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70
970회. 밤이 길면 꿈도 많다
양자강을 떠가는 거대한 목선.
단조로운 선상 생활이 지겨워진 연적하가 지나던 선원에게 물었다.
“무한은 멀었어요?”
“하하! 웬걸요. 조금 전에 무한의 경계로 들어왔습니다. 강한항이라고 하셨지요?”
“예.”
“늦어도 내일 점심이면 강한항에 도착할 겁니다.”
“아, 그래요?”
연적하가 반색을 했다.
언제 무한에 도착하나 했는데 벌써 무한이란다.
한채연의 집이 소호 인근이라 강한항에서 내려야 한다던가.
한림학사 송겸이 슬쩍 물었다.
“아우도 강한항으로 가나? 우리도 강한항에서 내릴 건데. 강한항에서 어디로 가는가?”
“그래요? 저는 동생 집이 소호 인근이라……. 물어물어 가 보는 중이에요.”
“그래? 급한 일이 아니면 강한항의 삼보표국에 들렀다가 가는 건 어떤가?”
“삼보표국요?”
“나도 표국주님의 회갑연이라고 해서 겸사겸사 가는 거거든.”
“정 소저 때문에 인사를 가는 건 아니고요?”
연적하가 실실 웃으며 송겸을 보았다.
송겸은 부인하지 않고 뻘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런 것도 있고. 표국주님이 문보다 무를 숭상한다는 말을 들어서. 여차하면 아우를 핑계로 빠져나오려고. 그러니 좀 도와줘.”
“왜 문보다 무를 떠받든대요?”
연적하는 무인이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도 사람 차별인 까닭이다.
“표국이다 보니 붓보다 칼을 앞세울 일이 많아서겠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무시당하면서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지는 않거든.”
“힘쓸 일이 뭐 얼마나 있다고 그런대요? 유명한 표국이라면서요? 그럼 힘쓸 표두도 많겠구먼.”
“세상살이라는 게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힘쓸 일이 생기는 법이잖나. 나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우 같으면 좋겠어.”
송겸은 무림인이 들으면 뒤집어질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연적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삼보표국이 강한항에 있다면 잠시 들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어차피 강한항에 있으면 뭐. 덕분에 한 끼 거하게 얻어먹겠네요?”
“고맙네. 내가 아우 하나는 잘 뒀어. 그런데 여동생이 소호 인근에 살고 있다고?”
“예.”
“안 좋은 일로 찾아가는 건 아니겠지?”
“전혀요. 그냥 오랜만에 조카 얼굴이나 보러 가는 거예요. 우리 지안이도 보여 줄 겸.”
“지안이는 아우의 딸?”
“예. 엄마를 닮아서 예쁘죠?”
“말이라고 하나! 남자 여럿 울릴 상이야. 그럼, 십 대의 여아 둘은 누구고?”
“함께 다니는 심 노인의 제자예요. 저기 염소수염을 한 노인이 심 노인. 그 옆이 당 노인.”
“아하!”
송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대충 아우 일행에 대해 알 것 같았다.
그때 정은소가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나누세요?”
“아. 정 소저. 아우의 목적지도 강한항이라길래 내가 삼보표국으로 초대했소. 잔칫집에 손님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괜찮겠소?”
정은소가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그럼요. 송 대인이 지인을 초대하셨는데 제가 반대하면 되나요.”
“거 대인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시네.”
“그러시는 송 대인도 저를 정 소저라고 하시잖아요.”
송겸이 멋쩍은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둔한 연적하도 단번에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한림원 학사인 송겸이 호칭을 편하게 하지 않으니 정은소가 ‘대인’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형님. 여기까지 왔으면 정 소저를 편하게 부르세요. 내일 표국에 가서도 ‘소저’, ‘대인’ 하면 표국주님이 이상하게 생각할걸요?”
“그, 그런가? 내가 그런 쪽으로는 좀 쑥맥이라…….”
