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71
971회. 저런 건 못 참지
무한.
강한항.
정오 무렵.
거대한 목선이 선착장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선원들이 밧줄로 목선을 선착장에 고정한 뒤, 널빤지로 목선과 선착장을 연결했다.
곧이어 선객들이 줄지어 배에서 내렸다.
선착장에 내려선 연적하가 정은소에게 물었다.
“정 소저, 삼보표국이 여기서 먼가요?”
“왜요?”
“마차를 여기다 두고 가든지, 타고 가든지 해야 돼서요.”
“음, 멀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차를 이용하는 게 나을 거예요.”
“그래요? 그럼 마차에 자리가 좀 남으니 두 분도 함께 가시죠?”
“그러는 게 좋겠네요.”
정은소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회갑연에 초대했으니 함께 움직이는 게 나은 까닭이다.
그렇게 해서 송겸과 정은소는 월아, 금아의 마차에 타게 됐다.
심통과 당운망은 두 사람을 위해 마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송겸과 나란히 앉은 정은소는 맞은편의 두 소녀를 자세히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평범한 미모가 아니다.
저런 소녀들이 어쩌다 염소수염 노인의 제자가 됐는지 모르겠다.
마차 한쪽에 천으로 씌워진 것은 척 봐도 금(琴)이다.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모의 소녀들과 금과 염소수염 노인은 도무지 연관이 없어 보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정은소가 지나가듯 물었다.
“심 노인이라는 분의 제자들이라지?”
“네.”
월아가 짧게 답했다.
사실 월아와 금아는 정은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조(師祖)인 연적하에게 함부로 대하는 걸 몇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저건 금 같은데 그것도 심 노인에게 배운 거니?”
이번에는 금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금은 어릴 때 금 선생에게 배웠어요.”
금아는 과거 낙양 금와상방 행수의 딸이었다. 훗날 도둑 누명을 쓴 행수가 옥사한 뒤 기루를 전전했지만 말이다.
그에 반해 월아는 기루에서 금을 배웠다.
지금 금아는 월아의 과거를 덮어 주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금 선생?”
정은소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역시나 금 선생까지 둘 정도로 부잣집 소녀였다.
월아와 금아는 약속이나 한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은소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두 소녀가 상대해 주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로 인해 마차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게 꼭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마부들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삼보표국의 위치를 물어 헤매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두마차 두 대가 삼보표국의 정문에서 멈춰 섰다.
강한항에서 하선한 지 한 식경(약 30분) 만의 일이다.
마차에서 내린 정은소는 송겸을 이끌고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석경장 식솔들이 뒤를 따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남궁연은 햇볕을 막는다는 핑계를 대고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십여 개의 천막으로 햇볕을 가린 마당에는 수백 명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정은소는 거침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안채로 들어서자 그녀를 알아본 행수와 표두 들이 알은체했다.
정은소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 마루로 올라섰다.
끌려가듯 따라가던 송겸이 멋쩍은 얼굴로 섬돌 아래 멈춰 섰다.
“오라버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말씀드리고 곧 나올게요.”
먼저 어른들께 알리고 다시 데리러 나오겠다는 소리다.
“그래.”
송겸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방 안으로 사라지자 표두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들 중 표국주의 사촌 동생이자 총표두인 정군의가 송겸의 아래위를 훑으며 말했다.
“어디의 뉘요?”
“정주 출신의 송겸이라 합니다만. 그렇게 물으시는 분은 뉘신지요?”
“나 정은소의 숙부 되는 사람이오.”
“아, 안녕하십니까.”
송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했다.
“하는 일은 뭐요?”
“지금은 한림원의 학사로 있습니다.”
“학사면 하는 일과 품계가 어떻게 되시나?”
“이제 종칠품의 검토(檢討)를 맡고 있습니다.”
“검토?”
“문서가 제대로 작성됐는지 살피는 것을 검토라 합니다.”
“표국의 서기처럼?”
“비슷합니다.”
“쩝, 아쉽군. 아쉬워.”
