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49
649회. 선의와 믿음
연적하가 생각에 잠기자 심통이 슬쩍 물었다.
“그런데 천뢰종에서 소요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왜 물어보신 겁니까?”
“천뢰종에서 소요종에 동맹을 제안했다고 하더라고. 그게 사실인지 궁금해서.”
“동맹을요?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천뢰종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천뢰종에 있으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하네?”
“제가 겪어 보니 이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유명교주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삼천의 신이 되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잡아먹을 사람들입니다.”
심통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연적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사돈 남 말하고 있네? 그러는 심 노인은 뭐가 달라? 불로장생에 욕심내서 내 뒤통수까지 친 사람이. 강호였으면 내 손에 죽었어. 이역만리에서 살아 보겠다고 버둥거리는 게 불쌍해 살려 준 줄이나 알아.”
“사실 제가 제대로 뒤통수를 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늉만 하다가 두드려 맞은 거지요.”
“그 시늉도 나한테는 컸어.”
“…….”
연적하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심통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잠시 잠깐이라도 자신이 그를 등졌던 것은 사실인 까닭이다.
그렇게 농담처럼 두 사람은 비경에서의 유감을 조금씩 털어 냈다.
“심 노인.”
“예.”
심통의 예전과 같은 모습에 연적하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하마터면 자신의 계획을 가르쳐 주고, 함께 강호로 돌아가자고 권유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다.
아무리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심통과 자신의 목표는 정반대였다.
“그만 가 봐.”
연적하가 말할 듯하다가 그만두자 심통은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비록 제 몸은 천뢰종에 있지만, 마음만은 공자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아무 때라도 연락 주십시오.”
심통의 진심 어린 말에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심 노인이야말로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찾아와.”
심통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후 돌아섰다.
연적하는 심통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강기슭에서 솟구친 구름 한 덩어리가 빠르게 백년하를 건너갔다.
***
태공성.
천리포.
무량하가 구주의 동서를 가른다면, 백년하는 남북을 관통하는 거대한 강이다.
강동성의 도리포에서 백년하를 건너면 태공성 천리포가 나온다.
천리포에서 천태종 종산까지의 거리가 천 리라 생긴 이름이다.
천뢰종과 천태종의 현실을 반영하듯 천리포의 분위기는 도리포보다 더 무거웠다.
운종술로 백년하를 건넌 연적하는 강기슭에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그가 막 지면에 내려섰을 때 수십 명의 천태종 고수들이 나타났다.
백년하를 감시하고 있던 천태종의 고수들이었다.
벌건 대낮에 누가 운종술로 강을 건너오니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눈매가 부드러운 노인 하나가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무쌍각의 우상 진인이라 하오. 운종술로 백년하를 건너온 그대는 누구요?”
우상 진인은 상대가 어려 보였지만 하오체를 사용했다.
그가 보여 준 운종술은 노조나 돼야 펼칠 수 있는 절정의 술법인 까닭이다.
“저는 소요종의 연적하 제군입니다. 소요종 존자님의 지시로 천태종 존자님을 뵈러 왔습니다.”
연적하 역시 전례 없이 정중하게 응대했다.
소요종과 천태종의 동맹을 위해 스스로 언행에 조심한 것이다.
“실례하오만 내가 알고 있는 소요종 제군의 이름 중에 연적하라는 이름은 없소. 귀하가 소요종의 제군이라는 증거가 있소?”
그러자 무쌍각의 진인 중에 하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우상 진인님, 연적하 님께서는 비경에서 천태종 진인들을 많이 도와 주셨습니다. 천지종의 빙설화를 일 검에 물리치기도 하셨고요. 이번에 비경에서 연적하 님이 검령을 얻었다면, 분명 제군이 되셨을 겁니다.”
금홍 진인의 말에 우상 진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어째 이름이 귀에 익다 싶었더니…….’
금홍 진인은 이번 차 비경에 참가해 검령을 얻었다. 그의 증언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비경에 들었다면 진인이었을 텐데, 벌써 운종술이라니 놀랍구나.’
