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87
887회. 누구나 자신의 판단을 믿죠
고민하던 무극상인이 공손일랑 공손기를 보았다.
“총사. 아무리 생각해도 무한의 방파로 마교를 유인하는 건 무리인 것 같소. 우리는 남맹이 언제 무한에 도착할지 모르오. 만약 남맹이 우리보다 늦으면 괜한 희생만 자초하는 것인데……. 확실치 않은 일치고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크오.”
그러자 공손기가 담담하게 말했다.
“맹주님 말씀처럼 확실치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요.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해야 마땅한 줄 압니다.”
“그것이 무한의 방파들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시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捨小取大]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호천맹이 남맹보다 우위에 서려면 그리해야 합니다. 남맹과 마교가 먼저 맞붙으면 호천맹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 겁니다.”
“흐음.”
무극상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그건 맞았다.
남천 연적하와 검왕 남궁벽의 무위를 생각하면 호천맹이 뛰어들기 전에 전쟁은 끝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호천맹의 미진하던 대응이 도마에 오를 테지…….’
지긋지긋하게 듣던 ‘호천맹 무용론’이 또 천하를 뒤덮을 것이다.
남직례성에 인접한 호천맹 산하의 방파들이 호천맹에서 남맹으로 넘어가고, 호천맹은 더욱 위축돼 종국에는 칠파일문의 친목 단체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림의 종주 자리를 남맹에 빼앗기면 칠파일문은 강호의 여느 방파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칠파일문이 이끌던 무림의 몰락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비로소 공손기가 말한 ‘사소취대’의 의미가 명확해졌다.
어쩌면 그것은 ‘무한의 방파를 희생시켜 호천맹의 명예를 취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내 손으로 호천맹을 망하게 할 수는 없지.’
유명교나 마교보다 남맹의 활약이 더 두렵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오랜 고민 끝에 무극상인은 공손기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신양에 도착하거든 무한 지부로 전서구를 보내시오. ‘무한의 방파들을 소집해 마교를 목련산으로 유인하라’고. 목련산에서 강호의 명운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도록 하십시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고소기가 읍(損)을 해 보인 후 물러났다
무극상인은 자신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오래도록 얼굴을 펴지 못했다.
***
남직례성.
악서현.
땅거미가 뉘엿뉘엿 질 무렵,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마을로 들어섰다.
남맹의 무인들이다.
그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객점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연적하와 심통은 이 대와 함께 숙소를 구했다.
잠시 후 식당에 내려가자 남궁천이 연적하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남궁천의 맞은편 자리로 다가갔다.
남궁천의 옆에 자리하고 있던 진설하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두 분. 어서 오세요.”
연적하와 심통은 꾸벅 묵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진설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매일 밤 십두마병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그랬는데. 그러고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남궁천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중에 가장 큰일은 마교와의 싸움일 거다.”
남궁천은 진설하가 남맹에 온 뒤로 말을 놓았다.
거의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붙어 다니다 보니 그만큼 친해진 탓이다.
“마교를 만나면 오라버니는 몸을 좀 사리셔야 돼요.”
“무슨 소리. 몸을 사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마교야. 내가 누군지 잊었어? 청운검 남궁천이라고.”
남궁천은 연인 앞에서 큰소리를 팡팡 쳤다.
그러자 진설하가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봤죠? 연 대협이 좀 말려 봐요.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니까요.”
때마침 점소이가 연적하의 앞에 초반(炒飯, 볶음밥) 한 그릇을 내려놓았다.
따로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가져다 주는 걸 보니 초반이 저녁인가 보다.
연적하는 시큰둥한 얼굴로 초반을 집어 들었다.
“형수님이 걱정을 하니까 더 그러는 거예요. 그냥 못 들은 척하세요. 형님도 지금까지 강호에서 살아남은 걸 보면 알아서 잘 하실 거예요.”
“그래, 적하가 뭘 좀 아는구나. 진 매, 나는 알아서 잘 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휴! 말이나 못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진설하도 다시 초반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식사가 끝나 갈 즈음 총사인 반천일검 모용문이 찾아왔다.
남궁천과 진설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동석하고 있던 연적하는 그러거나 말거나 눈도 돌리지 않았다.
뒤늦게 엉거주춤 일어난 심통이 슬그머니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연적하에게 다가간 모용문이 뻘쭘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연 대협.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객점 음식이 거기서 거기죠. 맛으로 먹나요, 살려고 먹는 거지.”
다소 차가운 그의 반응에 남궁천이 서둘러 변명했다.
“하하! 총사님. 우리 연 아우가 원래 먹을 때 말 거는 걸 싫어합니다.”
“아, 그렇구려. 몰랐소. 잠시 앉아도 되겠소?”
연적하가 냉대를 하자 모용문은 남궁천에게 물었다.
남궁천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럼요. 앉으십시오. 마침 저희도 식사를 마치고 차나 마시려던 참입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모용문이 연적하의 옆에 슬쩍 걸터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남궁천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용문을 보았다.
남맹 서열 이 위인 총사가 얼굴이나 보자고 찾아왔을 리 없기 때문이다.
“연 대협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소.”
“아, 연 아우에게요?”
남궁천은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연적하도 더 이상 총사를 못 본 체하지 못했다.
“뭔데요?”
“마교의 교주인 천자마 단제산에 대해 혹 알고 계시는 게 있는지 궁금해서요.”
“몰라요.”
“허면 단제산의 무위에 대해서도 모르시겠군요?”
모용문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가 알고 싶은 건 ‘연적하가 천자마라 불리는 단제산을 이길 수 있는가?’였다.
