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70
870회. 부숴 버릴까?
연적하의 무위를 목격한 백미주는 저자세로 나갔다.
그를 증오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팔주령을 되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백 아주머니 말을 들으니까 내가 아주 나쁜 새끼 같네요?”
자책하는 듯 보였지만 말투나 표정은 반대였다.
마치 ‘왜 나를 나쁜 새끼로 만드느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그걸 알아챈 백미주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급히 수습에 들어갔다.
“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면 너의 복수로 충분하지 않으냐는 소리야.”
“복수는 열 배 백 배로 하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피장파장이면 이제 시작인 셈이네요. 맞죠?”
자존심을 버리고 애걸복걸했음에도 통하지 않자 백미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래서? 유명교 행사를 방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내 팔주령까지 빼앗아 가겠다는 거냐? 너는 황실과 교주님이 두렵지 않으냐?”
“백 아주머니. 그런 거 무서워하면 강호에서 못 살아요.”
“…….”
백미주는 유명교에 몸담은 이래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보았다.
애원도 협박도 통하지 않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적하가 옆에서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는 심통과 좌신양에게 말했다.
“뭘 구경만 하고 있어요. 묶여 있는 사람들 풀어 주지 않고.”
그제야 심통과 좌신양이 도사와 중들에게 다가가 밧줄을 풀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도사와 중들이 연적하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사이 심통은 기절한 십두마병들의 혈도를 점했고, 좌신양은 제의를 돕던 유명교 교도들을 밧줄로 묶었다.
백미주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수족들이 제압당하는 광경을 보기만 했다.
주변이 정리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적하를 두려워한 유명교 교도들이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 준 덕분이다.
이쯤 되자 백미주도 내키지는 않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놈이 하라는 대로 해 주자.’
팔주령은 놈의 관심이 식었을 때 훔치면 된다.
포방에 보내져 봤자 교주가 황실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금방 풀려날 터였다.
“네가 이겼다. 석경장으로 끌고 가든, 포방에 보내든, 네 뜻대로 해라. 하지만 ‘팔주령이 유명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했던 말은 사실이다.”
연적하가 약 올리듯 팔주령을 눈앞에 들어 올리고 말했다.
“난 이런 장식품은 필요 없는데.”
“…….”
백미주는 그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달라고 해도 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부숴 버릴까?”
“안 된다!”
백미주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소리 질렀다.
팔주령에는 인신 공양의 결과물들이 쌓여 있다.
그걸 부수면 자신은 더 이상 십두마병의 초능을 쓰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울타리던 와룡장과 백가장마저 사라진 지금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런 백미주의 변화를 지켜보던 연적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으로 팔주령을 후려쳤다.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게 꼴보기 싫어서다.
팔주령이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반신의 경지에 오른 주먹질을 당해 낼 리 없다.
콰직-!
백미주의 팔주령이 산산조각 났다.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백미주는 석상처럼 굳었다.
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더 큰 일이 벌어졌다.
팔주령은 십두마병과 저승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 다리가 끊어지자 백미주의 내부에 있던 초능이 소멸한 것이다.
초능만 사라졌으면 다행이다.
팔주령에 쌓여 있던 수도자들의 영기가 천지간으로 흩어진 직후, 백미 주의 곱던 피부가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수백 년의 나이를 한 순간에 먹은 것처럼 변해 갔다.
새카맣게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백미주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어? 어?’ 소리만 해 댔다.
그러다 마침내 허리까지 구부정하게 굽었다.
뒤늦게 백미주는 ‘악!’ 하고 쉰 목소리로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더욱 쪼그라들더니 끝내 바닥에 들러붙었다.
“연적하아-!”
백미주가 쪼그라든 손으로 허공을 움켜잡으며 절규했다.
기괴한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백미주의 사지를 붙잡았다.
백미주는 달아나려 했지만 개미 떼처럼 몰려온 그림자에 뒤덮였다.
깜짝 놀란 연적하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림자들에 막혀 백미주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림자들은 백미주를 끌고 바닥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하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실감이 나지 않는지 눈만 끔뻑였다.
심통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는 연적하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
“공자님? 방금 그게 다 뭡니까?”
그는 지금 이 모든 게 연적하의 술법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몰라.”
“예? 모른다고요? 공자님의 술법이 아니었습니까?”
“아니야. 저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어.”
“전에 십두마병과 백두마군이 염마왕의 권속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렇다면 염마왕에게 끌려간 걸 수도 있겠네요.”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황당하지만 일리 있는 소리다. 지금은 그것 외에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백미주는 사후세계에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끔찍하네요.”
“그러게.”
확실히 그건 저승의 힘을 빌려다 쓰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연적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실 바닥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특이한 점은 없었다.
백미주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아무래도 심통의 말처럼 염마왕에게 끌려간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서가장의 장주인 서결과 십두마병들, 그리고 유명교 교도들이 의창 포방으로 압송됐다.