정말 제군이 된 것일까?
믿어지지 않는 성취지만 천태종의 은인을 마냥 의심할 수만도 없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몰라뵈어 송구합니다. 때가 때인지라 종문 간의 교류가 원활치 않아서요. 혜문 존자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연적하는 무쌍각 고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천리포로 들어갔다.
***
은수객잔(所水客棧)의 별채.
신선도(神仙圖)를 찢고 나온 것처럼 생긴 노인과 청년이 마주 앉았다.
천태종 종사인 혜문 존자와 연적하다.
“허허, 종문 역사에 연 제군과 같이 빠른 성취를 보인 이는 아직 없었소. 소문으로만 듣다가 실제로 뵈니, 소문이 너무 축소된 것 같소.”
혜문 존자는 연적하를 띄워 주었다.
천태종의 진인들이 비경에서 연적하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별말씀을요.”
“연 제군 때문에 천지종의 추회 존자가 마음고생이 심하겠소. 왜 이렇게 천지종이 잠잠한가 했더니 연 제군 때문이었구먼.”
혜문 존자는 초면임에도 연적하가 소요종의 제군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연적하가 소요종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진인이 많았고, 그의 영기가 이미 종사급인지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덕담 끝에 혜문 존자가 물었다.
“태을 존자가 보냈다는 말을 들었는데, 무슨 일이오?”
“태을 존자께서는 소요종과 천태종이 한시적으로 동맹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동맹을요? 실로 간단치 않은 제안이구려.”
천지종과 척을 지고 싶지 않은 혜문 존자는 고개를 저었다.
천뢰종에 이어 천지종까지 적으로 돌리면 천태종은 몰락할 수도 있어서다.
“천지종 때문에 망설이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천리포에서 천뢰종을 제압할 때까지만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 말씀은 천리포에서 천뢰종과 전쟁을 할 때 소요종이 한 손 거들어 주겠다는 뜻이오?”
“예.”
“그리고 바로 소요종은 수약주로 물러나시겠다?”
“그보다는, 천뢰종이 다스리던 영천주를 두고 천태종과 담판을 짓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먼저 천뢰종을 없앤 후에 천태종과 승부를 보시겠다?”
“혜문 존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어차피 종문 간에 먹고 먹히는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됐잖아요. 그러니 일단 함께 천뢰종을 제압한 후에, 협상이든 전쟁이든 해서 영천주의 주인을 정하자는 거죠.”
“흐음! 태을 존자를 야심 없는 사람으로 보았는데 내가 잘못 보았군. 우리가 패하면 영천주뿐 아니라 완산주까지 내놓으라 하겠는걸.”
“구주의 종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통합의 길로 가게 될 거예요.”
혜문 존자 역시 부인하지 않았다.
천뢰종이 쳐들어온 것도 결국은 세를 불리기 위해서였으니까.
침묵하던 혜문 존자가 연적하를 지그시 응시했다.
“연 제군은 나이에 비해 시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난 것 같소. 비경의 일이 알려진 뒤에 우리 천태종의 제군들도 그런 말을 하더이다.”
연적하는 묵묵히 혜문 존자의 말을 들었다.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
이젠 천태종의 선택만 남았다.
소요종과 손잡고 천뢰종을 제압하든지, 단독으로 천뢰종을 상대하든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쉽지 않은 길이 될 게다.
“지금 당장 가부를 정하기는 어렵겠소. 오늘 하루 은수객잔에 머물러 주시오. 제군들의 의견을 들어 본 후에 내일 결과를 알려 드리리다.”
“예.”
연적하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종문의 흥망성쇠가 걸린 일이니 천태종에도 의견을 수렴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천태종의 고수들은 연적하에게 은수객잔의 방을 하나 내주었다.
제군의 지위에 맞게 최고급 숙소였다.
천태종 고수들이 이중으로 은수객잔을 둘러쌌다.