연적하의 무위가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알고 있지만, 단제산 역시 오래전부터 그런 경지로 알려진 까닭이다.
“전혀 몰라요.”
“풍설(風說)에 의하면 단제산은 일검으로 산을 자른다고 합니다.”
“대단하네요.”
연적하는 순수하게 단제산의 검공에 감탄했다.
내력을 바탕으로 하는 검공으로 그 정도 경지에 올랐다면 신인(神人)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 대협의 천둔검을 보았습니다. 크기만으로도 상대를 압살할 정도더군요. 그런데 힘으로도 단제산의 검공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건 모르죠. 단제산의 검을 상대해 본 적이 없으니까.”
연적하는 정직하게 답했다.
천둔검이 무적은 아니다.
예컨대 그보다 더 강한 것을 만나면 부서질 수 있다.
만약 단제산의 검공에 실린 힘이 천둔검을 부술 정도라면, 부서질 터였다.
물론 소멸하는 것이 아닌 천지간(天地間)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말이다.
“흐음. 그렇군요. 하지만 결국은 연 대협께서 승리하시겠지요?”
“누구나 자신의 판단을 믿죠. 단제산이 천산을 내려온 것도 그래서일 테고요.”
순간 모용문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적하가 당연히 승리를 장담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으니 당황한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남궁천이 슬쩍 끼어들었다.
“총사님. 말은 저렇게 해도 연 아우가 이길 겁니다. 연 아우는 고금제일인입니다. 언법(言法)을 익히다 보니 진중해져서 저러는 겁니다.”
“하하. 교만하여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 낫군요. 나도 연 대협의 승리를 믿고 있소. 좋은 말씀 많이 들었소이다. 덕분에 마음의 짐이 더 가벼워졌소. 나는 이만 가리다.”
모용문은 잡을 틈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한 식구가 될 사람이라고 진설하가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건 마치 연 대협의 무위를 믿지 못해 확인이라도 하러 온 것 같네요.”
그러자 남궁천이 웃으며 말했다.
“진 매, 나쁘게 생각할 건 없어. 총사는 원래 이리저리 잘 따져 봐야 한다고. 모용 대협이 깐깐하게 굴수록 남맹의 희생은 줄어드는 거야.”
“그건 알지만, 그래도 마지막 표정은 진짜 아니에요. 연 대협이 천자마에게 질 수도 있겠다는 그런 얼굴이었잖아요. 연 대협의 검공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천자마의 무위도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다잖아. 그러니까 그러는 거지. 마교에서도 천자마의 이름을 받은 교주는 몇 안된다고.”
“흥! 그깟 천자마가 뭐라고. 연 대협을 만나면 천산으로 달아날 거예요. 그렇죠? 연 대협?”
그녀의 말에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달아난다고요?”
“왜요? 자신 없으세요?”
진설하에 이어 남궁천까지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답했다.
“상계(上界)의 신인 천자마도 내 손에 죽었어요. 그런데 하계의 인간인 단제산이 무슨 수로 달아나요? 그가 상계의 천자마보다 강하다면 혹 모를까.”
“아! 천자마가 죽을 거라는 말씀인 거죠?”
진설하의 눈이 반짝였다.
천자마가 죽으면 마교는 천산으로 달아날 것이니 그보다 좋은 소식도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혼례를 치를 수 있을 테니까.
“당연하죠.”
남궁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왜 총사에게 모르겠다고 한 거냐?”
“궁지에 몰리면 그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잖아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그제야 남궁천은 그가 총사를 시험하기 위해 그랬음을 알았다.
‘가만, 모용 대협은 어떤 사람이지?’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반천일검’이라는 별호 외에 그의 인간됨이 크게 알려지지 않아서다.
“그가 신기수사와 같은 사람이면……. 그때처럼 막 때릴 건가요?”
진설하가 허공에 주먹질을 해 보였다.
연적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채근하던 총사부 사람들이 잠잠했다.
덕분에 남맹의 고수들은 모처럼 늦잠을 잤다.
여독은 풀렸지만 출발 시간이 늦어져 사시 초(오전 9시)를 넘기고야 움직일 수 있었다.
선두의 속도도 전날과 달리 느려졌다.
연적하와 나란히 말을 달리던 남궁천과 진설하는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총사가 연적하를 만나고 나서 속도가 느려진 게 마음에 걸려서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남궁천이 빠르게 선두로 치고 나갔다.
그는 일 대에 있는 검왕 남궁벽의 옆으로 말을 몰아갔다.
“맹주님.”
“무슨 일이냐?”
“출발 시간도 그렇고, 속도도 지금까지와 달리 많이 느려서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출발이 늦어진 것은 총사부의 말들에 문제가 생겨서다. 속도가 느려진 것도 그래서고.”
“문제요?”
“산통(복부 통증)의 증상이 조금 보여 마방에 들렀다가 왔다는구나. 다행히 산통은 아니라 하나 과로하지 않게 하라는 권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며칠간 서두르지 않고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말에 문제가 생기면 더 느려질 테니까.”
“하필 총사부의 말만 그렇게 됐다니 공교롭네요.”
“그건 무슨 소리냐?”
“어제저녁에 총사가 적하를 찾아왔었습니다. 천자마 단제산을 이길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허허. 그 사람도 참. 뭘 그런 걸…….”
“적하가 ‘단제산의 검을 상대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표정이 좀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설마 총사가 일부러 시간을 지체한다고 생각했느냐?”
“맹주님께서 잘 판단하시겠지요. 그럼 저는 이만.”
남궁천은 즉시 이 대를 향해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남궁벽은 애매한 눈으로 선두의 총사부를 보았다.
‘이것 참,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냥 묻어 두기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