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69
969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뿐이다
심통의 옆에서 강가를 내려다보던 당운망이 중얼거렸다.
“장주님이 원래 물을 좋아하시나?”
“그렇게 보이느냐?”
“아이들보다 물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해 본 말이다.”
“물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처음 놀아 봐서 그러시는 걸 게다.”
“처음 놀다니? 장주님에게 배다른 형제가 있지 않느냐?”
“그 배다른 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여섯 살 때 창고에 갇혀 그 뒤로 쭈욱 혼자 지내셨다.”
“언제까지?”
“십 년.”
“허! 그 뒤로 어찌 되었고?”
“창고를 탈출해서 떠돌다가 오봉산에 정착하셨지. 그때부터 녹림의 일원이 되셨고.”
“아! 그때 오봉십걸이 만들어진 게로군?”
“맞다.”
“허면 오봉산에서 스승을 모시게 된 것이냐?”
“흥! 오봉산에 그런 고수가 있을 것 같으냐? 공자님은 그때 이미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 말에 당운망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적하의 나이가 이제 스물일곱.
심통은 장주가 십육 세에 창고를 탈출해 그 뒤로 오봉산에서 지냈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미 천하십대고수의 경지였다면 그런 고절한 무공은 대체 언제, 누가 가르쳤단 말인가?
“그 전까지 창고에 갇혀 지내셨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지. 창고에 갇혀 지내실 때 구천현녀를 만나 무공을 전수받았다고 하셨다.”
“구천현녀가 창고를 찾아갔다고?”
“그야 모르지. 신선들의 일을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찌 알겠느냐?”
“허! 송강(수호전의 등장 인물)에게 세 권의 천서(天書)를 내려 줬다고 하더니……. 우리 장주님에게는 무공을 가르쳐 준 모양이로군.”
“뭐 그런 셈이지.”
“기연을 만나셨네. 창고에서 갇혀 지낸 세월의 보상인가.”
“어릴 때는 배다른 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창고를 탈출해 떠돌아다닐 때는 아이들에게 돌로 맞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을 멀리하셨지.”
“아하!”
당운망은 그제야 심통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물놀이를 하는 연적하의 얼굴은 지안, 월아, 금아처럼 천진난만해 보였다.
당운망이 풀 위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말했다.
“좋은 시절이야. 그렇지 않나?”
“좋기는 개뿔. 묫자리 보러 다녀야 할 나이에.”
당운망은 뭐가 웃긴지 킬킬거렸다.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심통도 그 웃음에 전염됐는지 푸들 푸들 웃었다.
다음 날 아침.
석경장 식솔들은 무한으로 가는 대형 목선에 올랐다.
이두마차 두 대를 본 선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끔거렸다.
그들 중에 몇은 고관대작의 가족인가 보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전날 물놀이를 한 뒤로 연적하는 지안, 월아, 금아와 잘 어울렸다.
오전 내내 갑판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던 연적하가 슬그머니 뱃전으로 빠져나왔다.
뱃전에서 당운망과 여유롭게 강바람을 쐬던 심통이 전망 좋은 자리를 내어 주며 말했다.
“반나절 만에 얼굴이 핼쑥해지셨습니다?”
“애들이랑 놀아 봐. 지친다.”
“그래도 갈고닦은 공력이 있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니고요?”
“심 노인. 애들이랑 안 놀아 봤지?”
“소싯적에는 저도 좀 놀아 봤습니다.”
“지금 해 봐. 나니까 이 정도지 심 노인은 쓰러질걸?”
“에이, 아무렴요.”
“내가 없는 소리 할 사람이야?”
연적하가 정색을 했다.
지안과 월아, 금아는 무슨 영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쉬지를 않았다.
그나마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 괜찮다.
재미가 없는데 억지로 자리를 지키려니 죽을 맛이었다.
지안이 웃는 얼굴을 보겠다고 버텼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함께 있던 남궁연이 요령 있게 빼 주지 않았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하시지 뭘 그렇게 한번에 끝장을 보려고 하십니까?”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그러지.”
