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03
703회. 드러난 칼과 숨겨진 화살
연적하의 폭언에 부들부들 떨던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연적하를 쳐 죽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은 그냥 보내 주마. 돌아가라.”
연적하는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퍼붓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의 극도로 절제된 음성을 들으니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객청에 메디나 이사엘라를 남겨 두고 터덜터덜 마당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운종술을 펼치려던 연적하가 뒤로 돌아섰다.
“이봐. 남의 팔다리가 잘린 걸 보는 것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야. 마족은 안 그럴 것 같아? 광명진천과 싸우다가 그쪽이 죽어도 아파할 마족은 없을 거야. 천문(天門)은 마족에게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해. 내가 그쪽이라면 광명진천과 싸우지 않고 구전범천이나 찾으러 다닐 거야.”
메디나 이사엘라는 냉랭한 얼굴로 손을 털었다.
꺼지라는 뜻이다. 고개를 젓던 연적하는 운종술을 펼쳤다.
그의 발밑으로 하얀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났다.
천천히 날아오르는 연적하를 향해 메디나 이사엘라가 말했다.
“광명진천을 조심해라. 마천이 드러난 칼이라면 천족은 숨겨진 화살이니까.”
연적하가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메디나 이사엘라는 대화할 마음이 없는지 시선을 외면했다.
연적하는 자존심이 강해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를 싫어한다.
당연히 질문에 마신이 답하지 않자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광명진천은 경계의 대상인지라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연적하를 태운 구름이 십여 장(약 30미터)쯤 떠올랐다가 서편으로 사라졌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메디나 이사엘라는 마당으로 터덜터덜 내려왔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연적하가 서 있던 자리에 서서 객청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봐. 남의 팔다리가 잘린 걸 보는 것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야. 마족은 안 그럴 것 같아?”
그런데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히나?
연적하를 흉내 내던 메디나 이사엘라는 제 손톱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딘가에 쑤셔 넣은 적은 있지만, 뭔가가 파고든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그래도 그 말이 자신을 위해 한 것이라는 건 안다.
반신급밖에 안 되면서 최고신으로 숭상받는 자신을 걱정하다니.
더구나 광명진천의 편에 섰으니 쥐가 고양이를 생각해 주는 꼴이다.
“너나 광명진천에게 뒤통수 맞지 마라.”
아니, 뒤통수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럼 광천사 베레드처럼 마천에 몸을 의탁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메디나 이사엘라는 헤실헤실 웃었다.
***
청산성.
낙일현.
천뢰종 종산 유명산.
벽력궁.
정오 무렵, 구름 한 덩어리가 벽력궁 앞마당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구름에서 내려선 이는 대종사 연적하였다.
멀리서부터 그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있던 종문 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태상종의 진표 존자와 천뢰종의 광성 존자, 그리고 천지종의 곡분조 노조가 급히 연적하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천뢰종 종산이라고 광성 존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대종사님.”
모여든 고수들을 휘둘러보던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왜들 이렇게 모였어요?”
“허허, 왜겠습니까? 대종사님의 존안을 가까이서 보려고 그러는 거지요.”
광성 존자의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마신과의 전쟁을 앞둔 지금 종문 제자들은 연적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들은 광명진천이 마신을 상대할 동안 대종사가 자신들의 앞에서 싸워 줄 거라 생각했다.
연적하는 모여든 종문 제자들의 표정을 보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저들과 함께 싸울 수 없었다.
마신과의 전투에서 광명진천을 보좌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적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종문 고수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다.
곡분조 노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대종사님.”
“또 왜?”
“대종사님께서 떠나시던 날, 심통 진인이 주화입마에 빠졌습니다.”
“뭐라고?”
연적하가 인상을 구겼다.
심통의 내부가 평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주화입마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주화입마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리하게 영석의 영기를 취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영석? 진인이 무슨 영석이야!”
“저희도 그게 궁금해서 출처를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황망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연적하가
물었다.
“그래서, 상태는 어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태는 심 진인이 깨어나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떠나던 날이면 닷새 동안이나 못 깨어났다는 거야?”
“예.”
“그래서 지금 어디 있어?”
“그의 스승인 옥청 노조가 무망각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무망각? 안내해.”
그러자 곡분조 노조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심 진인보다 광명진천님을 먼저 뵙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차가운 연적하의 말에 곡분조 노조는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체념한 얼굴로 앞장섰다.
아무리 동향이라도 그렇지 기다리는 광명진천을 제쳐 두고 진인에게 가다니.
의리가 있는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다.
대종사가 아직 속인의 때를 벗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종사와 종문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천 년쯤 지나면 철이 들려나?
곡분조 노조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굳어 있는 대종사의 얼굴을 보니 기가 막힌다.
‘하아!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구나. 지금은 진인을 챙길 때가 아닌데…….’
무망각.
곡분조 노조는 연적하를 무망각까지 안내하고 바로 돌아서 떠났다.
