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90
790회. 원하는 게 뭐요?
연적하는 청성파 장문인 원양 진인과 천룡문 대외총관 황원익의 앞에 빈 잔을 놓고 뜨거운 차를 따랐다.
시월 말이라 한낮에도 선선해 차를 마시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내가 어릴 때는 차 맛을 모르고 마셨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더라고요.”
원양 진인과 황원익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원양 진인은 환갑이 지났고, 황원익도 오십 대 초반인 까닭이다.
하지만 강호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사파에서만 무위가 강한 사람이 존장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관심 사항이 서로 달라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일다경(약 20분)쯤 지났을까?
황원익은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단숨에 마시고 운을 뗐다.
“연 장주, 우리 솔직해집시다. 나를 왜 잡아 둔 것이오? 말씀하신 시간에 당가에 도착하려 했으면 어제 출발했어야 하오. 이건 장문인께서도 동의하실 게요. 그런데 연 장주는 상청궁 별궁에서 느긋하게 차나 마시고 있소. 그건 오늘 당가에 갈 생각이 없다는 게 아니오?”
“갈 건데요?”
“삼백 리 길을 오늘 밤까지 가겠다는 거요?”
“예.”
“허어! 참!”
기가 막힌 황원익은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오늘 밤까지 당가에 가겠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설마 나를 인질로 잡고 천룡문과 협상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녹림 출신의 그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불쾌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경신의 공부가 부족해 삼백 리 길을 반나절 만에 갈 수 없소. 연 장주에게 다른 뜻이 있다면 속 시원히 말해 주시오. 원하는 게 뭐요?”
“길 안내라니까요?”
“정말 그것뿐이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그쪽을 잡아 두겠어요?”
‘잡아 두었다’는 말에 황원익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길 안내는 핑계에 불과하고 그가 원하는 것은 천룡문과의 협상이었던 모양이다.
“혹 나를 볼모로 천룡문과 협상을 할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시오. 천룡문은 사람 하나 때문에 문파의 결정을 철회하지는 않으니까.”
연적하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볼모니 협상이니 하는 걸 보니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다.
“저기, 혼자만의 세계에 깊이 빠진 것 같은데 얼른 현실로 돌아와요. 난 진짜 길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쪽을 잡아 둔 거예요.”
“그렇다면 나 때문에 늦었다고 핑계를 댈 셈이든지.”
“아직 한낮이구만 늦긴 뭐가 늦어요?”
“이제 곧 점심시간이외다. 지금 출발해도 내일에나 도착할 텐데, 연 장주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지 않소?”
“식사는 하고 가야죠. 어차피 산을 내려가도 먹어야 할 텐데.”
“허! 식사까지 하고 출발하시겠다? 왜? 식후에 차 한잔도 곁들이시지 않고?”
“그래요. 식후에 차 한잔 마시고 슬슬 출발하도록 해요.”
연적하가 따박 따박 말을 받자 황원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겠소. 뜻대로 하시오. 어차피 호랑이굴에 들어온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소?”
황원익이 원망의 눈으로 원양 진인을 보았다.
이러려고 연적하를 만나라고 했나 생각하니 열불이 났다.
그동안 천룡문과 청성파의 관계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원양 진인이 급히 말했다.
“호랑이 굴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오. 우리 청성파는 천룡문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소.”
“그러신 분이 왜 나를 이 자리까지 끌어들여 모욕을 주십니까? 장문인도 보셨으니 연 장주가 왜 저를 잡아 두는지 아실 테지요?”
“빈도는 연 장주의 말을 믿고 있소이다.”
“삼백 리 길을 반나절 안에 가겠다는 말요? 아니 점심 식사후에 차까지 한잔 마신다고 하니 반나절도 안 되겠군요. 저를 데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경신술의 경지는 장문인께서도 알고 계실 텐데요?”
“연 장주께 무슨 수가 있으니 그러는 걸 게요. 그렇지 않습니까? 연 장주?”
연적하의 신위를 목격한 원양 진인은 그에게 방법이 있을 거라 믿었다.
“당연하죠. 천룡문이 뭐 대단하다고 협상을 해요? 내가 방귀만 뀌어도 무너질 텐데.”
천룡문을 비하하는 말에 황원익이 발끈했다.
“방귀로 천룡문을 무너뜨리다니! 아무리 그대가 고수라 해도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소!”
“아, 방귀가 기분 나쁘셨구나. 그건 그냥 비유예요 비유. 방귀로 어떻게 문파를 무너뜨려요? 방귀 뀌는 힘 정도면 된다는 소리였어요.”
“연 장주!”
황원익이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연적하의 무위가 뛰어남은 알지만 면전에서 저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슬아슬하던 분위기가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그런데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연적하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이봐! 노형. 안에서 아기가 자고 있는데 지금 소란을 피우는 거야? 너도 엿 먹어 봐라 이거야? 나한테 엿 먹인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됐는지 알아?”
“…….”
황원익은 급히 혈기를 가라앉혔다.
무공만으로 따지면 원양 진인도 연적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물며 원양 진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은 말할 것도 없다.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 놈들은 이빨을 다 털어 버렸고, 나를 속인 놈은 물고기 밥으로 줬어. 최근에 제멋대로 설치던 자칭 신(神)은 육편이 됐지. 노형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거야?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주고.”
“끙! 실례했소. 감정이 너무 격해지다 보니 주위 상황을 살피지 못했소”
황원익은 재빨리 사과했다.
적지 한가운데서, 그것도 홀로 연적하와 같은 고수와 싸울 수는 없었다.
“조심하자고요. 그러다 당가보다 천룡문에 먼저 들르는 수가 있어요.”
