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39
939회. 그림자는 물화(物化)에 불과했습니다
연적하가 취보문으로 다가가자 팔황신모가 조심조심 그와 보조를 맞췄다.
생각 없이 걷던 연적하가 팔황신모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른 건 둘째치고 교주가 자신에게 ‘연 대협’이라 부르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교주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하던데. 오늘 죽으려고 작정했나 봐요?”
그러자 팔황신모가-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제가 변한 게 느껴지신다면 저는 살 것 같은데요?”
계속된 팔황신모의 존대에 연적하는 멈춰 섰다.
“교주님. 솔직히 나는 교주님을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교주님이 벌인 극악한 일들은 용서가 안 되네요. 교주님이 갑자기 회심했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예요. 그 정도는 이해하죠?”
“역시 연 대협은 과거나 지금이나 자비로우시네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오랜만에 뵈어요, 연 대협. 저 천지맹 시절에 잠깐 같이 지냈던 청류신이에요.”
“교주님이 청류신이라고요? 장난하세요?”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팔황신모를 보았다.
풍지산에서 만났던 교주가 왜 자신을 청류신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기억 안 나세요? 그때 제 소천무령을 마령이라 하시며 깨뜨리셨잖아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나 본데…….”
“저에게 신모(神母)가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잊으신 건 아니죠?”
연적하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청류신은 천지맹 제마단 소속의 술사였다.
천문산의 일각마인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제마단 소속 술사들의 법보를 감정해 준 일이 있다.
그때 청류신이라는 여자가 방울을 자랑했는데 하필 그게 마령(魔疏)이었다.
사람을 제물로 만든 마령에 화가 나서 그녀에게 따져 물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줌마. 그 방울 누가 만들었어?
-저, 저도 신모에게 받은 거예요.
-신모?
-네, 선녀암의 전 주인이 제 신모거든요. 그분에게 물려받은 거예요.
-그 여자가 ‘물에 빠져 죽은 아이 영혼이 담겨 있다’고 한 거야?
-네…….
-그 방울은 사람을 제물로 만든 거야. 신모가 쓰레기였네. 아줌마, 운 좋은 줄 알아.
확실히 그녀는 신모가 있다고 했었다.
‘가만 선녀암이라고?’
물론 선녀암이라는 암자와 신당은 많으니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 신모가 설마 풍지산의 팔황신모였다고?”
“맞아요. 그때 연 대협이 제 소천무령을 깨뜨려서……. 저는 제마단에서 나가야 했어요. 그리고 신모가 계시는 풍지산의 선녀암으로 돌아갔다가……. 소천무령처럼 방울에 갇히게 되었답니다.”
청유신은 담담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오늘 새벽, 환혼신주를 외우던 팔황신모는 방울로 들어가고 제가 팔황신모의 몸을 차지하게 됐지요.”
말과 함께 청류신은 금황자를 꺼내 연적하에게 내밀었다.
“연 대협은 반신(半神)이시니 이 금황자에 팔황신모가 있다는 걸 아실 거예요.”
연적하는 방울과 자칭 청류신을 번갈아 보았다.
구주의 기괴한 술법을 경험한 그로서는 무조건 부인할 수도 없었다.
“줘 봐요.”
청류신은 공손히 금황자를 건넸다.
연적하는 세밀하게 방울의 안팎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무속인의 방울 묶음이었지만 그 속에서 기괴한 기운이 느껴졌다.
“팔황신모의 영혼을 불러내 자백하게 할 수도 있어요. 연 대협의 귀에 그 음성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것까지는 없어요. 방울에서 팔황신모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하네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갑자기 연적하가 손을 뻗어 자칭 청류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놀랄 법도 한데 청류신은 반항하지 않았다.
연적하는 청류신의 머리에 영기를 밀어 넣으며 언법(言法)을 펼쳤다.
“공야자와 청불노의 제자 연남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팔황신모의 육체에 깃든 너는 누구냐! 너의 혼에 새겨진 진명(眞名)을 말해라!”
“청류신입니다.”
“팔황신모의 혼은 어디에 있느냐?”
“제가 있던 금황자로 들어갔습니다.”
그제야 연적하는 영기를 거두고 청류신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허! 유명교주의 최후가 방울이라고?”
연적하가 무심코 방울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흔들렸음에도 방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청류신이 설명하듯 말했다.
“염매가 된 방울은 술사가 ‘육명진언’을 외워야 소리를 낼 수 있어요.”
“‘육명진언’요?”
“가르쳐 드릴까요?”
“됐어요.”
연적하는 바로 거절했다.
팔황신모와 소통하면 방울을 없애고도 오랫동안 싱숭생숭 할 것 같아서다.
그가 방울을 깨뜨리려 한다는 걸 알아차린 청류신이 급히 말했다.
“연 대협, 아직 방울을 부수지 마세요.”
“왜요?”
연적하가 청류신을 직시했다.
그녀가 팔황신모처럼 방울로 엉뚱한 짓을 하려는 거라면 바로 부술 심산이었다.
“천외이선의 분신을 현세로 부른 사람이 팔황신모예요. 그래서 완전체가 된 지금도 일정 거리 이상 팔황신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해요. 지금 방울을 부수면 천외이선이 자유를 얻게 되니 나중에 하세요.”
“금사가 그걸 알면서도 방울을 아줌마에게 줬다고요?”
연적하는 과거 청류신의 호칭을 기억해 내 그녀를 아줌마라 불렀다.
그건 지금의 팔황신모가 청류신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과도 같았다.
“천외이선이 연 대협을 안으로 모시라고 한 걸 보면 모르겠어요? 그들은 연 대협을 피할 생각이 없어요.”
