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08
908회. 네 책임이 아니야
청운검 남궁천은 본래 자유롭고 낙천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그동안 그는 남맹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며 지냈다.
남맹의 정책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참아 줬다.
그러다 호천맹의 무림대회에서 불편한 진실을 알아 버렸다.
지금까지 호천맹은 그들의 이익을 대의로 포장해 왔다.
그건 비단 호천맹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가 속해 있는 남맹도 호천맹과 똑같은 일을 벌여 온 까닭이다.
남맹과 호천맹은 무림의 안녕보다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원했다.
칠파일문의 장문인들이 연적하의 횡포 앞에서 찍소리 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는 짓은 시정잡배 같지만 연적하는 대의에 충실했다.
반면 칠파일문의 장문인들은 근엄한 얼굴로 자신들의 이익에 목을 맸다.
남궁천은 무림세가의 일원이지만 칠파일문을 존경했다.
과거 한때 연적하가 남궁세가를 흠모했던 것처럼, 남궁천도 그랬다.
존경하지 않는다면 뛰어넘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칠파일문을 흠모했고, 일평생 그들을 뛰어넘으려 노력했다.
그랬던 칠파일문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중양절에 와르르 무너졌다.
남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도 더불어 사라졌다.
‘만약 진 매가 남맹을 떠나겠다면 저도 진 매를 따라갈 겁니다’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남맹의 맹주이자 남궁천의 부친인 검왕 남궁벽은 아들의 황당한 선언에 버럭 화를 냈다.
“뭐라고?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네가 남맹에서 나가겠다고? 그게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냐!”
하지만 남궁천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예! 아버지. 철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습니다. 진 매가 남맹에서 나간다면 저도 나갈 겁니다.”
“너는 남궁세가의 소가주다! 남궁세가가 남맹의 뿌리이자 기둥인데, 네가 어딜 나간다는 것이냐!”
“남궁세가는 아버지와 선조들이 일군 집이지요. 저도 어른이니까, 연이와 적하처럼 독립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궁세가에서 나갈 수도 있다는 소리다.
사대세가 고수들은 불똥이 이상한 곳으로 튀자 부자의 대화에 집중했다.
누가 뭐래도 남맹의 중심은 남궁세가다.
만에 하나 검왕이 아들과의 불화로 낙심해 남맹에서 손을 뗀다면, 남맹은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와해될 터였다.
그러니 저 두 부자의 화합에 남맹의 흥망성쇠가 달린 셈이었다.
노기를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떨던 남궁벽이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여자를 위해 가문을 버리겠다고?”
“버리는 게 아니라 독립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니라면 뭐냐?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나는 너와 의절할 것이다.”
무림세가 앞에서 체면이 크게 상한 남궁벽은 아들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세웠다.
검왕의 입에서 의절 이야기가 나오자 대회의실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맹과 남궁세가가 대의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갈!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마라! 지금까지 남맹과 남궁세가에서 잔심부름만 해 온 놈이 무엇을 안다고! 나는 지금까지 대의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평생 협의지도(依義之道)를 걸어온 남궁벽은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말에 버럭버럭했다.
“동도인 호천맹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해 그들이 죽어 나가길 바라셨잖습니까! 조금 전에도 총사님은 저에게 ‘호천맹과 분쟁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거리를 두라’고 말했습니다. 남맹의 이익을 위해 호천맹과 싸우는 것이 어째서 대의입니까? 그러니 연이와 적하가 남맹을 떠나고, 남궁세가에도 발길을 끊은 거 아닙니까!”
남궁천이 연적하의 탈맹을 거론하자 남궁벽은 멈칫했다.
사실 연적하의 탈맹은 남맹의 치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보았다.
‘지금껏 진설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남맹과 남궁세가에 반발하는 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들의 기막힌 발언으로 인해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감정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순수함과 정직은 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파의 맹(盟)은 칠파일문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맹은 무림세가뿐 아니라 가입한 방파들의 보호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니 남맹이 호천맹과 대립하는 것이야말로 ‘작은 것을 버리고 더 큰 것으로 나아가기 위함[捨小就大]’이 아니냐?”
하지만 그런 부친의 말에 남궁천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건 염치를 모르는 자기 합리화입니다. 남맹과 호천맹이 왜 갈등하고 반목하는지 아십니까? 적하가 외부의 강적을 전부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적하가 없다면 남맹과 호천맹이 대립했겠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손잡고 적에 맞서 싸웠을 겁니다. 남맹과 호천맹은 마교와 유명교를 적하에게 떠넘기고, 눈을 잿밥으로 돌린 겁니다.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
남궁벽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아들은 지금껏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사실을 간파했다.
그런 아들 앞에서 ‘그래도 남맹이 대의다’라고 밀어붙일 정도의 뻔뻔함이 그에게는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한발 물러섰다.
“너와 진설하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이후로 호천맹의 일로 너와 진설하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와 진설하’라고 했지만 실은 진설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감히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간자로 몰아붙일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남궁벽이 사대세가 고수들에게 물었다.
“본 맹주의 결정에 이의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시오.”
그러자 사대세가 고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없습니다.”
사대세가로서는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검왕 부자(父子)가 불화를 일으키면 남맹이 주저앉을 상황인 까닭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더 이상 남궁천과 진설하의 일로 모이기를 원치 않았다.
손아랫사람인 남궁천이-눈치 없게-자꾸 치부를 들추어 대니 영 불편했던 것이다.