정군의는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육부의 관리라면 그래도 표국 운영에 도움은 될 테지만 한림원 학사는 영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표두들도 시큰둥한 얼굴로 송겸을 본체만체했다.
지금처럼 표국이 어려운 상황에 한림원 학사는 그야말로 계륵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꽤나 아쉬웠는지 정군의가 끝내 한마디 덧붙였다.
“은소가 하다못해 대호방의 소방주라도 데리고 왔으면 도움이 됐을 텐데…….”
정은소의 숙부가 자신의 앞에서 대놓고 다른 남자를 거론하자 송겸은 매우 불편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마루로 나왔다.
삼보표국의 국주 정도진 내외와 정은소였다.
정은소와 달리 정도진 부부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은소는 해맑은 얼굴로 송겸에게 손짓을 보냈다.
“오라버니, 인사드리세요. 제 아빠와 엄마예요. 아빠, 엄마, 저쪽이 말씀드린 송겸 오라버니예요.”
송겸은 마루 위를 향해 정중하게 읍을 하며 말했다.
“송겸입니다.”
정도진이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소의 아비 되는 사람이오. 먼 길 오셨을 텐데 아무쪼록 좋은 시간 되기를 바라오.”
이윽고 정도진은 마루를 내려와 표두들과 함께 떠나갔다.
누가 봐도 정은소와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황망한 얼굴로 서 있는 송겸에게 정은소가 다가갔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원래 저런 분이 아닌데……. 지금 표국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송겸은 이내 불쾌함을 떨쳐 버렸다.
“조금 전에 숙부라는 분도 그 비슷한 말을 하던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몇 년 전 강한항에 금마표국의 지부가 생겼어요. 그때는 잠잠했는데 최근 세를 확장하면서 삼보표국을 사사건건 물고 넘어진다네요.”
“삼보표국은 이곳이 본점인데 고작 지부를 상대로 고전을 한다고?”
“마교가 하남성에서 상단을 건드릴 때 무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거든요. 그때 삼보표국도 표물을 많이 잃었어요. 배상금이 부족해서 대동전장에서 큰돈을 빌려야 할 정도로요.”
“아…….”
송겸은 단지 재정적으로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대동전장이 금마표국과 손을 잡았대요. 그 뒤로 돈을 갚으라고 온갖 행패를 부린답니다. 표국의 일에 방해가 될 정도로……. 그 지경이 되니 단골들도 하나 둘 금마표국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인가 봐요.”
“…….”
송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숙부라는 사람이 자신의 면전에서 그런 소리를 할 만도 하다.
문득 그가 물었다.
“대호방은 어떤 곳이냐?”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정사지간의 방파예요. 그쪽이 우리를 도와주면 대동전장의 패악질이 좀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대호방 소방주가 너무 여색을 밝혀서 저는 얽히고 싶지 않아요.”
정은소는 무슨 일이 있었던지 치를 떨었다.
“그랬구나.”
송겸은 자신의 무력함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녀의 부모가 자신을 소 닭 보듯 할 만도 했다.
자신이 삼보표국의 국주라도 환영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은소가 송겸의 팔을 잡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표국이 정상화되면 부모님들도 달라지실 거예요. 그때는 아마 사방팔방 다니며 오라버니 자랑을 하실걸요?”
그녀가 한창 송겸을 위로할 때다.
돌연 안채를 가르는 담장 너머로 ‘와장창!’ 하고 물건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정은소는 송겸의 팔을 놓고 밖으로 달려갔다.
대동전장에는 전주(錢主)와 추객(追客), 선봉(先鋒)이 있다.
우두머리가 전주, 돈을 회수하는 게 추객, 무력을 행사하는 곳이 선봉이다.
추객의 우두머리를 초혜(草鞋), 선봉의 우두머리를 철혜(鐵鞋)라 했다.
‘초혜에게 찍히면 죽지 못해 살고, 철혜에게 찍히면 죽는다’는 말이 그들을 대변한다고 보면 된다.
잔칫상을 발로 차서 엎은 대동전장의 철혜 무창귀도 왕일도는, 그것으로 성에 안 찼는지 이번에는 멀쩡한 상 위로 올라갔다.