가만히 듣고 있던 당운망이 끼어들었다.
“장주님. 무한에 도착하려면 아직 이삼일은 더 가야 합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너무 무리하지 마십쇼.”
황강에서 무한까지는 뱃길로 약 이백 리(약 80킬로미터).
그의 생각에 아직 뱃놀이를 할 시간은 충분했다.
순간 연적하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오늘만 날이 아니라는 말은 틀렸다.
오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 오늘만 날이다.
특히나 자신처럼 먼 길을 가야 할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당 노인.”
“예?”
“내일을 기약하는 것만큼 허망한 것도 없어. 내일은 우리 게 아니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라고.”
“…….”
당운망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생전 안 그러던 분이 왜 갑자기 공자님 같은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다.
심통도 같은 생각인지 한마디 했다.
“공자님. 누가 뭐래도 앞으로 이틀은 더 배에 머물러야 합니다. 지금뿐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요. 흐흐.”
단순한 심통의 말장난에 연적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심오한 말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그때 근처에 있던 삼십 대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하! 소형제의 말이 맞네. 내일은 우리 게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나도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네. 정 소저 생각은 어떻소?”
사내의 물음에 그와 나란히 서 있던 이십 대 미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뭘 아나요. 한림원 학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게 맞겠지요.”
미녀, 정은소가 사내를 슬쩍 띄워 주었다.
한림원 학사는 최고의 지식인으로 만민의 존경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수(船首)에서 강바람을 쐬던 선객들의 시선이 사내를 향했다.
그러자 사내, 송겸이 계면쩍은 얼굴로 혀를 찼다.
“쯧! 그러지 마시라니까. 소형제, 말이 나온 김에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송겸이라 하오. 그리고 이쪽은…….”
송겸이 여자를 돌아보자 정은소가 얼른 나섰다.
“저는 정은소라고 해요.”
그녀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자 송겸이 복수라도 하듯 설명을 곁들였다.
“무한 제일의 표국으로 알려진 삼보표국 국주님의 고명딸이시지요.”
주변에서 구경하던 선객들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 나왔다.
정은소가 송겸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자 송겸이 얼른 말을 돌렸다.
“소형제는 어느 집안의 자제신가?”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청년을 왕족이거나 고관대작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두마차 두 대와 천하절색의 여자, 그리고 일행인 노인 둘의 공대를 보면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집안이라고 내세울 건 없어요. 오래전에 폭삭 망했거든요.”
“아! 그러면 자수성가를 했나 보군?”
“예.”
송겸의 자연스러운 하대를 연적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심통이나 당운망도 딱히 송겸의 태도에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적하가 본래 그런 사람임을 아는 까닭이다.
“허면 부친이 관직에 진출하셨나?”
“전혀요. 내가 어릴 때 두 분 다 돌아가셔서.”
“그럼, 설마 자수성가한 사람이 소형제란 말인가?”
“뭐, 비슷하네요.”
“오오! 소형제는 나이가 어떻게 되나?”
“스물일곱요.”
“아직 젊은데 정말 대단하군.”
연적하가 의아한 눈으로 송겸을 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송겸이 뭘 보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다.
“이두마차 두 대와 노인들과의 관계를 보고 소형제를 고관대작의 자제라고 생각했네. 그런데 소형제가 직접 일군 것이라니 존경스럽군.”
“에이, 존경은요 무슨.”
연적하가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한림원 학사가 존경한다니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름이 뭔가?”
“연남천요.”
연적하는 별호를 댔지만 송겸은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연남천이라. 아주 굉장한 이름이로군. 강호에도 ‘남천’이라는 별호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연적하가 ‘뭐 어쩌라고?’라는 얼굴로 빤히 보자 송겸은 호탕하게 말을 이었다.
“소형제라고 ‘남천’만큼 성공하지 말하는 법은 없지. 안 그런가?”
