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73
773회. 찰나생멸(刹那生滅), 찰나 속에 영원이 있고 영원 속에 찰나가 있다.
실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야말로 세 사람에게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인 상황이었다.
아니 천족 원정군의 방진형에 둘러싸인 걸 생각하면 그보다 더 위태로웠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심통이 슬쩍 남궁연에게 물었다.
“그래도 가모님에게 좋은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검진강호에서 십전무후라 불리던 남궁연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물론이죠.”
남궁연의 대답에 심통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십전무후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해서 보고만 있어도 절로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천문을 열고 강호로 돌아가면 돼요.”
“아…….”
그제야 심통은 남궁연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알았다.
하기야 아무리 그녀가 십전무후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으리라.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연적하가 한마디 했다.
“그 표정 뭐야? 지금 누님과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믿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니라 뭐?”
“천문은 지난 수십만 년간 종사는 물론 진신들도 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도 열지 못할 거다?”
“제가 언제 공자님이 열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까? 저는 그저 역사적 사실만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와아. 혀에 기름을 발랐나. 미꾸라지처럼 살살 빠져나가는 거 좀 봐.”
“공자님도 조금 전에 구룡번신을 대성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나도 열지 못한다?”
“먼저 구룡번신을 대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제가 아니라 공자님이십니다.”
“심 노인.”
“예?”
“나는 믿지 않아도 돼. 그런데 누님 말을 못 믿겠다고 하면 그건 진짜 멍청한 거야.”
“그야 당연하지요. 저도 가모님은 믿습니다. ‘천문을 열고 강호로 돌아가야 살 수 있다’는 말씀을 두고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러니까 내가 문제다?”
“네.”
심통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얼굴로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연적하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맞는 말이다.
남궁연은 천문의 비밀을 밝혀냈고, 그걸 여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그래서 공자님은 천문을 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말했잖아. 거의 다 됐다고.”
“거의 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하루? 이틀? 한 달?”
“심 노인이 뭘 몰라서 그러는데 깨달음은 찰나야.”
“예에, 누가 뭐라고 합니까? 다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요.”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궁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심 노인, 너무 그를 몰아붙이지 마세요. 찰나생멸(刹那生滅)이라, 찰나 속에 영원이 있고 영원 속에 찰나가 있으니 시간을 헤아릴 수 없어요.”
순간 연적하는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無所從來 亦無所去]’의 구결을 떠올렸다.
그것은 실로 ‘찰나’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구룡번신의 ‘공간 이동술’과 ‘찰나’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와 ‘찰나와 영원’이 머릿속에서 섞여 들었다.
‘아!’
한순간 정수리가 열리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의식은 찰나지간에 바하르산, 금악산, 퉁룽챈녹, 유명산, 불우산, 태백산, 장백산, 도봉산, 원덕산의 천역(天域)을 두루 살피고 돌아왔다.
그토록 원하던 구룡번신을 대성한 것이다.
의식이 다시 돌아오자 그의 육체가 격하게 반응했다.
“하아! 하아! 하아!”
갑자기 연적하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남궁연과 심통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적하야?”
“공자님!”
겨우 육체를 진정시킨 연적하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아이고,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입이 방정맞은 거 아시지 않습니까? 제 말에 너무 부담 가지지 마십쇼.”
심통은 자신이 너무 몰아붙여서 연적하가 이상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했다.
“부담? 이거 왜 이래? 심 노인이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 봐. 내가 부담을 느끼나.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게 오래 같이 지내고도 모르겠어?”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되묻자 심통은 기가 막혔다.
“아니 그럼 갑자기 왜 금방 숨 넘어갈 듯 그 난리를 치신 겁니까?”
“크크! 궁금해?”
“예, 또 전처럼 알면 다친다느니 뭐 그런 말은 하지 마십쇼.”
“그 말이 기분 나빴나 봐?”
“괜히 말 돌리지 말고 왜 그러셨는지 이유나 말해 달라니까요?”
조금 전의 일로 크게 놀랐던 심통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내가 말했지? 깨달음은 찰나라고.”
“그래서요?”
“조금 전에 구룡번신을 대성한 것 같아.”
“예에?”
“정말이니?”
뜻밖의 말에 심통과 남궁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곧이어 정신을 차린 심통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이제 천문을 열 수 있게 된 겁니까? 아니면 뭐가 또 남은 겁니까?”
“가장 중요한 게 남았지.”
“그게 뭡니까?”
심통이 잔뜩 긴장한 눈으로 보자 연적하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천문이 부서지느냐 마느냐 하는 거.”
순간 심통은 맥이 풀렸다.
가장 중요한 게 남았다는 건 연적하가 자신을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아니 지금 농담을 할 때입니까? 공자님은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농담을 하십니까?”
연적하의 말에 지옥과 천궁을 오락가락한 심통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연적하가 뻔뻔한 얼굴로 되받았다.