“명심하리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황원익은 배알이 꼴렸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원양 진인이 연적하와 황원익을 향해 말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오. 우리도 이만 식사를 하러 가십시다. 두 분은 먼 길을 가려면 든든히 먹어 두어야 하지 않겠소?”
고개를 끄덕이던 연적하가 문득 생각난 듯 원양 진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 장문인께 부탁할 게 있는데요.”
“예, 말씀만 하십시오. 들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원양 진인은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었다.
그 모습을 본 황원익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사람은 오래 겪어 봐야 안다더니. 원양 진인이 저렇게 가벼운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는 자신의 눈과 귀를 막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량과 바닥에 깔고 쉴 만한 깔개를 좀 준비해 줬으면 해서요.”
“건량과 깔개요?”
원양 진인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끔뻑였다.
먼 길을 가야 하니 건량은 알겠는데 깔개는 왜 찾는지 모르겠다.
“천때기 하나를 깔고 쉬어도 되지만, 이왕 쉬는 거 편안하게 쉬려고요. 약간 도톰해서 엉덩이와 등이 배기지 않을 정도면 좋겠네요.”
“혹, 당가에 갈 때 쓰려고 그러는 겁니까?”
“예.”
“도톰한 깔개면 부피가 제법 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식사하시는 동안 건량과 깔개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가죠.”
연적하의 말에 원양 진인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자를 자처했다.
감정이 상해 있던 황원익은 그런 원양 진인의 행동을 속으로 비웃었다.
‘저런! 저런! 청성파의 장문인이나 되는 사람이 채신머리없게 뭐 하는 짓인지 원. 밑바닥을 아낌없이 싹 다 보여 주는구나.’
그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천룡문에서도 청성파에 더 미련을 갖지 않으리라.
연적하와 원양 진인, 황원익은 식사를 대충 마치고 별궁으로 돌아왔다.
연적하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원양 진인과 황원익에게 차를 대접했다.
원양 진인은 바빴지만 별궁을 떠나지 않았다.
인질처럼 잡혀 있는 황원익만 남겨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다.
미시 정(오후 2시)쯤 됐을까?
건장한 젊은 도사 둘이 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와 마루에 내려놓았다.
건량과 두툼한 깔개였다.
건량이야 어차피 필수품이니 누가 들어도 들어야 하지만 깔개는 다르다.
도관에서 사용하던 두툼한 깔개는 누가 봐도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깔개를 본 황원익은 연적하의 얼굴을 살폈다.
당연히 도로 가져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드는 듯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순간 황원익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저걸 나에게 들라고 하지는 않겠지? 자기 짐을 남에게 떠넘기면 사람 새끼도 아니지. 암.’
하지만 녹림도가 어디 사람이던가.
물어보나 마나 저 깔개는 분명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리던 그와 연적하의 시선이 우연히 마주쳤다.
황원익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적하가 어슬렁어슬렁 건량과 깔개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건량이 든 꾸러미를 들어 허공에 툭 걸친 순간, 꾸러미가 사라졌다.
‘헉! 뭐지? 내가 잘못 봤나?’
황원익은 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양쪽 눈을 비볐다.
하지만 어디에도 건량 꾸러미는 보이지 않았다.
연이어 연적하가 돌돌 말려 있는 깔개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곧이어 깔개도 사라졌다.
황원익이 놀란 눈으로 원양 진인을 보았다.
“장문인, 지금 보셨습니까? 건량 꾸러미와 깔개가 사라졌습니다!”
“저도 봤습니다. 참으로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군요.”
잠시 후 연적하가 손을 탈탈 털고 제자리로 돌아오자 원양 진인이 물었다.
“연 장주님, 건량 꾸러미와 깔개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아, ‘마하담’이라는 공간의 창고에 넣었어요. 최근에 배운 술법인데, 어때요? 쓸 만한가요?”
“그런 술법이 있습니까?”
원양 진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로 술법은 눈속임에 가깝다.
물론 고명한 수법은 허실을 구별하기 어렵지만 근본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청성파가 도가 문파지만 술법보다 무공을 앞세우는 것도 그래서다.
“강호의 수법은 아니에요. 나도 멀리서 배워 온 거예요.”
“그랬군요. 저도 술법 공부를 했지만, 연 장주님이 쓴 술법은 처음 봅니다.”
술법과 거리가 먼 황원익은 반신반의한 눈으로 연적하 주위를 힐끔거렸다.
그는 연적하가 빠른 손놀림으로 짐을 숨겼다고 생각했다.
연적하가 숨긴 짐은 별궁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몇 날이 지나 발견되리라.
그렇게 생각한 황원익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나는 연 장주가 건량과 깔개를 사용하기 위해 준비해 달라고 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오?”
황원익의 딴지에 원양 진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 역시도 연적하가 술법을 보여 주기 위해 건량과 깔개를 준비해 달라고 한 건지, 여행길에 사용하려고 그런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연적하는 빙글빙글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그때 종이 두 번 울렸다.
원양 진인이 무심코 말했다.
“벌써 신시 초(오후 3시)가 됐군요.”
그러자 연적하가 식은 찻물을 쭈욱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움직일 시간이네요. 노형, 따라와요.”
말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궁 앞마당으로 내려갔다.
황원익은 마지못해 그를 따라갔다.
그가 막 연적하의 곁에 서는 순간, 갑자기 발밑으로 구름이 일어났다.
“연 장주? 이게 무슨 일이오? 어? 어?”
갑자기 몸이 떠오르자 황원익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그는 상청궁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자 연적하의 팔을 움켜잡았다.
“사, 살려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