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5
85회. 검객(劍客)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임지령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운비는 나가서 희연이 찾아 데리고 오너라. 그리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풍운비는 밖으로 나가면서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풍연초가 조심스럽게 섬돌에 신발을 벗어 놓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탁고명은 의형의 뒤를 따르지 않고 눈치껏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임지령의 앞에 앉은 풍연초가 머리를 숙였다.
“미안하다. 무슨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변명하자면…….”
“알아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거. 그 뒤로도 오랫동안 죽은 사람들 가족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어요. 당신이 있었다면 맞아 죽었거나 관부에 잡혀갔을 거예요.”
풍연초가 머리를 긁적였다.
엉터리 환단을 먹고 죽은 사람이 여럿이니 관부로 끌려갔으면 죽었으리라.
“그래도 용케 찾아왔네요?”
“전에 살던 집에 갔다가 나를 기억하고 있던 이웃에게 들었어. 오 년 전에 포목상을 하는 장문호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임지령이 물끄러미 풍연초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당신은 전보다 더 좋아졌네요.”
“어? 그래? 당신도 나하고 살 때보다 보기 좋아.”
말을 하고 풍연초는 ‘아차’ 싶었다.
나하고 살 때보다 보기 좋다니! 그게 무슨 병신 같은 소리란 말인가.
풍연초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나, 나는 당신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와 봤어. 다른 뜻은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마. 내가 버리고 달아난 거니까 절대 원망하지 않을게.”
“뭘 원망해요?”
“당신이 장씨의 첩이 되었다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기 어려웠을 거야. 나는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유랑 걸식을 하면서 굶어 죽은 시체를 많이 봤다.
자신도 산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두 아이와 남겨진 처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주방 일을 거들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꾸역꾸역 살았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한마을에서 자란 언니를 만났어요. 그 언니의 권유로 포목점 일을 거들며 함께 살게 된 거예요.”
“그, 그럼, 재가하지 않은 거야?”
“네.”
임지령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장문호의 처인 심지연에게는 자식이 없다. 그래서인지 ‘평생 함께 살자’는 말을 종종 했다. 장문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첩실이 되지 않은 건 별로 내키지 않아서다. 솔직히 두 아이 키우기에 바빠서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다.
순간 풍연초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를 보며 임지령이 물었다.
“버리고 간 식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려고 찾아와 본 거예요?”
“그, 그럴 리가. 허락해 준다면 다시 한 번 남편과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어. 이번에는 정말 잘 해낼 자신 있어.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을게.”
그때 밖에서 풍운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희연이 데리고 왔어요.”
“둘 다 들어오너라.”
방에 들어선 풍운비와 풍희연은 풍연초를 힐끔거렸다.
집주인인 장문호도 방에 들어온 적이 없는데, 낯선 남자가 떡하니 앉아 있으니 놀란 것이다.
“인사드리거라. 너희들 아버지시다.”
“…….”
놀란 얼굴로 풍연초를 보던 풍운비와 풍희연이 엉거주춤 절을 올렸다.
***
그날 저녁.
사합원의 정방(정면의 중앙에 있는 방).
두 남자가 서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집주인이자 포목점을 운영하는 장문호와 불청객 풍연초다.
풍연초보다 두 살 더 나이 많은 장문호가 대화를 이끌어 갔다.
“집사람을 통해 간략하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가족들과 다시 살기 위해 오셨다고요?”
풍연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처와 자식들을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고 갚아 나가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처와 정이 깊어 남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들이 원한을 갚으려고 할 텐데……. 가족들을 데리고 나가도 괜찮겠습니까?”
“잘 설득해야지요. 엄밀히 말하면 저도 속았던 겁니다. 엉터리 약을 만든 건 제가 아니거든요. 저는 좋다는 말만 믿고 판 죄밖에 없습니다.”
장문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동안 함께 살며 정이 들었나 봅니다. 나간다고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아무쪼록 이번에는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풍연초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저건 분수를 넘어선 말이다.
집안 어른도 아닌 완전한 남에게 저런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참았다.
지난 오 년 동안 가족들이 그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그래야 했다.
“그런데 혹시 고향으로 갈 생각인가요? 그건 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아니요. 개봉에서 살려고 합니다.”
“아! 집은 어떻게 하시려고? 개봉의 집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동안 모아 둔 돈이 있습니다.”
“시세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개봉에서 사합원은 단진(進, 정원이 하나 있는 집)이라 해도 최소한 은자 삼백 냥을 주어야 합니다. 이 집은 이진(二進, 정원이 외원과 내원으로 나뉨)인데 천 냥을 주고 구입했지요.”
장문호는 ‘떠돌이 약장사를 따라다니던 풍연초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정원이 하나 있는 집은 장만할 여유가 됩니다.”
담담한 풍연초의 대답에 장문호는 일순 멈칫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임 매에게 일감 맡기는 곳이 개봉에 좀 있거든요. 임 매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개봉에 정착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앞으로 집사람이 남의 집 바느질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 풍 형이 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개봉에 일자리는 구하셨습니까?”
“구해야지요.”
“어떤 일자리를 찾고 있는지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개봉 출신이라 발이 좀 넓습니다.”