의창을 발칵 뒤집은 유명교의 만행은 곧 천하로 퍼졌다.
-서가장에서 유명교 십두마병들이 인신 공양을 하려다가 발각됐다!
-연적하와 양의문의 좌신양이 서가장 지하에서 납치된 수도자들을 구했다!
-유명교가 다시 인신 공양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유명교를 호국의 종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교라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황실에서 유명교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어서다.
다만 유명교를 비난한다고 잡아가던 일은 중지됐다.
무림인들은 황실이 유명교의 눈치를 본다고 비난하며 호천맹의 궐기를 촉구했다.
곧 삼년지약도 끝나는 터라 사람들의 이목은 호천맹으로 쏠렸다.
연적하의 무위가 대단하다 해도 그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호천맹은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는 그랬지만 사실 호천맹은 서가장의 일로 내홍을 겪고 있었다.
***
하남성 정주.
칠리하촌.
호천맹.
맹주 집무실.
무극상인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서탁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뭐요? 무양 진인이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서가장의 행사에 참석한 경위를 직접 와서 보고하라고 했는데, 폐관 수련? 아무리 호천맹이 유명무실해졌다 해도 그렇지! 무당파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오?”
총사 공손일랑 공손기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맹주님. 무당파는 호천맹을 지탱하는 기둥 중에 하나입니다. 무양 진인의 행동에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무당파를 몰아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더 화가 나는 게 아닙니까? 호천맹의 기둥인 무당파가 왜 무양 진인을 숨겨 주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강호에 어떤 소문이 나돌고 있는지 총사도 알지 않습니까? 호천맹이 유명교와 밀월 관계랍니다! 무림의 정기는 남맹에 있다고도 합니다. 이런 시국에 무양 진인을 숨겨 줘야 했느냐 이 말입니다.”
“하지만 맹주님도 아시다시피 그건 무양 진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무양 진인 외에도 유명교 행사에 드나들던 인사는 많습니다. 그들을 나무랄 수만도 없습니다. 삼년지약이 끝나감에도 호천맹에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으니……. 적대관계를 풀었다고 생각했겠지요.”
“끙!”
공손기의 말에 무극상인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간 황실의 눈치를 보느라 유명교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강호에서 호천맹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다시 유명교와 싸워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총사도 우리가 다시 유명교와 싸워야 할 때라고 생각하시오?”
“천외이선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면 그래야겠지요.”
무극상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명교가 분열되었음에도 호천맹이 몸을 사리는 것은 천외이선 때문이다.
금군에 있는 의천문 제자를 통해 황궁의 일은 호천맹에도 알려진 상태였다.
“은거하신 칠파일문의 전대 고수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겠소?”
공손기가 애매한 얼굴로 답했다.
“물론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만……. 그분들이 천외이선의 상대가 될지 의문입니다.”
공손기의 말에 무극상인은 가타부타 답하지 못했다.
전대의 고수들이 한데 뭉친다 해도 금군에 대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천외이선은 단 두 사람이 금군을 제압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암울하지만 전대의 고수들과 금군은 조금 다르다.
“청성산의 일을 봐서 알 듯이 군대와 무림 고수를 같이 생각할 수는 없소.”
연적하가 홀로 위소(衛所)의 부대를 격퇴한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
“그렇기는 합니다만……. 허면 이번 중양절(重陽節, 음력 구월 구 일)에 무림대회를 개최하는 건 어떻습니까? 무림대회를 빌미로 전대 고수들을 초빙하면 외부에서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다만 칠파일문에는 따로 무림대회의 취지를 알리고, 더불어 자파에 있는 전대 고수들의 참여를 독려하게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맹주님.”
공손기의 부름에 무극상인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전대 고수들의 참여가 미미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전대 고수들은 오래전 은거를 한 사람들인 터라 그들을 강제할 길이 없었다.
“그때는 다시 사파에 손을 내밀어 볼 생각이오. 파천마군(녹림 총채주)도 천외이선의 존재에 대해 알면 거절하지 않을 게요.”
공손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사실상 무림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것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마침내 호천맹이 움직였다.
삼 년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난 호천맹이 칠파일문과 정파에 무림첩을 돌렸다.
명목상 ‘중양절의 무림대회’지만, 그것이 단순한 무림대회가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호천맹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맹에서도 무림첩을 돌린 것이다.
남맹이 보낸 무림첩의 내용은 호천맹의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남맹은 남직례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파급효과가 적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남맹의 맹주는 검왕 남궁벽이고, 그의 딸이 십전무후 남궁연이며, 사위가 남천 연적하다.
그것만으로도 경천동지할 위세인데, 무림세가들이 모두 남맹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북직례성의 팽가와 사천성의 당가는 물론 봉문했던 모용세가까지 남맹에 참가 의사를 밝히자, 호천맹은 은밀하게 남맹에 사자(使者)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