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54
754회. 저희는 천족 혼혈입니다
연적하의 시선이 노인들 사이에 있는 중년 남자, 롱에게로 향했다.
롱은 연적하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노인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연적하에게 선두의 노인을 가리켜 보였다.
“대인, 이쪽이 저의 대수촌의 촌장님이십니다. 촌장님, 저분은 천족군과 함께 온 종문의 고인이십니다.”
롱에게 미리 언질을 받고 나온 촌장은 격하게 허리를 꺾었다.
“어이쿠! 종문의 고인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 저는 대수촌의 촌장입니다. 롱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건 내드리겠습니다. 숙소와 먹을 것은 물론,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만 해 주십시오. 대인께서 내 집처럼 느끼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내 집까지는 필요 없고요. 하루면 될 것 같으니 묵을 곳과 식사나 제때 먹게 해 줘요. 객잔이나 식당이 없는 것 같아서 신세 좀 져야겠어요.”
“예, 예, 저희 대수촌의 조상님 모시듯 모시겠습니다. 그저 마왕의 손에서만 구해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된 것 같은데. 어디로 가서 먹으면 되나요?”
연적하가 촌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자신이 아니면 마왕에게 죽을 사람들이니 그 정도는 요구해도 괜찮았다.
“아, 제가 모시겠습니다.”
촌장은 데리고 왔던 대수촌 원로들을 해산시킨 후 앞장서 걸었다.
마을이 워낙 작아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을 중앙이다.
촌장이 중앙에 있는 큰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의 집입니다. 대수촌에 머무시는 동안 내 집처럼 사용해 주십시오.”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촌장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촌장은 자신이 사용하던 안채로 종문의 고인을 모시고 갔다.
“잠시 기다리시면 식사를 준비해 내오겠습니다. 롱, 너는 대인께서 무료하지 않게 말벗을 해 드리고 있거라.”
“예.”
뒤따르던 롱이 촌장에게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촌장이 안채를 떠나자 연적하는 마루에 걸터앉으며 슬쩍 물었다.
“촌장님하고는 어떤 관계예요?”
“부친이십니다.”
“아! 어쩐지.”
연적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촌장에 대한 통의 태도가 극진해서 조금 의아했는데 가족이었을 줄이야.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안채를 둘러보던 연적하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래서 철급 마수는 어떻게 된 거예요? 보통은 달아나거나 잡아먹히잖아요. 그런데 아저씨 일행은 씩씩하게 잘 싸우더라고요?”
연적하가 롱을 지그시 보았다.
만약 혈랑의 뒷다리가 올가미에 제대로 걸렸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터였다.
하지만 철급 마수와의 싸움은 종문 제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
“혹시 종문 제자들이에요?”
그러자 롱이 깜짝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희가 종문의 제자라니요? 절대로 그런 거 아닙니다.”
롱은 펄쩍 뛰었지만 연적하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철급 야수나 마수와의 싸움은 일반 문파 문도들이 죽었다가 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걸 저 중년의 롱과 세 청년들이 해냈다.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
종문의 제자 관리는 꽤나 엄격해서 한번 입문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종문에는 파문의 개념도 없다.
한번 종문 제자가 되면 죽어서야 종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종문의 공법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예외가 없었다.
상대가 의심을 거두지 않자 롱이 말했다.
“저희는 천족 혼혈입니다.”
“…….”
예상 밖의 대답에 연적하가 놀란 눈으로 롱을 보았다.
천족 혼혈이라니?
물론 인간과 천족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거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천족 혼혈이라니.
“아까는 천족들이 주변에 있어서 말씀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따로 뵙자고 했던 거고요. 저희는 천족과 인간의 혼혈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대수림 한가운데서 살 수 없었을 겁니다.”
연적하는 롱의 표정과 눈빛으로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롱의 일행은 종문의 공법을 쓰지 않았다.
자신이 종문의 모든 공법을 아는 건 아니지만, 저들의 움직임은 종문의 공법과 차이가 났다.
“혼혈이라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인가요?”
“예, 저희는 선천적으로 인간보다 강합니다. 거기다 천족의 주법(呪法)은 배우지 못했지만, 체술과 무기술은 조금씩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대수촌의 모두가 혼혈인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복잡합니다.”
“뭐가요?”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혼혈이면 혼혈이고 아니면 아니지 복잡할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러니까 혼혈과 평범한 사람들이 오랜 세월 섞여 살다 보니……. 이젠 혼혈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고나 할까요? 혼혈끼리 혼인을 한 경우 조금 더 혼혈에 가깝고, 그 외는 혼혈의 흔적만 남아 있으니까요.”
연적하는 롱이 ‘천족 혼혈’과 ‘그렇지 못한 혼혈’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하! 혹시 천족 혼혈에 가까울수록 선천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그런 건가요?”
“맞습니다. 여러 대에 걸쳐 평범한 인간과 혼인하면 혼혈의 특성이 희석됩니다. 그래서 대수촌의 모든 사람이 혼혈이라고 말씀드리기 뭐했던 겁니다.”
“어쩐지. 종문의 공법과 많이 다른 느낌을 받기는 했어요.”
“예, 저희가 익힌 것은 천족의 체술을 혼혈에 맞게 변형시킨 것들입니다. 이제 오해가 풀리셨습니까?”
“오해까지는 아니고, 조금 궁금한 정도였어요. 그런데 천족의 혼혈이었다니……. 허.”
연적하는 혀를 내둘렀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천족과 인간의 결합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대화가 뜸해졌을 때 마침 음식이 하나 둘 나왔다.
이윽고 촌장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루로 모여들었다.
연적하는 그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는 혈랑과 싸우던 일행 중에 하나였다.
“저분도 가족인가요?”