장문호가 풍연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떠돌이 약장수를 따라다니다 십이 년 만에 돌아온 남자에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 궁금했다.
“칼을 좀 쓸 줄 압니다. 표국이나 상방에서 일해 볼 생각입니다.”
“아!”
장문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본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직업 중에 검객만 한 게 없다. 그들은 칼 한 자루만 있으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벌었다.
장문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검객이라는 말에 살짝 긴장한 것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어느 문파에서 배웠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풍 형에게 맞는 일자리를 소개해 주고 싶어서요. 말하기 어려우면 굳이…….”
“와룡장 출신의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풍연초는 와룡장이 멸문당해 사라졌기에 무공 내력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와룡장 검술을 본 사람이 있다면 알려질 일이기도 했다.
“낙양의 와룡장요?”
“그렇습니다.”
“허어! 그러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장문호가 정색을 하고 풍연초를 바라보았다.
떠돌이 약장수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실수였던 것 같다. 낙양의 와룡장은 멸문당했지만 그래도 나름 명가라고 할 수 있었다.
“개봉에 규모가 큰 상방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해상방입니다. 혹시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개봉의 일은 잘 모릅니다.”
“그러시군요. 제가 물건을 받아 오는 곳도 사해상방입니다. 사해상방의 방주님과는 안면이 있으니 제가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야지요.”
정중해진 장문호의 태도에 풍연초는 마음을 풀었다.
그는 장문호의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다음 날 풍연초는 탁고명과 함께 집을 보러 돌아다녔다.
본래 임지령과 함께 다니려고 했지만 그녀는 밀린 일이 많다며 사양했다.
풍연초와 탁고명은 장문호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다 해거름 무렵에 운 좋게 적당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집 중앙에 정원이 하나뿐인 작은 단진 사합원이었지만 풍연초는 만족했다. 그가 살던 고향 집에 비하면 새로 산 이 집은 궁궐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을 구매한 다음 날, 풍연초는 가족들을 데리고 장문호의 집에서 나갔다.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다가 번듯한 자기 집이 생겨서 그런지 임지령과 아이들은 꽤나 좋아했다.
풍연초 내외가 가장 안쪽의 방을 사용하기로 하고, 아이들에게는 정원 좌우에 있는 서상방과 동상방을 내주었다. 그리고 탁고명은 전에 임지령과 아이들이 살던 대문 옆의 도좌방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사흘 후, 장문호는 약속대로 사해상방 방주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사해상방의 방주 상재용은 풍연초와 탁고명을 즉석에서 고용해 그가 소유한 용희루라는 기루(妓樓)로 보냈다. 그렇게 풍연초와 탁고명은 개봉에 자리를 잡았다.
***
호광성 무당산.
연적하는 홀로 무당산을 올랐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구천노도 심통은 산 아래 마을에 남겨 두었다. 도사들 중에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산길을 부지런히 오르던 연적하의 걸음이 느려졌다.
오십 보쯤 앞에 높게 솟은 산문이 보였다.
잠시 후 산문에 다다르자 이십 대로 보이는 도사 둘이 나타났다.
“젊은 형제님, 무슨 일로 산을 오르려 하십니까?”
정중한 도사의 말에 연적하는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공손하게 답했다.
“천지상인을 뵈려고 왔습니다.”
도사, 현월이 암암리에 상대를 훑어보았다.
천지상인은 스승의 사형이니 자신에게는 사백이 된다. 사백은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 손님이 없었다. 그런 사백을 소년이 찾아오다니?
“사백님과 약조는 되어 있으십니까?”
“예. 아무 때나 시간이 날 때 찾아오라고 했었습니다.”
현월은 눈을 찡그렸다.
천지상인은 장문인이나 돼야 겨우 만나 볼 수 있는 구름 속의 학과 같은 분이시다. 그런 분이 아무 때나 찾아오라고 했다니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결국 현월은 자신이 직접 천지상인에게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사백님께 손님이 오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누구시라고 전해 드리면 되나요?”
“연적하가 왔다고 하면 아실 겁니다. 저도 함께 올라갈 수는 없나요?”
“아, 최근 혈겁을 일으키는 무리들로 인해 일반 참배객은 받지 않고 있어서요. 약속이 잡혀 있거나, 초대받은 손님만 산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유명교요?”
“예.”
현월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칠파이문과 유명교의 적대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다.
현월은 함께 있던 현송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산을 올라갔다.
멀뚱멀뚱 서 있던 연적하는 무심코 돌로 만든 커다란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현송이 입을 열었다.
“저 제단이 그 유명한 해검지입니다. ‘해검지에 검을 풀어 보지 않은 자는 어디 가서 검객이라 말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지요.”
“해검지가 뭔가요?”
“헐! 무당파의 해검지를 모르셨나요? 무당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저 제단에 자신의 검을 풀어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많은 검객들이 논검을 위해 무당파를 방문하지요.”
“아!”
연적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해검지를 바라보았다.
검을 맡기고 올라가야 한다니? 실로 신기하고 놀라운 규칙이다.
연적하의 손이 허리춤의 검을 매만졌다.
어차피 천지상인에게 조언을 들으려 왔으니 검은 놓고 가도 상관없었다.
그때 산 위에서 누군가 바람처럼 달려 내려왔다.
천지상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