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78
678회. 제군보다는 군주가 낫지 않습니까?
혈주종 종산 퉁룽챈녹.
디아녹궁(지옥궁).
신시 초(오후3시).
연적하 대종사와 천지종 노조, 그리고 생존한 혈주종 노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 함께하는 회의였지만 혈주종 노조 열셋은 눈을 내리깔고 듣기만 했다.
조용한 가운데 천지종 토벌대 중 최고수인 독요 팔 성의 검지산 노조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혈주종 노조 열셋, 진인 일백칠, 노사 이백 명이 생존했습니다. 삼백여 명의 방사들은 싸움에서 열외되어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에 반해 천지종은 다섯 명의 진인이 경상을 입었습니다. 이상입니다.”
결과 보고를 마친 검지산 노조는 혈주종 노조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방사를 제외하면 삼백이십 명.
웅천주를 지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설상가상으로, 제군과 존자조차 없으니 아홉 종문의 하나로 살아남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천지종도 비슷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은 대종사와 함께 생활하는 데다가, 최근에는 무공 지도까지 받고 있으니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혈주종은 상황이 다르다.
대종사는 저 멀리 천지종에 계시고, 주위에 배움을 청할 상대도 없다.
이후로는 서각(書閣)의 무경서를 읽고 홀로 깨우쳐야 한다.
“수고했어요.”
연적하가 됐다는 듯 손을 흔들자 검지산 노조는 자리에 앉았다.
뭔가를 생각하던 연적하가 혈주종 노조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웅천주를 둘러싼 산맥 너머에 마천이 있다고 들었어요. 특이한 사항은 없었나요?”
그러자 독요 구 성인 칸쑤우가 혈주종 노조들을 대표해서 답했다.
“대종사님께서 마신의 침략을 경고하시어, 호다이 존자가 산맥 접경지대의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본래 북쪽의 금산산맥과 동쪽의 천관산맥은 깊고 험해 마물도 지나기 어려운 곳이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산맥 접경지대에서 발견된 마물은 없었습니다.”
“마물이 없었다고요? 하나도?”
“예.”
“평소에도 금산산맥과 천관산맥으로 넘어오는 마물이 없었어요?”
“그건 아닙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길 잃은 마물이 어쩌다 한두 마리씩 넘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접경지대 주민들 말에 의하면 오히려 평소보다 없는 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참…….”
연적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슨 기미가 좀 보여야 할 말이 있는데, 하나도 없다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적하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자 심통 진인이 한마디 했다.
“대종사님, 평소와 다르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태풍 전의 고요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그 말을 하려고 했어.”
비로소 연적하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디아녹궁에 앉아 있는 누구도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심통조차도 그랬다.
그가 ‘태풍 전의 고요’ 운운한 것은 단지 연적하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였다.
혈주종의 문제가 일단락 지어지자 검지산 노조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종사님, 혈주종의 병탄이 끝났는데 천지종으로는 언제쯤 돌아가실 계획이십니까?”
“왜요? 원덕산에 꿀단지라도 묻어 놨어요?”
“어이쿠! 아닙니다. 그보다는 혹시 광염종에도 들르시려는지 궁금해서요.”
“광염종, 우리 목수평 노조의 팔을 자른 곳이죠?”
“그렇습니다.”
“거긴 법요종과 달리 뒷배도 없다면서요?”
“예, 깨끗합니다. 사실 우샤스 킨샤사 군주님이 법요종과 긴밀하다는 게 이상한 일입니다. 신좌에 오른 존재들은 인간사에 관여하기를 꺼려 하거든요.”
“법요종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그보다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정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연적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검지산 노조를 보았다.
“이야! 우리 심 진인만큼이나 말을 잘 꼬시네. ‘그럼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왜 딱 부러지게 말을 못 해요?”
“그, 그건 제가 법요종의 페라르바 존자에 대해 잘 몰라서…… 송구합니다.”
검지산 노조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연적하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검 노조의 말은 법요종에서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예.”
“그럼 가만두면 안 되겠네?”
“…….”
검지산 노조는 답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페라르바 존자의 말이 사실이면 토벌대가 몰살당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연적하가 혈주종 노조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러분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죠? 별거 아니에요. 법요종에 우리와 함께 마신의 침공에 대비하자고 했더니, 자기들은 우샤스 킨샤사 군주가 있으니까 싫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정말 법요종 뒤에 우샤스 킨샤사 군주가 있을까? 하고. 혹시 법요종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있어요?”
혈주종 노조들과 눈빛을 교환하던 칸쑤우 노조가 대표로 답했다.
“대종사님, 법요종과 저희는 거리가 멀어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광염종이라면 혹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법요종은 없습니다.”
“그렇구나. 법요종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요. 나는 바로 광염종의 백은 존자를 만날까 하는데, 혈주종에서 함께 갈 사람 있어요?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해 봐요.”
“…….”
하지만 혈주종의 고수들은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아직 연적하와 아무런 거래가 없었기에 일단 몸을 사리고 보는 것이다.
“없죠? 그럼 천지종으로만 갈게요. 그리고 당분간 혈주종의 운영은 그쪽에게 맡길게요. 이름이 뭐라고 했죠?”
연적하가 턱으로 칸쑤우 노조를 가리켰다.
칸쑤우 노조가 황송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답했다.
“대종사님, 제 이름은 칸쑤우입니다.”