“왜요? 그들은 ‘범천욕계왕재천’에서 내 손에 죽었었는데.”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오늘 새벽에야 방울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그건 사실이었다.
금사에게 청류신은 유명교주를 방울로 밀어 넣을 도구에 불과했다.
당연히 천외이선이 처한 상황을 그녀에게 알려 줄 이유가 없었다. 설사 일찌감치 방울에서 풀려났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대충 금사와 청류신의 관계를 짐작한 연적하는 방울을 갈무리했다.
자신의 증명을 끝낸 청류신은 무영전(武英殿)으로의 안내를 위해 한 걸음 앞서 나갔다.
***
무영전.
금사와 천자마는 마치 손님을 맞이하듯 무영전 앞에 나와 있었다.
그들을 본 청류신이 허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연 대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연적하는 천외이선과 오 장(약 15미터)여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여어!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금사와 천자마네. 상계보다 이곳이 더 맞나 봐? 얼굴색들이 아주 좋아졌는데?”
연적하의 말에 금사와 천자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계에서나 하계에서나 저 인간의 가벼움은 도무지 변함이 없다.
그런 저급한 바탕으로 어떻게 반신의 자리까지 올랐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금사가 가볍게 혀를 찼다.
“쯧! 도적 출신이라더니 입이 천박하구나. 대종사의 체통을 생각해라.”
“그런 건 모르겠고,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거야? 왜에?”
“너를 피할 수 없으니 기다린 것이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러자 금사가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우리가 바다 건너 다른 땅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하면 놓아줄 뜻이 있느냐?”
“그런 거 말고. 현세에서 윤회전생할 수 있다는 확신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뜻밖의 말에 금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핫! 현세에서 윤회전생이라니. 네가 왜 뜸을 들였는지 알겠다. 그것이 두려웠구나.”
“아냐? 아님 말고.”
“우리의 연법(緣法)에 현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이제 안심이 되느냐?”
연적하가 야릇한 눈으로 금사를 보았다.
금사나 천자마는 자신에게 그들의 일을 가르쳐 줄 위인들이 아니다.
그런데 왜 아낌없이 털어놓는 것일까?
‘하여간 찝찝한 것들이라니까.’
결국 입이 간질간질해진 연적하가 툭 던졌다.
“내가 당신들을 겪어봐서 아는데, 당신들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야. 팔황신모에게 한 짓만 봐도 알 수 있지. 원하는 게 뭐야?”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상계에서 이리로 온 것은 연법에 의해서였다. 연법이 우리를 다시 상계로 돌려보낼지 누가 알겠느냐?”
연적하는 금사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최소한 그건 맞는 말이었다.
‘설마 이것들 범천욕계왕재천으로 윤회전생하게 되는 건가?’
그들이 죽어 현세로 왔듯, 현세에서 죽으면 상계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금사가 말하는 연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나?’
천외이선이 현세에서 윤회전생 하든, 범천욕계왕재천로 돌아가든 오늘 저들은 죽을 것이다.
연적하는 허공에서 천둔검을 꺼냈다.
“당신들이 어디로 윤회전생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끝내자고. 아줌마는 멀리 빠져 있어. 괜히 근처에서 얼쩡대다가 죽지 말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류신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
일촉즉발의 순간 금사는 자신의 선지안(先知眼)을 발동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연법이 대체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금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금사가 옆에 있는 천자마에게 말했다.
“왕이시여, 그림자는 정말 물화(物化)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보고 좋아하다니, 너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렇게 말하는 천자마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우샤스 킨샤사가 선지안으로 그것을 보았다면 자신들은 더 위대해질 터였다.
넷째 하늘의 진체(眞體)로 연적하를 밟을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왕들의 하늘’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이봐! 그림자니 물화니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와. 안 오면 내가 간다?”
그러자 돌연 금사가 허공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이윽고 금사의 몸이 마치 허공에 녹아든 것처럼 사라졌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던 듯 천자마의 신형도 홀연히 사라졌다.
진경(眞景)으로 들어간 것이다.
연적하 역시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황궁에서 천외이선과 싸우는 것보다는 진경이 훨씬 마음 편했다.
진경 속의 세상은 파괴되어도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까닭이다.
연적하가 진경으로 들어가자마자 좌우편에서 하얗고 검은 강기가 몰아쳐 왔다.
하얀 것은 금사의 백은검강이고 검은 것은 천자마의 묵혼강기(墨魂罡氣)였다.
이미 범천욕계왕재천에서 경험한 바 있던 연적하는 경시하지 않고 뒤로 훌쩍 몸을 빼며 구천구검 오 식 산검멸지(散劍滅地)를 펼쳤다.
부챗살처럼 펼쳐져 날아간 검영과 백색과 흑색의 강기가 중간에서 충돌했다.
꽈르르릉-!
충돌을 중심으로 오십여 장(약 150미터)의 땅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 반동으로 연적하의 몸이 무려 십여 장(약 30미터)이나 뒤로 밀려났다.
연적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허! 현세에서 완전체가 됐다고 하더니 이전보다 강해졌구나!’
그러는 동안 흑백의 강기는 하나로 뭉쳐지더니 각각 은룡과 흑룡으로 변했다.
금사의 백은성광(白銀星光)과 천자마의 백천만겁(百千萬劫)이 만들어낸 조화였다.
연적하는 포라천지(包羅天地)의 수법으로 은룡과 흑룡을 막았지만, 은룡과 흑룡의 힘이 너무 강했다.
콰자자작-!
포라천지가 찢어지며 되돌아온 반탄력에 결국 천둔검마저 소멸하고 말았다.
‘쯧!’
과연 신좌의 힘은 다르다.
별수 없이 연적하는 구천검령을 불러 냈다.
뒤이어 은룡과 흑룡의 머리 위로 거대한 두 개의 구천검령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