남궁벽이 산회(散會)를 선언하자, 천추각(千秋閣)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연적하는 뒤로 길게 드러누웠다.
구름이 짙게 끼어 달빛은 보이지 않았다.
남궁천에게 별문제가 없는지 살짝 보고 가려다 남맹의 회의를 듣고 말았다.
다른 건 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인데 남궁천의 말만은 놀라웠다.
-그건 염치를 모르는 자기 합리화입니다. 남맹과 호천맹이 왜 갈등하고 반목하는지 아십니까? 적하가 외부의 강적을 전부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적하가 없다면 남맹과 호천맹이 대립했겠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손잡고 적에 맞서 싸웠을 겁니다. 남맹과 호천맹은 마교와 유명교를 적하에게 떠넘기고, 눈을 잿밥으로 돌린 겁니다.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남맹과 호천맹의 갈등과 반목이 자신 때문이었다니!
그건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선의(善意)로 도와준 게 도리어 남맹과 호천맹에 독이 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단 한 번 들었을 뿐인데 남궁천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남맹과 호천맹을 실컷 욕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된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에혀!’
연적하는 속으로 장탄식을 터뜨렸다.
도와줘도 문제, 돕지 않아도 문제. 사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달이 구름을 벗어나자 연적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천의 일은 그냥저냥 해결된 것 같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남맹과 호천맹의 대립이다.
마교에 이어 유명교까지 정리되면 그들이 벌이던 암투는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호천맹과 남맹을 등에 업은 상방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군소 방파들 간의 세력 다툼도 치열해질 게다.
마교와 유명교로 인해 쇠락한 방파가 적지 않으니 그 공백을 두고 개싸움이 벌어지리라.
남맹과 호천맹이 세를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결국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건가.’
이제는 남맹과 호천맹이 왜 그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알 것도 같다.
무림종주(武林宗主)라는 ‘명예’뿐 아니라 그들의 생존까지도 걸려 있었다.
“쉽지 않아. 쉽지 않아.”
중얼거리던 연적하는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밤하늘로 훌쩍 날아올라 자리를 떠났다.
***
여강현 석경장.
안채.
늦은 밤.
연적하가 밤손님처럼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남궁연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어때?”
“누님 말대로 장인어른이 나서서 잘 마무리됐어요. 그런데…….”
“그런데?”
“천 형님이 장인어른께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남맹과 호천맹이 마교와 유명교를 나에게 떠넘기고, 잿밥으로 눈을 돌려서 싸우는 거라고. 누님도 내가 없었다면 남맹과 호천맹의 관계가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꽤나 축약된 말이지만 남궁연은 어렵지 않게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가 없었다면 남맹과 호천맹이 합력했을 거야. 그 대신 어마어마한 피를 흘렸겠지. 남맹과 호천맹의 분쟁은 네 책임이 아니야. 너는 마교와의 싸움에서 죽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줬어. 그걸 이권다툼으로 변질시킨 건 남맹과 호천맹의 수뇌부야.”
그녀의 말에 연적하의 표정이 비로소 밝아졌다.
“그렇죠? 내가 도운 게 잘못은 아니죠?”
“당연하지. 오라버니가 잿밥 운운한 것도 그래서일 거야. 그들이 정작 책임져야 할 제사는 외면하고, 이익을 두고 다툰다는 걸 비난한 거지.”
“누님 설명을 들으니까 머리가 좀 개운해지네요. 조금 전까지 모두가 내 책임인 것 같아서 좀 그랬거든요.”
피식 웃던 남궁연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유명교의 일은 생각해 봤니? 아직도 꺼려지는 이유를 모르겠어?”
“네. 그들이 죽으면 범천욕계로 되돌아갈 텐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곰곰 생각하던 남궁연이 물었다.
“마신이 죽을 때의 일 기억나니?”
“그걸 어떻게 잊어요.”
“마신이 원한 게 ‘자신의 죽음’이었다고 했지?”
“네, 그게 창조신의 뜻이라고도 했어요.”
“그리고 마신의 소원은 죽어서라도 범천욕계에서 벗어나는 거였고?”
“맞아요.”
“마신은 네 손에 죽으면 범천욕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믿었던 것 같아. 그렇지?”
“네. 설마……. 그런 건 아니겠죠?”
연적하가 황당한 눈으로 남궁연을 보았다.
자신의 손에 죽으면 범천욕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너는 아직 구천검령의 공능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마신을 죽인 게 구천검령이었지?”
“그렇기는 한데…….”
연적하가 자신 없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마신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구천검령이 의심스럽기는 했다.
“설마 금사와 천자마가 범천욕계가 아니라 현세에 환생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마신처럼 소멸할 수도 있고.”
그녀의 말에 연적하는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마신이라 불리던 메누아의 원신이 현세로 넘어왔음을 아는 까닭이다.
메누아처럼 금사와 천자마가 현세에 환생한다면, 그것은 대재앙이었다.
‘이런 제길. 그래서 그렇게 찜찜했나?’
자신의 대에서야 문제 될 게 없지만 후대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고민하는 그의 귓가로 남궁연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니 너무 고민하지 마. 그게 정 마음에 걸리면 구천검령을 쓰지 않으면 돼.”
“아, 그렇네요.”
말과 달리 연적하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구천검령 외에-현세에서 완전체가 된-금사와 천자마를 상대할 수단이 없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