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02
702회. 나는 진짜 신이 아니다.
연적하는 마족 용사 에볼라의 목에서 발을 뗐다.
그러자 에볼라는 튕기듯 일어나 한달음에 마당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소녀의 발치에 이마를 처박았다.
“마신이시여! 종이 무능하여 마신님의 위엄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소녀, 메디나 이사엘라가 에볼라의 뒤통수를 무덤덤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밟아 터뜨릴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돌렸다.
발바닥에 이렇게 입이 가벼운 마족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서다.
에볼라는 군단장인 악투스 발라지크의 수하.
그러니 엄밀히 말해 그는 자신이 아니라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의 수치였다.
“에볼라여 살고 싶으냐?”
“……예.”
“기회를 주마. 오늘 밤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그것을 지키면 죄를 묻지 않겠다.”
“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 죽어 가던 에볼라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지은 죄에 비하면 마신이 내건 조건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가라.”
“예.”
벌떡 일어난 에볼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치 달아나듯 사라졌다.
메디나 이사엘라는 에볼라 쪽은 보지도 않고 대청 마루로 걸음을 옮겼다.
마루 위로 올라간 그녀는 의자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그리고 탁자 건너편의 빈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앉거라.”
뻘쭘한 얼굴로 서 있던 연적하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거 참, 뭐라고 불러야 할지. 그쪽이 정말 마신이야? 메디나 이사엘라라고 불리는?”
“그렇다.”
“내가 뭐라고 불러야 되지?”
“마신이라고 해라.”
메디나 이사엘라가 무심한 눈으로 연적하를 응시했다.
웅천주에서 그가 호의를 베푼 날 충동적으로 메누아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이 되어 나타난 사람에게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광천사 베레드에게 진명(眞名)의 의미를 들었기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마신이니, 메디나 이사엘라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하기로 했다.
“그쪽은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야? 군단장도 어디 갔는지 몰라서 난리를 피웠다는데.”
“훗!”
메디나 이사엘라는 실소를 흘렸다.
‘그쪽’이라는 호칭을 들으니 새삼 웅천주에서 그와 지냈던 날들이 떠오른다.
어딘지 씁쓸하면서도 흐뭇한 기분이다.
“나는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 완산주에 다녀왔다.”
“개인적인 볼일?”
연적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광명진천과의 싸움보다 급하고 중요한 개인적인 볼일이라는 게 뭘까?
“알고 싶으냐?”
“알려 줘도 괜찮은 거라면.”
“내가 왜 적에게 그런 걸 알려 줘야 하지? 지금도 너는 광명진천의 명으로 나를 염탐하러 온 것이 아니냐?”
“그래서 ‘알려 줘도 괜찮은 거라면’이라고 했잖아.”
연적하가 뻔뻔한 얼굴로 마신을 보았다.
메디나 이사엘라는 연적하의 담력에 은근 놀랐다.
반신급밖에 안 되는 무위를 가지고 마신의 앞에서 저런 태도라니.
그래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가 이 세계의 인과율(因果律)에서 벗어난 존재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 하나만으로도 그는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었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운을 뗐다.
“너는 ‘삼천(三天)의 신’에 대해 아느냐?”
“당연하지. 구주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으려고. 구전범천, 광명진천, 마하수라천을 두고 하는 말이잖아.”
“잘 아는구나. 그럼 이제 다른 것을 물어보마. 너는 이 세계의 신들을 믿느냐?”
“믿느냐니?”
“구주의 인간들은 신당(神堂)을 짓고 제사를 드리더구나. 그걸 말하는 것이다.”
“삼천의 신과 팔왕과 아홉 군주를 믿느냐는 거라면, 안 믿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길흉화복을 가져다 주는 것 같지가 않거든.”
“제법이구나.”
“그쪽이 생각해도 이상하지? 마하수라천을 섬기는 신당이 있다는 게. 마신은 오히려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인데 섬긴다니까.”
“이런! 쯧쯧! 오해하지 마라.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을 섬기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 뭐가 제법이라는 거야?”
“이 세계의 신들에 대한 너의 평가가 제법이라는 뜻이다.”
“길흉화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거?”
“그렇다. 이 세계의 신들은 인간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으니까.”
“그런 것 같더라고.”
연적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자신이 만나 본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다 그랬다.
“창조신조차 이 세계를 만들고 난 뒤에 떠나갔다. 사실상 버린 셈이지. 구주에 ‘하늘의 문[天門]’을 남겼다고 하지만, 그건 헛된 희망일 뿐이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천문을 열고 창조신에게 간 존재가 없었으니까.”
연적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녀가 느끼는 좌절과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져 끼어들 수 없었다.
“그렇게 믿었었다.”
듣고 있던 연적하는 문득 눈을 들어 메디나 이사엘라를 보았다.
믿었었다니?
그럼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일까?
메디나 이사엘라는 호기심만 잔뜩 불러일으키고 딴청을 부렸다.
결국 궁금해진 연적하가 물었다.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야?”
그러자 메디나 이사엘라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나는 진짜 신이 아니다. 이 세계의 신들은 진선(眞仙)만도 못한 존재지. 그건 신좌에 오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외면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
연적하는 놀란 눈으로 마신을 보았다.
‘삼천의 신’이라 불리는 마신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놀란 연적하를 빤히 보며 메디나 이사엘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삼천의 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중에 진짜 신이 있다는 거야?”
“내가 어린 마족이었을 때 구전범천은 이 세계의 신이었다.”
“구전범천…….”
