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55
755회. 고마운데, 그만 죽자!
북부대수림.
대수촌 촌장집.
어스름한 초저녁.
운종술로 날아가던 연적하는 촌장 집 담을 넘기가 뭐해서 대문 앞에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자신을 기다리는지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마당에 들어서니 집안이 온통 음식 냄새로 진동을 했다.
자신을 위해서 만찬이라도 준비한 모양이다.
구주에서 종문 제자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딱히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점심때의 일로 촌장집 요리에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긴 탓이다.
안채로 다가가자 대청마루에 있던 촌장과 그의 가족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촌장의 안내를 받으며 마루 위로 올라간 그는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탁자에는 벌써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가짓수는 늘어났지만 투박한 모양새가 낮의 것과 대동소이한 것 같았다.
바로 앞에 놓인 고기에서 특유의 노린내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적응이 끝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먹다 보면 괜찮아지니까…….’
연적하가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촌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저녁상 차림은 손녀 마이가 거들었으니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마이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요리 솜씨도 뛰어나니까요. 마이가 제 손녀라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롱아 그렇지 않으냐?”
그러자 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요리만 놓고 보면 일등 신붓감이긴 하지요.”
“여자가 요리만 잘하면 되지 더 필요한 게 뭐 있다고. 얼굴 이쁜 여자와 석 달, 마음씨 고운 여자와 삼 년, 요리 잘하는 여자와 평생을 간다고 하지 않더냐?”
“아이고 아버지.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두루두루 잘해야 오래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인?”
롱이 슬쩍 연적하를 대화에 끌어들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연적하가 얼떨결에 답했다.
“그렇기는 하지요.”
연적하가 자기 편을 들자 롱이 촌장에게 어깨를 쭉 펴 보였다.
“거 보십쇼. 아버지. 두루두루 잘해야 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 마이가 못하는 게 뭐가 있다고?”
촌장이 롱에게 눈을 부라리며 윽박지르는 척하자, 롱이 연적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연애를 못 하지 않습니까? 저 나이 되도록 아직 사내 손도 못 잡아 봤을 겁니다.”
“아!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다. 우리 마이가 연애와는 담을 쌓았지.”
부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이를 띄워 주었다.
조부와 부친의 농담에 마이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조금씩 연적하를 훔쳐보았다.
시커먼 대수촌 남자들과 달리 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그린 듯한 눈매…….
살짝 봤는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입버릇처럼 ‘너는 천족 혼혈과 만나야 한다’던 조부와 부친은 마음을 바꾼 것 같았다.
하기야 대수촌의 천족 혼혈보다 종문 제자가 백번 낫기는 하다.
이윽고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촌장과 롱은 계속해서 연적하와 마이를 한데 엮으려 했다.
덕분에 마이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연적하가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 무렵, 촌장이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대인께서는 혼인을 하셨습니까? 종문 제자들은 혼인을 안 한다고 들었는데…….”
한순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촌장의 식솔들은 하던 동작을 멈추고 연적하의 입만 보았다.
“예.”
뜻밖의 대답에 촌장은 상심했지만 이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지고 보면 혼인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보통 사람들도 삼처사첩(三妻四)을 두는데 상대는 무려 종문의 제자.
능력의 출중함은 말할 것 없고, 수명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길다.
그러니 한 여자와의 백년해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삼처사첩도 두는 마당에 무슨…….’
혼자서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촌장은 슬쩍 손녀를 보았다. 손녀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를 보니 종문 제자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잘 생각했다. 어쭙잖은 혼혈들보다 종문 제자가 훨씬 낫지.’
이 순간만큼은 임박한 마왕의 위험보다 손녀를 짝지어 주는 게 더 마음 쓰였다.
혼기 꽉 찬 손녀가 또래의 외지인을 만난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까닭이다.
***
식사를 마친 연적하는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갔다.
반나절 동안 영기를 분출한 때문인지 침상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탁자 위에 켜져 있는 유등(油燈)을 끄려는 순간이다.
누군가 방문 앞에 와서 멈춰 섰다.
“대인, 계신가요?”
촌장의 손녀이자 롱의 딸인 마이였다.
촌장의 심부름이려니 생각하고 방 문을 열었던 연적하가 흠칫했다.
방문 앞에 속옷 차림의 마이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바로 온 듯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이 촉촉했다.
분칠하지 않은 순수한 아가씨의 체향이 코끝으로 훅 밀려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면 안 되나요?”
“아…….”
연적하는 살짝 옆으로 비켜서 마이가 방으로 들어올 수 있게 길을 텄다.
방으로 들어온 마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연적하가 먼저 물었다.
“할 이야기가 뭔가요?”
머뭇거리던 마이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어, 대인께서도 대수촌이 천족 혼혈의 마을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네, 낮에 들었어요.”
“천족 혼혈은 신체적인 특성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섞여 살지 못해요.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게 금방 표시가 나거든요.”
“등에 날개라도 있어요?”
“꼬리가 있어요.”
“헉!”
연적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꼬리라니?
그런 건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연적하를 보며 마이가 배시시 웃었다.
