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71
871회.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봅니다.
남직례성.
합비.
남궁세가.
안채.
사시 정(오전 10시).
검왕 남궁벽은 긴장한 얼굴로 붓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탁 위에 펼쳐진 하얀 선지(宣紙)를 오랫동안 노려보았다.
하지만 좀처럼 붓을 쥔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숨까지 멈추고 선지를 집중하던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에는 온갖 생각으로 가득한데 막상 붓만 잡으면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소년 시절 글 선생의 앞에서도 일필휘지를 뽐냈건만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런 때는 비명에 간 처가 그립기만 하다.
그녀는 남궁연에게 남다른 애정이 있었으니 이름 짓는 걸 꽤나 좋아했을 것이다.
처를 떠올리던 남궁벽은 다시 붓을 내려놓았다.
때마침 방문 밖에서 총관 유정유검 남궁산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주님.”
“들어오게.”
잠시 후 총관이 들어와 서탁 맞은편에 앉았다.
남궁벽은 잠시 선지를 옆으로 밀어 두고 총관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남진무사 원화평이 찾아와 가주님과의 독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금의위가 왜?”
“천람소축(天覽小築)에서 만남을 거절하니 가주님이라도 뵙겠다고…….”
총관은 말끝을 흐렸다.
사흘 전 남궁연 부부가 석경장 식솔들과 함께 남궁세가를 방문했다.
그들은 과거 남궁연이 사용하던 천람소축에 머물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관부와 무림의 명사들이 인사를 하겠다고 물밀 듯 몰려왔다.
처음에는 예의상 만나 주던 남궁연과 연적하도 딱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꿨다.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하루가 다 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뒤로 막무가내로 찾아온 손님들을 거절하는 게 자신의 일이 됐다.
어지간한 손님들은 그냥 돌아갔다.
그런데 오늘 금의위 남진무사가 ‘남궁벽이라도 만나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어째 ‘꿩 대신 닭’인 것만 같은 느낌에 가주의 얼굴 보기가 민망했다.
남궁벽은 단번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쯧! 나를 만나 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
“돌려보낼까요?”
“아닐세. 그래도 나랏일을 하는 사람인데 문전박대를 하면 안 되지.”
남궁벽은 총관을 만류했다.
상대가 금의위 남진무사라면 남궁세가의 앞날을 생각해 만나는 게 나았다.
잠시 후 남진무사 원화평이 방으로 들어왔다.
“원 대인. 어서 오십시오.”
남궁벽이 원화평을 상석으로 이끌었지만 원화평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내가 남천 대협의 빙부보다 상석에 앉을 수는 없지요. 좌정하시지요.”
원화평이 남궁벽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서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뻘쭘하게 서 있던 남궁벽은 마지못해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화평은 남궁벽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남궁 대협. 바쁘신데 뵙겠다고 고집을 부려 송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유명교의 일로 말들이 많던데 금의위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금의위는 언제나 남천 대협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황궁에 암운이 짙어 밝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요.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남궁 대협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그 일이라고 하심은?”
남궁벽은 짚이는 바가 있었지만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사위가 결정할 일을 장인이 나서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원화평 역시 운으로 남진무사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남궁벽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전제로 말했다.
“황상께서는 남천 대협께서 황궁에 드리워진 암운을 걷어 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나오자 남궁벽도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건 사위가 결정해야 할 일이라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남궁벽은 딸과 사위에게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구주(九州)와 청성산, 그리고 황궁에 있는 천외이선까지.
강호 경험이 많다고 자신했건만 딸과 사위가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외이선이 구주에서 건너온 신적 존재라고 했겠다.
그렇다면 강호에서 천외이선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연적하밖에 없다.
더더욱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다.
남궁벽이 선을 긋자 원화평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본관(本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남궁 대협께서 한 번씩 황궁의 일을 거론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남궁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의 일을 하라고 압박하는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도울 용의가 있었다.
그제야 원화평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남궁벽이 깐깐하게 굴면 어쩌나 했는데 해 준다니 일을 다 끝낸 기분이다.
여유를 되찾은 그의 눈에 선지와 먹을 듬뿍 머금은 붓이 들어왔다.
“검왕은 문무겸전이라 하던데 글을 짓던 중인가 봅니다?”
“손녀의 이름을 짓던 중입니다.”
“손녀라고 하시면 혹시 남천 대협의 영애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손녀를 낳았다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아직 이름도 짓지 않았다고 하지 뭡니까. 저에게 이름을 받으려고 그랬다기에 나무라지도 못했습니다.”
남궁벽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검왕은 이제 옛 이름이 됐다.
지금 천하를 떨쳐 울리는 것은 남천 연적하다.
금의위 남진무사가 와서 절절매는 것만 봐도 그 위세를 알 수 있다.
그 연적하가 자신에게 딸의 이름을 부탁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원화평은 제 무릎을 탁! 치며 호응했다.
“역시! 검왕이십니다. 영손의 이름으로 생각해 둔 것은 있으십니까?”
“그게 생각은 많았는데……. 막상 적으려 하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 고민입니다.”
“저런! 안타깝군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커서 그러는 게 아닐까요? 과장(科場)에서 종종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응시자들이 있더군요. 소관(小官)이 조금 도와 드려도 되겠습니까?”