벽력궁에서 기다리고 있을 광명진천에게 대종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밖을 내다보던 옥청 노조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대종사님.”
“심 진인은 아직 못 깨어났나요?”
“예, 그래도 첫날보다 기식(氣息)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의원도 조만간 깨어날 거라고 했습니다.”
“심 진인은 어디 있나요?”
“모시고 가겠습니다.”
옥청 노조가 앞장섰다.
그는 연적하를 무망각 안의 작은 별채로 안내했다.
“이곳은 심 진인이 천뢰종에 있을 때 사용하던 별채입니다.”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지만 객청까지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옥청 노조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더니 대접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잠시 후 연적하는 옥청 노조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심통은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기식이 안정되었다고 하더니 과연, 숨소리만 들으면 그냥 잠든 것처럼 보였다.
연적하는 심통의 완맥을 잡았다.
역시나 그의 내부는 혼돈 그 자체였다.
이제는 삼백 자 구결로 쌓은 영기와 영석의 영기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 자신도 손을 쓸 방법이 없다.
연적하가 심통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연적하에게 옥청 진인이 말했다.
“닷새 전 광명진천님께서 진단을 했는데 방법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게 사실입니까?”
“예, 심 진인이 정신을 차리면 혹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네요.”
“헛! 심 진인이 정신을 차리면 치료가 가능합니까?”
“이전처럼 되는 건 불가능하고요. 그저 일상 생활이 가능한 정도?”
“아!”
옥청 노조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종문 제자로 살다가 일반인이 된다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정신을 차려야 시도를 해 볼 텐데……. 하아!”
연적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심통이 익힌 삼백 자 구결로 쌓은 영기와 흡자결로 쌓은 영기는 상극이다.
삼백 자 구결로 흡자결의 영기를 무위로 돌리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던 연적하가 돌아섰다.
치료를 할 것도 아닌데 마냥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자의식 과잉 상태인 광명진천이 또 늦게 왔다고 지랄을 할 게 뻔하다.
막 걸음을 떼어 놓으려던 연적하가 옥청 노조에게 말했다.
“심 진인이 깨어나면 나에게 알려 줘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염려 마십시오. 심 진인은 제 제자이지만 생명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연적하가 유령처럼 스스륵 사라졌다.
그가 떠나자 옥청 노조는 침상으로 가서 심통의 완맥을 잡았다.
영기가 이처럼 곤죽이 되면 십중팔구 죽고 마는데,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니?
대종사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
벽력궁.
연적하가 벽력궁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종문 제자들이 멀찍이서 보기만 할 뿐 몰려오지 않았다.
아까는 얼굴도장이라도 찍으려고 왔던 모양이다.
일반인을 벌레 취급하는 종문 고수들이 하는 짓은 일반인과 똑같다.
“쯧쯧!”
가볍게 혀를 차던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벽력궁에 들어가려는데 광명진천의 영기가 은근하게 자신을 밀어냈다.
초월적인 힘을 자랑하고 있는 건지, 늦게 온 것을 책망하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연적하는 자신의 영기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마치 송곳처럼 날카롭게 광명진천의 영기를 찌르며 전진했다.
밀어내던 광명진천의 영기는 딱 세 걸음을 걸으니 안개처럼 흩어졌다.
문득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반신인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될지 궁금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대전이다.
문 앞에 서자 광명진천의 영기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늦었군.”
대전으로 들어가자마자 광명진천이 나무라듯 말했다.
심통의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연적하는 변명하지 않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상석에 앉아 있는 광명진천을 보았다.
상대를-신이 아니라-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니 전과 느낌이 달랐다.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태산 같았지만, 이전처럼 막연한 경외감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자주 접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심통 진인을 보고 왔어요.”
심통의 이름이 나오자 은근히 옥죄어 오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풀어졌
“무리하게 영기를 취하려다가 주화입마에 들었더군.”
“광명진천님도 힘들다고 하셨다죠?”
연적하가 광명진천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이미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딱히 기대가 되지 않았다.
역시나, 광명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심 진인의 몸에는 상극인 두 종류의 영기가 있다. 그 두 개가 섞이지만 않았어도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적하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금은 마신과의 전쟁보다도 심통의 일이 더 크게 다가왔다.
“참, 동산현에…….”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광명진천이 먼저 말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마천의 군세가 동산현에 머무르고 있었던 이유를 알아냈어요.”
“…….”
광명진천은 계속하라는 얼굴로 연적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족 하나를 잡아 물어봤더니 마신이 갑자기 잠적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가 꼼짝 못 했던 거였어요.”
“마신이 갑자기 잠적했다고?”
“예. 구주에 넘어온 직후에도 슬며시 사라졌는데, 그때처럼 측근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라졌다네요? 마신이 돌아오면 그들도 다시 움직일 거예요.”
연적하는 절반의 사실만 말했다.
광명진천을 신으로 생각하던 이전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심 진인을 치료할 방법이 있다고 했나요?”
“그렇다.”
감정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전해진다.
광명진천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적하를 묘한 눈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