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68
968회.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
합비.
남궁세가 안채.
오시 초(오전 11시).
대청마루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왕 남궁벽과 남맹 총사 반천일검 모용문이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모용문이 굳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어젯밤 창비문이 호천맹의 급습으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칠파이문 제자들도 대거 관여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호천맹의 복수가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말을 재밌게 하는군. 그건 남맹과 호천맹의 전쟁일 뿐이오.”
“…….”
모용문은 굳이 남궁벽과 말싸움을 하지 않았다.
창비문의 일은 누가 봐도 정원현에서 검왕에게 당한 것의 복수였다.
하지만 검왕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 모두가 남맹과 호천맹의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니까.
“아침에 호천맹을 찾으라고 추격대를 보냈습니다. 규모와 동선이라도 알아 두려고요.”
“정양을 마치는 대로…….”
모용문이 검왕의 말을 끊었다.
“무극상인과 싸우러 가셔야겠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맹주께서 천하십대고수 셋을 잡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창비문의 일을 겪으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면 뭐요?”
“그들이 맹주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하십대고수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이제 와서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없겠지요?”
“천하십대고수 이전에 무인과 무인의 약속이오. 이미 한차례 검을 나누었는데 어떻게 없던 일로 하겠소.”
모용문이 착잡한 눈으로 검왕을 보았다.
상황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다.
결과적으로 남맹 최고수이자 맹주인 그가 천하십대고수들과 따로 놀고 있는 형국이니 복장이 뒤집힐 노릇이다.
정신없이 얻어맞는 상황에 놓이니 검왕의 부재가 새삼 뼈아프다.
검왕이 이 난국을 이끌어 갈 수 없다면 다른 수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말씀인데, 일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일전이라면 언제를 말하는 거요?”
검왕이 짐작도 못 하고 있자 모용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남천 대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를 만나 남경에서 호천맹이 손을 떼게 해 주십시오.”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그를 만나겠다고 한 기억은 없소만.”
“그게 아니라면 천하십대고수들과의 비무를 중지하시고, 남맹으로 복귀해 주시든지요. 맹주께서 선봉에 서면 어차피 그들과는 남경에서 맞부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비무를 합비가 아니라 남경에서 한다 생각하십시오.”
“그건 곤란하오.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수는 없지.”
“맹주님의 그 자존심 때문에 남맹이 망하는 걸 지켜보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모용문이 도발적으로 검왕을 쳐다보았다.
사실 남맹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검왕이 선봉에 서거나, 남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려면 검왕이 자존심을 꺾어야 한다.
천하십대고수들에게든, 남천에게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건 검왕이니까.
“반천일검 모용문. 격세지감이 들게 말을 하는군.”
“그렇게 느끼셨다면 송구합니다. 그러나 맹주님이 아니라면 남천 대협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남경을 지켜 낼 수 있습니다. 맹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
남궁벽은 부인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가 난처한 것과 별개로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오.”
물론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누가 등이라도 떠밀어 주지 않으면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남천 대협께 도움을 청해 주십시오.”
“후우!”
남궁벽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존심?
까짓것 잠시 접어 둘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소득이 없을 때다.
언제 연적하가 자신의 말을 들었냐 말이다.
“그는 스스로 내키지 않으면 누가 뭐래도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을 사람이오. 지금까지 누차 봐 오지 않았소?”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남천 대협이 무림의 일에서 손을 뗐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허면 이전에는?”
“스스로가 옳다고 믿은 길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 손을 놓아 버린 걸 테고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테니 내 말을 들어줄 것이다?”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기에 맹주님의 부탁을 거절했지요. 그러나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지금은……. 호천맹이 뭐라 해도 혈족의 손을 들어 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드시겠지만 그와의 인연을 되살리셔야 합니다.”
“단지 청을 하는 게 아니라……. 의절까지도 철회하라?”
“혈족이 아니라면 그가 욕을 먹어 가며 남맹의 편에 서 주겠습니까? 설마 맹주님께서는 의절과 부탁을 별개로 생각하고 계셨던 겁니까?”
“나는 일평생 한 입으로 두말을 한 적이 없소.”
“그래도 이번에는 의절을 철회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남천 대협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모용문이 기이한 눈으로 검왕을 보았다.
그가 의절과 부탁을 분리할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일 줄은 몰랐다.
‘쯧! 처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없다는 게 이렇게 무섭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던 남궁벽이 말했다.
“남맹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총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겠소. 생각해 보리다.”
또다시 검왕은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창비문의 멸문을 본 모용문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해 주십시오. 남천 대협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천을 찾다니? 석경장을 나갔다는 것이오?”
“며칠 전 석경장에서 이두마차 두 대를 구매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최근 석경장에서 반입하는 식재료가 평소의 일 할대(약 10%)로 떨어졌습니다. 식솔들과 함께 천하를 주유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
“희수현에서 남천 대협이 목격되었다고 하는 걸 보면 목적지가 무한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한?”
“무한에 그의 의형제인 오봉십걸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 관계의 폭이 좁은 연적하를 생각하면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맹주님. 남경을 잃으면 남직례성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
남궁벽도 더는 빼지 않았다.
연적하가 석경장에 있다면 모를까?
그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다.
“알겠소. 대의를 위해서 사사로운 감정을 접어 두리다. 남천에게 보낼 서신을 준비할 테니……. 오후에 다시 들러 주시오.”
