같소. 태을 존자님도 생각이 많으실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권한은 내어주지 않고 뒷구멍으로 부려 먹기만 하니 그러죠.”
“허허, 우리 관음봉에 속한 고수들에게는 연 제군의 명에 따르라고 하리다.”
위로 삼아 한 이 약속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진곤 제군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