“진짠데?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천문에는 창조신의 축성이 깃들어 있어. 그래서 무슨 짓을 해도 부서지지 않아. 아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대. 마족들이 천문을 그냥 두고 간 것도 그래서고. 그러니 부서지느냐 마느냐에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지.”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심통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무당파 제자가 된 뒤로 거짓말과 담을 쌓고 지냈기 때문이다.
“시도는 해 보셨습니까?”
“어, 천둔검으로 찍어 봤는데 긁히지도 않더라고.”
“허!”
심통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선이 만든 그 대단한 검으로 찍었는데도 그랬다니 할 말이 없었다.
“검령으로 해 봐야 하는데 심 노인도 내 구천검령이 얼마나 큰지 알잖아. 자칫 일검에 부서지기라도 하면 천문을 여는 것도 물 건너가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천문을 열겠다는 마음으로 시도해야 되겠네요.”
“맞아.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남았다고 한 거야. 성공하면 강호로 가겠지만, 실패하면 이곳에 뼈를 묻게 될걸?”
“뼈까지요?”
“저들에게는 모처럼의 기회인데 곱게 넘어가 줄 리가 없잖아.”
“공자님의 느낌에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뭐가?”
“천문요. 공자님의 구천검령으로 깰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솔직히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어. 만약 이 모든 게 창조신이 계획한 일이라면 깨질 테지만,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라면……. 운에 맡겨야지.”
“…….”
심통은 이런 상황에서 연적하가 ‘창조신의 계획’과 ‘운’을 거론하자 숙연해졌다.
이럴 때 보면 성공과 실패가 사람이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제길! 도관(道觀)에라도 다녀야 하나.’
심통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안학궁 관리자 이연 노조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종사님, 천족 원정군 총사령관 젤라툼 님과 천족군 지휘관들이 찾아와 객청으로 모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잠시 기다리라고 하세요.”
“예.”
이윽고 이연 노조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가 남궁연을 돌아보았다.
“내가 가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 보고 올게요. 누님은 쉬고 있어요.”
심통은 연적하가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연적하는 그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기야 당장 싸울 게 아니라면 함께 가는 것 정도는 상관없었다.
***
안학궁 객청.
이십여 명의 천족과 종문 고수들이 모였지만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젤라툼 천족 원정군 총사령관이 옆자리의 벨 소니아 총참모에게 속삭였다.
“대종사가 안학궁에 있는 것은 확실한가?”
“예.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안학궁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어요.”
“그가 지금의 상황을 알까?”
“지금쯤이면 알 거라고 생각해요. 모르고 있다면 분명히 알게 해야죠.”
두 사람은 나지막하게 말했지만 객청이 워낙 조용해서 멀리까지 소리가 전해졌다.
그래도 젤라툼 총사령관과 벨 소니아 총참모는 한참 동안을 속닥거렸다.
잠시 후 객청으로 연적하가 들어섰다.
이전에는 천족 지휘관들부터 존자들까지 우르르 일어났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천족 지휘관들과 일곱 명의 존자들은 고개만 힐끔 돌려 대종사를 보기만 했다.
적대감은 아니지만 한 톨의 호의도 찾아볼 수 없는 형형한 눈빛들이다.
연적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했지만 속이 쓰렸다.
가급적 조용히 천문을 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러기는 틀린 모양이다.
프리스카 참모가 연적하를 상석으로 안내하고 돌아갔다.
분위기에 짓눌려서인지 그는 연적하에게 흔한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상석에 앉은 연적하는 객청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십여 명의 천족 지휘관들과 일곱 명의 존자가 전부였다.
당연히 진신들이 참석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모양이다.
젤라툼 천족 원정군 총사령관이 벨 소니아 총참모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벨 소니아 총참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종사님께서는 천족 원정군과 종문의 대표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를 아시나요?”
“몰라요.”
“구월 이십이 일 천지종의 곡분조 노조와 신무희 노조가 옥사를 했어요. 이제 아시겠나요?”
뚱한 얼굴로 벨 소니아 총참모를 보던 연적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빙빙 돌려서 말하면 내가 잘 모르니까, 알아듣기 쉽게 요점만 말해요.”
그가 시치미를 떼자 벨 소니아 총참모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범한 건지 뻔뻔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대종사님은 신무희 노조와 곡분조 노조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였어요. 아닌가요?”
“아닌데요.”
“그럼 왜 죽였나요?”
“나와 빙 제군의 거처에 몰래 청음부를 설치한 죄로 파문시킨 건데요? 죄인을 파문시킬 때 영기를 회수하는 건 당연한 절차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내가 죽인 게 아니라 늙어서 죽었어요. 뭐 문제 있나요?”
벨 소니아 총참모가 지지 않고 맞받았다.
“좋아요. 부분적으로 제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건 인정할게요. 대종사님의 말대로 그 두 사람은 파문당할 짓을 저질렀어요. 그래서 영기를 회수당하고 늙어 죽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천문을 파괴하겠다는 대종사님과 빙 제군의 음모도 드러났어요. 설마 대종사님처럼 지고한 경지의 수행자께서 이것도 아니라고 부인하실 건가요?”
객청에 있던 천족 지휘관들과 존자들의 눈이 일제히 대종사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