하지만 어차피 외부 활동을 할 생각이 없던 연적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석양이 뉘엿뉘엿 질 무렵.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오후 내내 침상과 탁자를 오락가락하던 연적하는 방을 나섰다.
객잔 식당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진인들마다 꾸벅 묵례를 했다.
그것은 소요종에서도 받아 보지 못한 관심이었다.
감정은 상대적이다.
천태종 진인들의 호의 어린 눈빛에 연적하도 공손하게 응대했다.
빈자리에 앉자 시키지 않았음에도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연적하는 구주에 와서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정이지.’
종문 고수들은 약육강식의 괴물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천태종의 진인들은 혜문 존자처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눈알을 부라리지 않았다.
한창 식사 중인 연적하 앞에 누군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얼마 전 서가반점에서 만났던 소화연 노조였다.
연적하가 어색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자 여자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연 제군님, 다시 뵙네요.”
“예.”
세상 참 좁다.
얼마 전에 서가반점에서 만났는데 은수객잔에서 또 보게 되다니.
“연 제군님이 혜문 존자님의 손님으로 계신다는 말을 듣고 와 봤어요. 별일 없으신 거죠?”
그녀는 슬쩍 연적하 제군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라도 그가 연금(軟禁)된 상태는 아닌지 걱정이 돼서다.
“예, 대접이 좋아서 눌러앉고 싶을 정도네요.”
연적하의 농담에 소화연 노조는 방긋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적하 제군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훔쳐보는 천태종 고수들이 너무 많아서다.
머뭇거리던 소화연 노조는 결국 마음과 달리 서둘러 말을 맺고 말았다.
“에코, 식사 중이신데 제가 반가운 마음에 방해를 했네요. 맛있게 드세요.”
그녀가 달아나듯 자리를 피하자 연적하는 머쓱한 얼굴로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
다음 날 오전.
천태종 종사 혜문 존자의 부름을 받은 연적하는 다시 별채로 향했다.
“앉으시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제군들의 의견이 분분해서.”
“괜찮습니다. 태을 존자님에게 뭐라고 전해 드리면 될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천태종은 소요종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승전 후 천뢰종과 영천주의 처리 문제는 양 종문 간의 비무로 정했으면 하오.”
“비무요?”
“그렇소. 정확히는 양측 종문 제군들 간의 비무외다. 그 비무의 최후의 승자에게 천뢰종과 영천주의 처분을 일임하는 것으로 하십시다.”
말과 함께 혜문 존자가 양피지 두루마리 두 개를 내밀었다.
“그런 천태종의 뜻을 담은 양해각서(家解覺書)요. 나는 수결을 마쳤소. 허니 연 제군께서는 태을 존자의 수결을 받아 나에게 주시오.”
“태을 존자님은 분실의 위험 때문에 편지도 쓰지 않으시는 분인데, 각서에 수결을 하실까요?”
“두 종문의 생사존망이 걸린 문제를 어찌 말로 끝낼 수 있겠소? 연 제군의 능력이라면 각서를 지키고도 남음이 있다고 믿소이다.”
연적하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태을 존자보다 혜문 존자가 더 자신을 믿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중차대한 일에 양해각서 하나 없는 건 말이 안 되는 것도 같다.
머뭇거리던 연적하는 결국 양피지 두루마리 두 개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혜문 존자님의 뜻을 태을 존자님께 잘 전해 드릴게요. 태을 존자님도 제가 직접 전해 주겠다고 하면 양해각서에 수결하실 거예요. 그런데 태을 존자님이 양해각서를 만들지 말자고 하면 어떻게 하죠?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건가요?”
“그러기야 하겠소? 아쉬운 건 우리 천태종이니 소요종의 선의를 믿고 갈 수밖에.”
‘선의를 믿고 갈 수밖에 없다’는 말에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어, 그런 이야기를 저에게 막 하셔도 돼요?”
“어차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하는 말이외다. 비경에서처럼 연 제군께서 천태종에 덕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랄 뿐이오.”
천태종 종사인 혜문 존자의 겸손한 모습에 연적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그는 혜문 존자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