“야이! 개후레자식들아! 빌린 돈부터 갚고 회갑 잔치든! 돌잔치든! 하란 말이다! 우리 대동전장이 너희들 회갑 잔치하라고 돈을 빌려준 줄 아느냐!”
회갑연에 온 손님들은 무창귀도의 악명을 아는지라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본래 전장이 표국에 와서 깽판을 치는 일은 없다.
전장에 비해 표국의 무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까닭이다.
그러나 간혹 철혜가 무림의 고수면 표국을 쥐 잡듯 하기도 했다.
지금의 대동전장과 삼보표국의 관계가 그랬다.
보통의 채권자라면 채무자의 영업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채무자가 돈을 벌어야 채권자에게도 돈이 들어오는 까닭이다.
그러나 대동전장은 마치 삼보표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훼방을 놓았다.
지금도 그 일의 연장이었다.
참다못한 삼보표국주 정도진이 버럭 소리쳤다.
“이 무슨 무도한 짓이오! 변재일이 지난 것은 사실이나 이미 손 전주(錢主)의 양해를 구했소! 그런데 철혜인 귀하가 왜 내 회갑연에서 행패냐 말이오!”
정도진의 탐스러운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삼보표국에 무창귀도를 능가하는 고수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작 전주는 몇 달 더 말미를 주겠다고 했는데, 그 아랫사람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무창귀도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전주님은 보살이라 참아 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못 한다. 변재일을 넘긴 놈이 웬 잔치냐! 사람의 탈을 썼으면, 이런 데 쓸 돈으로 이자라도 내란 말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총표두 정군의가 나섰다.
“이보시오! 이자는 꼬박꼬박 내고 있소! 그런데 무슨 이자를 내란 말이오!”
“앞으로 낼 이자라도 미리 계산해서 내면 좀 좋으냐? 원금은 갚지도 못하는 것들이 어디서 바락바락 대들어? 원금을 갚을 능력이나 있느냐? 요즘 표국에 손님도 뜸하다면서?”
“당신들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쫓아와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면 변재일 전에 갚았을 것이오!”
“흥! 자기들의 무능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지 마라! 본래 추객의 업무가 너희 같은 놈들을 따라다니는 것이니라.”
“따라다니면 누가 뭐라고 하겠소. 따라와 행패를 부리니 그러는 거 아니오! 당신들이 금마표국을 위해서 그러는 걸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시오?”
“미친놈! 돈을 빌려가서 안 갚으니 갚으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 금마표국이 왜 나오느냐? 그래서, 갚겠다는 것이냐? 안갚겠다는 것이냐?”
무창귀도는 뻔뻔하게 자기 할 말만 반복했다.
누가 봐도 작정하고 시비를 거는 모습이다.
한편 안채에 있다가 허겁지겁 달려온 정은소는 난장판이 된 회갑연 자리를 보고 그만 이성을 잃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당장 내려오지 못해요!’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를 본 무창귀도는 오히려 웃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그러는데 네가 와서 노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겠느냐? 그럼 내려가 주마.”
무창귀도가 조카를 희롱하자 분노한 정군의가 몸을 날렸다.
“무창귀도!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채앵―!
무창귀도에게 다가간 정군의가 박도를 뽑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흥분까지 한 하수의 칼질에 당할 무창귀도가 아니다.
그는 가볍게 뒷걸음질 쳐 도를 피했다.
와장창―.
그의 움직임에 멀쩡한 잔칫상의 요리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정군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도를 휘둘렀다.
무창귀도는 ‘어이쿠! 어이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잔칫상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회갑연의 상차림을 박살 내려는 의도가 뻔히 눈에 보였지만, 정군의는 도법을 멈추지 못했다.
조금만 더 빠르게 움직이면 그를 벨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한편 정군의를 가지고 놀던 무창귀도의 눈에 저 멀리 새로 차려진 잔칫상이 들어왔다.
사방이 우중충한데 어째 저곳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저런 건 못 참지.’
그의 발이 새로 차려진 잔칫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