“그건 쑥맥이 아니라 우유부단한 거예요. 맺고 끊는 걸 확실하게 해 줘야 주변 사람이 헷갈리지 않는다고요.”
연적하를 못마땅해 하던 정은소도 한마디 거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연 소협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더는 물러설 곳이 없게 되자 송겸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 정 매. 그러니까 정 매도 대인이라고 하지 마.”
“풋! 그럴게요. 그런데 연 소협 일행은 강한항에 무슨 일로 가는 거예요?”
정은소는 처음으로 연적하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의 도움을 받았으니 작게나마 보답하고 싶어서다.
송겸이 연적하를 대신해 나섰다.
“아우의 여동생이 소호 인근에 산다는구나. 간만에 조카 얼굴을 보러 간단다.”
“아하! 혹시 동생네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삼보표국으로 알리라고 하세요. 한 번은 도와 줄게요.”
그녀는 ‘한 번은’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걸 빌미로 삼보표국에 달라붙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다.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찬 게 누군지 모르겠다.
송겸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뭐라 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삼보표국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아우, 혹시 여동생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게 연락해. 힘이 닿는 데까지는 도와줄 테니까. 한림원 학사라고 무시하면 안 돼. 이래 봬도 현령에게 공평한 일처리를 주문할 수는 있다고.”
“어이쿠! 오라버니. 현령에게까지 올라갈 일이면 이미 엄청 대단한 사건이거든요? 그 정도 사안이면 삼보표국도 별 도움이 못 돼요.”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그의 말에 연적하는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형님 마음 잘 받았습니다. 형님도 힘든 일 생기면 말씀하세요. 내가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줄게요.”
“괜찮아. 한림원 학사에게 힘들 일이 뭐가 있다고. 책 읽는 게 일인 사람들인데. 책을 대신 읽어 주는 거라면 모를까.”
“어이쿠! 형님. 책은 사양이에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책과는 좀 거리가 있어서…….”
연적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은근 소외됐다고 느낀 정은소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책과 거리가 있으면 무공은 할 줄 알아요?”
“정 소저. 내가 칼은 좀 씁니다.”
“아, 네에. 그런 분이 빈손으로 다니시네요?”
“심 노인과 당 노인이 내가 힘쓸 틈을 주질 않아서요.”
“이왕 호위를 쓰려면 젊은 사람으로 하지. 저 두 분은 은퇴할 때가 지나지 않았나요?”
“사실 내가 집 밖으로 나다니질 않아서 호위는 없어도 돼요. 이번 여행이 아주 특별한 거예요.”
연적하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정은소도 더는 타박하지 않았다.
그때 갑판으로 ‘꺄아아!’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지안과 월아, 금아였다.
이윽고 언제나처럼 경국지색의 미녀가 따라 나왔다.
정은소는 미녀를 한번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연남천과 같은 장사꾼이 어디서 저런 미녀를 얻었는지 모르겠다.
‘조상을 잘 둔 건가…….’
***
남경.
임하촌.
해거름 무렵, 삼백여 명의 무인들이 마을 어귀로 들어왔다.
육파일문을 중심으로 하는 호천맹의 이 차 지원부대다.
무인 수백 명의 등장에 깜짝 놀란 촌장은 마을 원로들과 함께 무인들을 찾아갔다.
“나으리, 저희 임하촌은 조상 대대로 양자강에서…….”
총대주인 화산파 도산 진인이 촌장의 말을 끊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떠는 것으로 보아 자신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촌장. 우리는 이 마을에 볼일이 없소. 날이 밝는 대로 강을 건너갈 것이오. 촌장이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하나요. 삯을 지불할 테니 배를 주선해 주시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겠소?”
창비문에서 살겁을 저지른 뒤라 도산 진인의 말투는 딱딱했다.
촌장은 살기 충만한 무인들의 모습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인근에 있는 배를 죄다 물색해 놓겠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 강을 건널 터이니 맞춰 주시오.”