“그렇죠.”
“솔직히 우형은 조금 전 자네가 한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뿐이다. 그건 정말…… 평소의 내 소신과도 같은 것이었다네.”
그러자 정은소가 딴지를 걸었다.
“그래서 한량 소리를 듣고 계시기도 하죠. 학문을 그렇게 했으면 내각대학사가 되실 텐데 말이죠.”
“정 소저. 내가 학문에만 매진했으면 정 소저도 못 만났소. 설마 나와 알게 된 걸 후회하시오?”
“그럴 리가요. 저는 뛰어나신 분이 한량 소리를 듣는 게 안타까워서…….”
“그 덕에 정 소저와 알게 되고, 오늘은 또 마음이 통하는 소형제도 사귀게 되지 않았소? 이런 건 책상머리에서는 알기 어려운 것들이라오.”
“…….”
정은소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다른 학사들처럼 한림원에 처박혀 있었으면 자신도 그를 알지 못했을 터였다.
문득 송겸이 물었다.
“연 형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객점과 주루 등의 사업장 여러 개를 운영하고 있어요.”
“캬하! 정말 부럽군. 부러워. 앞으로의 꿈은 뭐고?”
“식솔들과 잘 먹고 잘 살자?”
“훌륭하군. 연 형제는 벌써 그 꿈을 거지반 이루었겠지? 나는 아직 일보도 떼지 못했는데 말이야. 연 형제가 객점과 주루의 주인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남 같지가 않아.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 보세. 어떤가?”
“괜찮네요.”
순간 정은소가 고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봐요. 무슨 반응이 그래요? ‘황송합니다’ 하고 받아들여도 시원치 않은데, ‘괜찮네요’가 뭐예요?”
“혹시 그쪽은 송 형이 한림원 학사라서 함께 다니는 거예요?”
“뭐라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황송합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돼요?”
“그, 그건…….”
뭐라 반박하려는 정은소의 말을 송겸이 막았다.
“됐소. 연 형제의 말이 맞소. 한림원 학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정 소저의 마음은 알지만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 주시오.”
정은소는 입술을 삐죽이며 한발 물러났다.
그를 위해 나섰다가 괜히 미움만 사게 생겼다.
연적하도 정은소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아는 터라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송겸과 연적하는 오랫동안 자신들이 평소 품고 있던 다양한 생각들을 나누었다.
제법 뜻이 통했던지 두 사람의 입에서 호형호제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
남직례성.
합비.
남맹 총사부.
“오늘 아침 구강에서 무한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고 합니다. 한채연과 하소백의 집이 소호 인근이니 강한항에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맹주님의 서신은 한채연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도착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용각의 보고에 반천일검 모용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무한이었다.
“편지가 늦게 도착하면 안 돼. 남천은 개봉으로 갈 텐데……. 그러는 동안 우리 쪽의 피해만 늘어나게 된다.”
“발이 가장 빠른 자에게 맡겼으니 제때 도착할 겁니다.”
“호천맹은?”
“아직 꼬리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창비문에서 남경까지 사백오십 리(약 180킬로미터)니 늦어도 사나흘 안에 도착할 게다. 지날 만한 길목에 사람들을 배치해 두어라.”
“예.”
“호천맹……. 맹주님이 남천을 회유하는 데 성공하면 이문사방은 우리 손에 떨어질 것이다.”
“선우세가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문이나 사방을 달라고 하더군. 하지만 그들에게 이방을 주고, 남맹에서 이문이방을 관리할 생각이다.”
“차이가 큰데 선우담 가주께서 받아들이겠습니까?”
“본래 무극문이 관리하던 곳이다. 선우세가에는 감당할 여력이 없다. 욕심을 앞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선우세가의 배를 불려 주자고 호천맹과 싸운 줄 아느냐?”
모용문이 어림없다는 얼굴로 모용각을 보았다.
남맹의 총사 이전에 모용세가의 가주인 그는 선우세가를 키워 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