남진무사 원화평은 ‘본관’에서 ‘소관’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밖에서 보기보다 더 연적하가 검왕에게 의존하는 것 같아서다.
남궁벽은 혼자서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사양하지 않았다.
“좋은 이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꽃처럼 아름다우니 화(花)가 어떻습니까?”
“꽃이라……. 그것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꽃은 질 때가 있어서요.”
“아! 그렇군요. 소관이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허면…….”
‘의논할 상대가 없던’ 남궁벽과 ‘남궁세가에 잘 보여야 하는’ 원화평은 의기투합해 이름 짓기에 몰두했다.
***
남궁세가.
천람소축.
정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좋구나. 여기서 그냥 살아도 괜찮겠다.”
옆에서 아기를 어르던 남궁연이 웃으며 돌아보았다.
“석경장은 어쩌고?”
“어때요? 누님도 여기가 더 좋지 않아요?”
연적하의 물음에 남궁연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석경장이 더 좋아.”
“왜요? 천람소축의 경치가 이렇게 좋은데. 석경장은 볼 게 너무 없어.”
“그래도 난 석경장이 좋아.”
“에이, 석경장에 뭐 볼 게 있다고.”
“여기는 어머니 손길 닿은 곳이 많아서……. 좀 그래.”
“…….”
연적하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단순히 그녀가 자란 곳이니 좋아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미처 몰랐다.
“그날 남궁세가를 쳐들어온 게 월하선자와 무산낭랑 이매화라고 했어요?”
“이매화는 무산소축에 있죠?”
“응.”
“맞아.”
“잠깐 다녀올까요?”
말과 함께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산소축은 운종술로 가면 반 시진도 안 걸릴 거리에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남궁연이 월아와 금아를 불렀다.
근처에서 꽃구경을 하던 월아와 금아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쌍둥이처럼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두 소녀를 보며 남궁연이 빙긋 웃었다.
“그래, 잠시 장주님과 외출할 동안 아기를 봐주었으면 한다.”
월아가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네! 맡겨만 주세요. 그런데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스승은 사조가 안 보이면 안달을 하니 미리미리 알아 둬야 했다.
“장주님이 무산소축에 다녀오자고 하시는구나.”
“아!”
월아는 아쉬운 얼굴로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스승이 나중에 알면 ‘나만 빼놓고 갔다’고 툴툴거릴 게 뻔해서다.
그때 연적하가 물었다.
“심 노인은?”
“목이 컬컬하다고 외출을 나가셨어요.”
“네 스승의 목은 뭐로 만들어졌기에 일 년 내내 컬컬하다냐?”
“헤헤.”
월아와 금아는 스승을 변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웃기만 했다.
“분명히 전해라. 내가 심 노인 찾다가 없어서 그냥 갔다고. 이따가 돌아왔는데 심 노인한테서 다른 말 나오면 안 된다? 알았지?”
“네에!”
월아와 금아는 장주님이 자기들 스승을 챙겨 주는 게 좋기만 했다.
피식 웃던 연적하가 운종술을 펼쳤다.
하늘과 땅이 바뀐 듯 그의 발밑에서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정자에서 내려온 남궁연이 월아에게 아기를 넘기려고 할 때다.
아기가 남궁연의 앞섶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아기 손가락을 떼어 내려던 남궁연은 아기의 손힘이 의외로 강하자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아기가 안 떨어지려고 하네. 어쩐다.”
월아와 금아는 가모를 꽉 잡은 고사리 같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심조심 아기 손가락을 떼어 내려던 남궁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적하가 말했다.
“그냥 가요. 누님이 힘쓸 일은 없을 테니까요.”
잠시 생각하던 남궁연은 다시 아기를 고쳐 안았다.
그와의 동행만큼 안전한 것도 없으니 아기를 억지로 떼어 낼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세 사람을 태운 구름이 둥실 떠올라 먼 하늘로 사라졌다.
***
합비 남쪽 소호.
무산소축.
정오 무렵, 솜털처럼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무산소축 위로 날아왔다.
유명교 교도들과 일반 참배객들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떠들어 댔다.
하얀 구름이 무산소축 위에 멈춰 서서 미동도 하지 않자 소란은 더욱 커졌다.
신묘한 구름의 이야기는 신당에 있던 무산낭랑 이매화에게도 전해졌다.
십두마병들까지 구름 어쩌고 하자 이매화가 관심을 보였다.
“눈처럼 하얀 구름이 무산소축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냐?”
총관 혈귀 완사석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속하도 조금 전에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 이는 상서로운 징조이니 낭랑께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봅니다.”
“좋은 일이라.”
피식 웃던 이매화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두가 상서롭다고 하는 구름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다.
그녀가 신당 밖으로 나오자 앞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조아렸다.
십두마병들이 태산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소리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에 신당 주위를 지키고 서 있던 유명교도들이 화답하듯 외쳤다.
“삼계개고 아당안지!”
내공이 실린 외침에 혼비백산한 참배객들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하늘이 그들의 기원을 들은 것일까?
저 멀리 떠 있던 구름이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왔다.
처음 보는 기사(奇事) 앞에 흥분한 참배객들은 구름을 향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비나이다’라는 기도 소리가 무산 소축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