“예, 그런데 식사는 어떻게……. 저희 마을에는 객점이나 반점이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원하신다면 저희가 식사를 대접할 수는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리다. 오늘 밤 이슬을 피하게 빈집이나 몇 채 내어 주었으면 하는데. 물론 삯은 지불하겠소. 가능하오?”
“예, 한 식경(약 30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알겠소. 한 식경 후에 봅시다.”
그가 말을 끝내자 촌장과 원로들은 머리를 조아려 보이고 물러났다.
문득 천명대 대주인 청성파의 금양 진인이 말했다.
“총대주님, 강을 건너기만 하면 남경의 중심부인데……. 남맹의 반격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맹주님과 무상도제, 의천검존께서 검왕을 잡아 두고 있으니 그런 게 아니겠소. 저들도 오대세가로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 테니까.”
호천대 대주 철아함이 슬쩍 끼어들었다.
“검왕 한 사람에게 천하십대고수 세 분이면 우리 쪽에서 손해가 아닙니까?”
하지만 도산 진인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검왕이 응하지 않았을 게요. 지략이 뛰어난 검왕을 잡아 두려면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 하오.”
“응하지 않아도 호천맹이 유리하지 않습니까?”
“네 사람이 따로 만나면 비무로 끝나지만, 남경에서 부딪치면 생사결을 해야 하기 때문이오.”
“…….”
바로 알아듣지 못해 눈을 끔뻑이는 철아함에게 금양 진인이 설명하듯 말했다.
“남궁천의 일로 소림사는 봉문을 했소. 그런데 검왕에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남천이 가만히 있겠소? 앞뒤 안 가리는 그의 성정이라면 호천맹을 없애 버릴 수도 있소. 그래도 우리가 손해라고 생각하시오?”
“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철아함은 칠파이문의 지혜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과연! 무림의 종주들다운 안목이구나.’
당장 눈앞의 유불리가 아니라 더 먼 곳까지 내다보고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칠파이문의 노련함이 존경스러우면서 한편으로 두려웠다.
잠시 후 촌장이 돌아와 빈집 열 채를 소개했다.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라 도산 진인도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여기서 괜히 인심을 잃으면 그들이 남맹에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천명대의 절반인 백여 명이 빈집에서 묵고, 나머지 백여 명은 호천대와 함께 노숙을 했다.
다음 날.
무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촌장과 원로들은 인근의 배를 모두 끌어왔고, 덕분에 호천맹 무사들은 한 시진(2시간) 만에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과거 호천맹의 일 차 지원부대가 양자강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간 걸 생각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순조로운 상황이다.
남경의 중심부에 도착한 이 차 지원부대는 보란 듯 보무도 당당하게 무극문으로 전진했다.
양자강을 건너기 전까지가 위태로웠지 막상 남경의 중심부는 평화로웠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선우세가와 무극문이 직접적인 충돌을 지양한 덕분이다.
거리에서 남맹에 속한 무인들이 호천맹의 이 차 지원부대를 보았지만,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한 시진 후 호천맹의 이 차 지원부대는 무극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극문.
객청.
정오 무렵.
마침내 무극문 문주 천공도 장학과 이 차 지원부대 총대주 도산 진인, 천명대주 금양 진인, 호천대주 철아함이 한자리에 모였다.
“선우세가 무인이 백여 명, 그들을 돕고 있는 남맹 소속 남경 무인이 사백여 명입니다. 남맹에서 남직례성의 무인들을 모으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겁니다. 지금까지 선우세가와의 충돌을 피한 이유는 양측의 비등한 전력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 영웅들께서 오셨으니, 남맹에서 헛된 희망을 품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이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말을 마친 장학은 총대주와 두 대주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까닭이다.
총대주인 도산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옛말에 ‘밤이 길면 꿈도 많다[夜長夢多]’ 했소. 검왕이 남경에 미련을 버리게 만들어 줍시다.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의 시비도 없을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