순간 모용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가 연적하를 적인 것처럼 묘사했지만 남궁벽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상처 입은 자존심이 덜 아픈 까닭이다.
***
황강.
단풍현.
정오 무렵.
이두마차 두 대가 양자강 강변에 도착했다.
이윽고 두 대의 마차에서 석경장 식솔들이 내렸다.
지안이 강가로 뛰어가자 새끼 백호와 월아, 금아가 그 뒤를 따랐다.
사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연적하에게 심통이 다가갔다.
“공자님, 양자강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배로 강을 건널까요? 아니면 무한까지 배를 타고 갈까요?”
“음, 어떤 게 나으려나. 누님? 누님 생각은 어때요?”
“배를 타고 무한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마차야 앞으로도 계속 탈 테지만 배는 그렇지 않으니까.”
“배가 좁아서 지안이 답답하다고 하지 않을까요?”
“훗! 마차만큼 좁겠어? 마차에 비하면 마당이지.”
“아! 그러네요. 그럼 무한까지 가는 배를 구해야겠네요. 심 노인, 들었지? 우리 마차가 실릴 만큼 큰 배를 찾아봐.”
“알겠습니다.”
그러자 당운망도 끼어들었다.
“장주님. 저도 심가와 함께 배를 물색해 보러 가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그럼, 저도 선착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심가야, 뭐하느냐? 가자.”
심통은 ―비록 귀찮다는 얼굴이었지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심통과 당운망을 보며 남궁연이 말했다.
“청류신이 죽은 뒤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진 것 같지?”
“그러네요. 이전 같았으면 심 노인이 펄쩍 뛰었을 텐데.”
“세 사람이 좋은 친구였던 것 같아.”
“청류신이 늙어 죽는 걸 보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지도 모르죠. 우리도 저렇게 죽겠구나 하고.”
“후훗! 너는 어쩜 생각을 그런 식으로 하니?”
“제가 심 노인과 당 노인을 너무 잘 알아서 그래요.”
“좋은 친구였을 거야. 그러니 남아 있는 둘이 애틋해진 걸 테지.”
“그렇다면 청류신이 좋은 일 하고 갔네요. 처음에는 괜히 떠맡았나 후회도 많이 했는데.”
“후회를 했어?”
“아는 사람이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게 보고 싶지 않다고 안 볼 수 있나.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는데.”
“그래도 나는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너는 반신(半神)이라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될걸?”
“에이, 설마…….”
“후후. 농담이야. 무위와 하늘이 내린 수명은 또 다른 거니까.”
그제야 연적하의 구겨졌던 표정이 펴졌다.
남궁연이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위와 수명은 다르다지만, 반신은 어떨까?
왠지 그의 수명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 같지만, 연적하가 질색을 하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금방 돌아올 것 같았던 심통과 당운망은 점심 시간을 훨씬 넘긴 신시 초(오후 3시)에 돌아왔다.
강둑에 앉아 남궁연과 지안, 백호, 월아, 금아의 물놀이를 물끄러미 보는 연적하에게 심통이 다가갔다.
“공자님.”
“어, 늦었네? 배는?”
“마차 두 대를 실을 정도로 큰 배는 하루 두 번 들어오는데, 오늘은 벌써 다 갔답니다. 내일 아침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아침에 타면 되겠네.”
“그런데 혼자 뭐 하고 계십니까?”
“지안이 노는 거 구경하잖아.”
“함께 놀지 않고 혼자서 청승맞게 뭐 하시는 겁니까?”
“이런 게 노는 거지. 저 봐, 지안이가 나를 보면서 손을 흔들잖아. 이렇게 보이는 곳에 있으면 된다고.”
연적하가 환하게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하아! 공자님이 지금 하고 있는 건 관리나 감독입니다. 놀아 주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처자식도 없는 심 노인이 뭘 안다고 그래?”
“처자식은 없지만 그래도 보는 눈은 있습니다. 얼른 내려가서 지안이와 애들에게 물도 좀 뿌려 주고 그러십시오.”
“그러면 애들이 싫어해.”
“가모님이 그러니까 좋다고 꺅꺅대는 거 안 보입니까?”
“누님이 하니까 좋아하는 거야.”
“공자님이 해 주면 더 좋아할 겁니다. 어서 가 보십쇼.”
심통이 연적하의 등을 떠밀었다.
그의 등쌀에 연적하는 마지못해 강가로 내려갔다.
심통은 아이들의 곁으로 다가간 연적하가 힐끔 돌아보자 손으로 뭔가를 퍼 올리는 시늉을 했다.
‘물을 뿌려! 뿌리라고!’
머뭇거리던 연적하가 지안에게 슬쩍 물을 뿌리자, 지안과 아이들이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꺄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강변에 널리 퍼졌다.
연적하를 보는 심통의 얼굴에 할아버지 미소가 떠올랐다.
당운망이 그런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고 있느냐?”
“말해 줘도 너는 모른다.”
“쯧쯧! 석경장의 장주님이 채신머리 없게 저러면 안 되는데……. 나라도 가서 말려야 하나.”
심통이 당운망을 힐끔 보았다.
이 정도로 눈치 없는 놈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걸 보면 당가에 대한 소문도 과장된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