종문의 제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한 촌장이 웃으며 답했다.
“대인, 마이는 롱의 딸입니다. 저에게는 손녀가 되지요.”
“아!”
연적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마이를 보았다.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혈랑 사냥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촌장의 집안은 천족 혼혈에 가까운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연적하는 너무 상대를 오래 본 것 같아 급히 시선을 탁자로 돌렸다.
투박한 그릇에 담긴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요리는 북부대수림 속의 마을답게 원초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컨대 단순한 고기볶음과 야채볶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탕이 전부였다.
연적하는 일단 가까운 곳에 있는 고기볶음을 집어 먹었다.
역시나 고기 특유의 노린내가 훅 하고 올라왔다.
조리 방법의 문제라기보다 향신료의 부족으로 생긴 맛의 문제였다.
고급진 요리만 대접받다가 상당히 원색적인 음식을 먹으니 속에서 받질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연적하가 깨작거리자 촌장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대인,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다른 걸 만들어 올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요릿집에 온 것도 아닌데 북부대수림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죠.”
솔직히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한 소리였다.
그는 애들처럼 까탈스럽게 굴지 말고 대충 처먹으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독한 마음가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촌장집의 요리에 적응이 됐는지, 부대끼는 느낌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제야 연적하는 음식을 듬뿍듬뿍 떠서 입안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빨리 먹고 촌장의 집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촌장이 그런 그의 속마음도 모르고 눈치 없게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대인, 대수촌이 금산산맥으로 통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마왕이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보시다시피 북부대수림이 어디 좀 크고 넓어야지요.”
“내가 기감을 퍼트리면 인근 백 리(약 40킬로미터) 안쪽의 마기를 느낄 수 있어요. 금산산맥으로 통하는 지역이 그보다 넓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안 그런가요?”
“맞습니다. 백 리를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기감을 백 리까지 퍼트리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송구하나 대인께서는 어느 종문의 고인이신지요?”
“내가 입문한 곳은 소요종이에요.”
연적하는 자신이 대종사임을 밝히지 않았다.
인간 사회와 동떨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다.
“허허! 소요종의 고인이셨군요. 어쩐지 혈주종의 고인들과 달리 옷차림이 반듯하다 했습니다. 제가 소싯적에 먼발치에서 혈주종의 고인들을 본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때가 언제였냐 하면…….”
촌장의 입에서 소싯적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연적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더욱 빠르게 손을 놀렸다.
***
급하게 식사를 마친 연적하는 마을을 빠져나가 천족 숙영지로 다가갔다.
멀리서 그를 알아본 천족 하나가 안쪽으로 달려가더니, 곧이어 북부군 사령관 프리타 우베르토와 참모들이 밖으로 나왔다.
여러 천족의 시선에 뻘쭘해진 연적하가 북부군 사령관에게 물었다.
“마왕은요?”
“기감이 뛰어난 군사들을 주변에 매복시켰습니다만 아직 어떤 마기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간대에 움직였으니 오늘 아니면 내일 오겠죠?”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 조금 전에 전령이 왔습니다. 천독곡의 토벌이 끝났으며, 예측했던 대로 마왕과 고위급 마족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독곡 뒤쪽의 균열을 확인했답니다. 북부군에게 녹수성 일대를 감시하고 마왕이 발견되면 바로 알리라 했습니다.”
북부군 사령관의 말이 끝나자 참모장 퀴리아노스가 슬쩍 끼어들었다.
“천독곡 토벌전에 북부군이 녹수성을 거의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천관산맥으로 향하는 길목에도 북부군을 배치했었음은 물론이고요. 만약 마왕이 동쪽으로 향했다면 북부군의 감시망에 걸려들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북부대수림이 확실하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마왕이 균열을 빠져나가는 데 걸린 시간만큼 이곳에서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내일을 넘지 못할 테고요.”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오늘 아니면 내일 마왕과 만나게 될 거라는 소리였다.
주변을 휘둘러보던 연적하가 퀴리아노스 참모장에게 다시 물었다.
“마왕이 오는지 감시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어딘가요?”
퀴리아노스 참모장이 대수촌 남쪽에 높게 솟은 산을 가리켰다.
“산세로 볼 때 저 산이 괜찮아 보입니다.”
“그럼 나는 저 산으로 가 볼게요. 혹시 마왕이 발견되면 알려 줘요. 한달음에 달려올 테니까.”
그러자 퀴리아노스 참모장이 연적하에게 한 뼘쯤 되는 대나무 통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저희 북부군에서 쓰는 신호용 삼색 폭죽입니다. 대종사님께서도 마왕군을 발견하면 사용해 주십시오. 여기 밀봉된 윗면을 하늘로 향하게 하시고, 아래쪽에 달린 줄을 뒤쪽으로 힘껏 당기면 됩니다.”
연적하는 대나무 통을 받아 윗면과 아래를 다시 꼼꼼히 살폈다.
북부군의 폭죽은 종문에서 사용하는 폭죽과 대동소이했다.
“그럴게요.”
말과 함께 폭죽을 품에 갈무리한 그는 이내 운종술로 날아올랐다.
***
대수촌 남쪽 산.
연적하는 해거름 무렵까지 영기를 풀었다가 거두어들이기를 반복했다.
몸과 마음은 피곤했지만 의외의 소득도 있었다.
단순 무식한 행동의 반복으로 영기의 수발이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일면 기가 일어나는 것[心氣血精]’과도 같았다.
급기야 생각과 동시에 영기가 발출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때부터 영기 발출은-힘든 일이 아니라-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즈음, 천족 십여 명이 산 위로 올라왔다.
그를 대신해 날밤을 새우기 위해 온 것이었다.
연적하는 군말 없이 운종술을 이용해 단숨에 촌장의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