“그래요, 칸쑤우 노조. 당분간은 그쪽이 혈주종을 맡아 줘요. 금산산맥과 천관산맥 접경 지역을 매일 확인해야 할 거예요. 마물의 숫자가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면 천지종으로 사람을 보내요.”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칸쑤우 노조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노조에 불과한 자신이 혈주종의 지배자가 되었으니 당연하다.
이야기가 얼추 끝나자 연적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피로 씻은 혈주종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
황천주.
철한성.
광염종 종산 금악산.
황천궁.
백은 존자와 일곱 명의 제군들이 천지종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모였다.
이미 혈주종과 천지종의 전투 결과를 전해 들은 터라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백은 존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어! 연적하가 혈주종을 몰살시켰다고? 사람의 힘으로 그게 가능한가?”
화린 제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혈주종 고수들은 물론 호다이 존자와 제군들도 천산검영에 당했다고 합니다. 소요종의 천산검영이 그토록 대단한 검공인줄은 몰랐습니다.”
“천산검영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고작 그 수법에 호다이 존자가 당했을 것 같으냐?”
“허면 다른 뭔가가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걸 모르니 답답한 게지.”
백은 존자는 아득한 옛날 소요종의 천산검영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기억 속의 천산검영은 진검강으로 만든 검형보다 강했다.
하지만 검령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그런데 호다이 존자와 제군들의 검령까지 천산검영에 깨졌다니 기가 막혔다.
게다가 검형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니?
천산검영에 그 정도의 위력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다.
회의 내내 묵묵히 앉아 있던 천응 제군이 입을 열었다.
“천지종이 서쪽으로 갔다고 하니 다음 목표는 분명히 우리 광염종일 겁니다. 오십 명도 안 되는 인원이라지만 그 인원으로 혈주종을 점령했습니다. 우리 광염종과 혈주종의 전력은 비슷합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나 우리 광염종으로는 천지종을 막아 내지 못할 겁니다.”
백은 존자가 불쾌한 얼굴로 천응 제군을 응시했다.
“그러니 연적하에게 무릎을 꿇자?”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이 기회에 법요종과 손을 잡으면 어떨까 싶어서 드려 본 말입니다.”
“법요종?”
“예, 법요종의 페라르바 존자는 연적하에게 굴복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제야 백은 존자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우리도 우샤스 킨샤사 군주에게 의탁하자는 것이냐?”
“누군가의 아래에 들어가야 한다면 제군보다는 군주가 낫지 않습니까?”
“흐음! 제군보다는 군주라.”
백은 존자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군보다 군주의 아래로 들어가는 게 모양새가 낫긴 했다.
게다가 군주는 구주의 통치에 관심이 없는 신적 존재다.
연적하에게 광염종을 내어 주면 그가 살아 있는 한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터였다.
화린 제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법요종에서 우리를 받아 주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연적하 제군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는데. 아직 연적하와 틀어지지 않았을 때 관계를 개선하시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만.”
그러자 백은 존자가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관계를 개선하자고? 다짜고짜 혈주종 고수 천여 명을 쳐 죽인 놈이다. 사자의 팔을 자른 우리를 그냥 둘 것 같으냐?”
“그래도 우리는 사자를 돌려보내지 않았습니까?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면 잘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잘 넘어가지 않으면? 어차피 놈이 원하는 것은 우리 광염종이다.”
“천문(天門)을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지난 수십만 년의 종문 역사에 천문을 연 종사가 없었다. 그런데 천문을 내어놓으라?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천문은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놈이 원하는 것은 결국 구주의 아홉 종문이다. 대종사라는 이름만 봐도 그 속이 훤히 보이지 않느냐?”
“종문의 제자들은 누구나 ‘삼천의 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에 쓴다고 종문의 주인이 되려 하겠습니까?”
“그의 욕심을 누가 알겠느냐?”
‘욕심’이라는 말에 화린 제군은 납득했다.
구주, 아니 이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욕망이다.
전해지기를 종문 제자는 물론 ‘삼천의 신’들조차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욕망이 무엇인지는 당사자밖에 모른다.
그러니 연적하의 진짜 목적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놈의 처로 알려진 빙설화도 ‘구주의 종사’로 불렸다. 이쯤 되면 그 두 연놈이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지 않으냐? 천문이 아니라 구주다. 그걸 아는 내가 놈에게 광염종을 선선히 바칠 것 같으냐?”
“하오시면?”
“법요종과 손을 잡겠다.”
“하지만 법요종은 얼마 전까지 소요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연적하가 소요종 출신인데 법요종에서 우리와 손을 잡으려 하겠습니까?”
“법요종에 가 보면 알겠지. 그들이 연적하의 아래로 들어갈지, 우리와 손을 잡겠다고 할지.”
그러자 천응 제군이 끼어들었다.
“페라르바 존자는 연적하의 아래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겁니다. 우샤스 킨샤사 군주를 모시고 있는데 연적하에게 굴복할 이유가 없지요. 무엇보다 우샤스 킨샤사 군주도 반대할 겁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우리 광염종은 내일 법요종으로 갈 것이다. 천응 제군은 당장 법요종에 사자를 보내 우리의 뜻을 전하도록 해라.”
“예.”
백은 존자는 몰아치듯 회의장에 모인 제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명을 이행하기 위해 제군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회의장에는 백은 존자만 홀로 남았다.
고작 노조의 팔 하나를 잘랐다고 쫓겨나듯 종산을 떠나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연적하. 오늘의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 주겠다.”
연적하가 이미 일곱 종문을 손에 넣었지만 백은 존자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우샤스 킨샤사 군주를 아는 종사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