“농담이고요. 천족 혼혈은 천하장사예요. 그런데 어릴 때는 힘 조절을 못 해서 사고를 많이 친답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 살기가 어려워요. 본의 아니게 친구들을 죽일 수도 있으니까.”
“아!”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북부대수림 깊숙이 들어와 사는 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묻지 않았다.
난쟁이족이 깊은 산맥에서 사는 것처럼 천족 혼혈들도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여러 대를 거치면 천족 혼혈의 특성이 약해져요. 그런 사람들만이 대수촌을 떠날 수 있죠. 그들은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나야 해요.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북부대수림에서 살 수 없으니까.”
“그렇겠네요.”
“대인을 찾아온 건 그런 이유에서예요.”
“그런 이유요?”
그녀의 말에서 별다른 이유를 찾지 못한 연적하가 눈을 끔뻑였다.
“네. 천족 혼혈은 인간도 천족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렇게 숨어 지내고 있죠. 대수촌에서 짝을 찾다 보니 근친(近親) 간의 결합도 비일비재해요. 근친 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건장하지 못해요. 수명도 짧고.”
마이는 잠시 연적하의 안색을 살폈다.
종문의 제자인 그가 불쾌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담담한 그의 표정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태어날 아이가 건강하고 오래 살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후손이 언젠가 대수촌을 떠나 사람들 마을에서 살기를 바라요. 그러려면 대수촌 사람이 아니라, 대인처럼 순수한 인간과 맺어져야 해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나는 이미 혼인을 해서요.”
“대인 같은 분에게는 삼처사첩도 흉이 아니잖아요. 정히 제가 부담스러우시면 그저 하룻밤의 인연만이라도 허락해 주세요.”
마이는 처음의 머뭇거림을 떨치고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늘 밤 종문 제자와의 만남이 그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연적하의 난감한 표정을 보던 그녀는 냉큼 침상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녀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연적하는 갑자기 야릇한 상황이 펼쳐지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이는 눈을 감고 그가 침상에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것이 아직 남자를 모르는 마이의 최선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 마이를 보며 연적하는 자신의 신중하지 못한 처신을 자책했다.
‘실수다.’
속옷 차림의 여자를 방에 들인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물론 얼떨결에 그렇게 된 것이지만, 아무 여자와 잘 생각이 없었다면 여지를 남기지 말았어야 한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이것저것 고려할 틈이 없었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저 순진한 아가씨에게 침상에 올라갈 용기를 준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저 아가씨를 어떻게 돌려보내나…….’
그녀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뜻에 따를 생각은 없다.
입장 바꿔 남궁연이 어디 가서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건 측은지심 따위로 용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남궁연을 떠올린 연적하는 자신의 침상에 마이가 누운 것도 죄스러웠다.
그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던가!
어두운 창문 밖에서 한순간 불이 반짝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목을 쭉 빼고 보는데 밤하늘 위에서 삼색의 폭발이 일어났다.
남쪽, 그러니까 자신이 오후 내내 지키고 있던 곳에서 쏘아 올린 폭죽이었다.
‘왔구나!’
마왕의 출현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이런! 마왕이 나타났군요. 촌장님께 목책의 경계를 단단히 하라고 전해 주세요.”
말과 함께 연적하는 창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마당에 내려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원하게 운종술로 날아올랐다.
***
대수촌 남쪽.
번쩍-.
마족들과 함께 야산을 지나던 마왕 천자마가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들의 머리 위쪽에서 명멸하는 삼색의 광채가 눈에 들어왔다.
천족군에서 사용하는 신호용 폭죽이다.
그와 보조를 맞춰 걷던 마족 오로보스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천족입니다!”
“나도 봤으니 호들갑 떨지 마라.”
“그래도 주력은 천독곡에 남아 있을 겁니다. 선발대가 분명합니다.”
오로보스는 천독곡에 천족의 주력이 투입되었다고 믿었다.
정황상 그게 맞았다.
절벽의 균열을 이용하는 건 마족들도 모를 정도로 즉흥적인 결정이었으니까.
“그 선발대에 누가 있냐는 게 문제지.”
천자마의 말에 오로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단순한 선발대라면 저렇듯 요란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을 터였다.
천자마가 뒤로 돌아섰다.
오십 명의 마족과 이백 명의 마귀들이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천자마는 자신에게 유리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만약 선발대에 대종사가 포함되었다면 그는 자신을 목표로 할 게다.
‘이 정도 거리라면 대종사가 내 마기를 구별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테지…….’
천독곡에서처럼 마족과 마귀를 미끼로 쓰면 따돌릴 수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라. 선발대의 우두머리와 규모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당황한 마족과 마귀 들은 그런 천자마의 속도 모르고 순순히 명에 따랐다.
언뜻 듣기로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아서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도생(各自圖生)할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놓아 버렸다.
망부석처럼 서 있는 마족과 마귀들의 앞뒤로 천족들이 떨어져 내렸다.
북부군 사령관 프리타 우베르토를 발견한 천자마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선발대에 저처럼 높은 지위의 천족이 있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마운데, 그만 죽자!”
뜻 모를 소리와 함께 밤하늘 위에서 검 한 자루가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