연적하는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문득 구전범천전생록(俱全梵天轉生錄)의 제목이 떠올랐다.
전생(轉生)은 즉, 다른 생을 의미한다.
글자를 풀면 ‘구전범천이 다른 생을 산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전까지 제목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구전범천이 직접 쓴 것인지, 누군가 그 이름을 차용한 것인지 알 길이 없어서다. 심지어 동명이인일 수도 있었다.
그보다는 이 세계의 본질을 설명한 범천욕계왕재천(梵天欲界王在天)에 더 관심을 쏟았다.
그런데 마신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나와 광명진천은 ‘태고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유명해졌다. 덕분에 이전부터 신이었던 구전범천과 한데 묶여 ‘삼천의 신’으로 불리게 됐지.”
“아!”
“하지만 나와 광명진천은 초월자의 자리에 올랐을 뿐 신이 아니다. 초월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기는 하지.”
연적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 세계에서 신이라고 하는 것’과 ‘자신이 알고 있던 신’ 사이의 괴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구전범천이 이 세계의 진실한 신이라고 믿는다.”
“재를 뿌려서 미안한데 구전범천도 그쪽과 비슷한 경로로 신이라 불린 걸 수도 있잖아.”
“물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네가 하계에서 읽었다는 ‘구전범천전생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우연?”
“홋! ‘구전범천’과 그가 묘사한 ‘범천욕계왕재천’이 어찌 우연이겠느냐?”
“…….”
연적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제는 자신도 그 책을 ‘삼천의 신’인 구전범천이 쓴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구전범천이 하계(연적하의 세계)에도 머물렀다는 말인데……’
순간 전율이 일어났다.
그것도 모르고 세상이 좁다고 설쳐 댔으니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게 가능해? 이 세계를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감옥이라고 했잖아?”
“그랬지. 여전히 이 세계는 ‘삼천의 신’조차도 벗어나지 못하는 감옥이다. 말했다시피 나와 광명진천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이 아니다. 하지만 진짜 신의 권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혹시 하계에 그 책을 남긴 사람이 ‘삼천의 신’인 구전범천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제는 너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 아니더냐?”
마신이 연적하를 지그시 응시했다.
연적하는 말을 돌렸다.
“그래서 완산주에는 왜 갔는데?”
“구전범천의 자취를 따라갔었다.”
“완산주에 그런 게 있어?”
“범천산에 ‘구전범천입신비’가 있다. 구전범천이 범천산에서 신이 된 것을 기리는 비석이지.”
“구전범천에 대해서 빠삭하네. 설마 그동안 그를 찾아다녔던 거냐?”
“열리지도 않는 천문에 매달리느니 그쪽이 더 빠를 것 같아서.”
“….….”
연적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마신을 보았다.
그녀의 관심이 구전범천과의 만남으로 옮겨 갔다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천문이 목표가 아니라면 종문과 전쟁을 할 이유도 없으니까.
“좋아. 이제 네 뜻을 알겠어.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왜 구주를 침공한 건데? 구전범천이 종산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자 메디나 이사엘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했다.
“마족들이 원하니까. 그들은 성물처럼 천문에도 변고가 생길 것을 염려하고 있다.”
“…….”
연적하는 천문에 대한 그들의 집착을 들은 터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끝까지 종문과 전쟁을 하겠다는 거네? 천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천문을 보고 죽는 게 삶의 목적인 마족과 마귀들이 있으니까.”
“젠장, 그까짓 돌기둥이 뭐라고.”
연적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등 쓸모없는 돌기둥을 보겠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다니 기가 막혔다.
“믿음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너희 인간의 신당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연적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당장 사천왕인 광욕천왕의 신당만 해도 정신 나간 짓들을 해 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기어코 전쟁을 하겠다고?”
“하겠다고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전쟁이다. 나는 그 전쟁을 마무리 지으러 온 것이다.”
“하아! 마무리를 짓는다고? 그쪽이 광명진천과 나를 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오히려 마무리당하기 전에 마천으로 돌아가. 구전범천을 찾아서 네가 원하는 걸 얻어도 되잖아.”
“광명진천이 천족을 위하듯, 나도 마족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서? 그쪽의 꿈은 접어 둔 거야? 마족의 헛된 바람에 양보할 만큼 절실하지 않은 거였어?”
“쯧쯧! 너야말로 죽고 싶지 않으면 이 세계의 전쟁에서 손을 떼거라. 너를 살려 둔 것은 네가 이 세계의 인과율에서 벗어난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광명진천을 도와 나를 방해하면 죽일 수밖에 없다.”
돌연 메디나 이사엘라의 눈에서 시뻘건 염화(炎火)가 쏟아져 나왔다.
화르륵 .
단단한 탁자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아! 깜짝이야.”
연적하는 그 기괴한 광경에 놀라 상체를 뒤로 젖히다 넘어갈 뻔했다.
마신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한 연적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족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싸우는 척하지 마. 내가 볼 때 그쪽은 그냥 자기 힘을 과신해서 그러는 거야. 그쪽 말대로 나는 이 세계의 인과율에 벗어나 있지만, 종문 제자들이 죽어 나가는 걸 구경만 할 생각은 없어.”
“광명진천을 믿고 나에게 맞서겠다는 것이냐? 인간 따위가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에게?”
메디나 이사엘라의 음성에 날이 섰다.
연적하가 지지 않고 맞받았다.
“여기서 광명진천이 왜 나와? 그리고 어차피 둘 다 진짜 신도 아니라며? 주변에서 최고 신이라고 우쭈쭈해 주니까 막 헷갈리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