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88
988회. 애는 착해요?
잠시 후 연적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해가 져서 그런지 연무장에 있던 무관의 아이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연적하는 천천히 연가무관을 둘러보았다.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필요한 시설은 다 갖추고 있었다.
산책하듯 연가무관을 돌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연무백이었다.
연적하가 뻘쭘한 얼굴로 보자 연무백이 말했다.
“일전에 내가 했던 말은……. 잊어라. 그때는 흥분해서 내 생각만 했다. 십두마병의 끝이 좋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
연적하는 듣기만 했다.
사실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어쨌든 큰어머니 백미주를 죽게 한 건 자신인 까닭이다.
“호천맹에 들렀던 거냐?”
역시 남궁세가에서 수련한 연무백은 보는 눈이 달랐다.
“예.”
“내가 알아도 되는 일이냐?”
“맹주와 무상도제, 의천검존이 장인어른을 노리고 있었어요. 그다음에 원공 선사와 태허 진인을 불러 나와 싸우려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런.”
“내가 뒤통수 맞는 걸 싫어해서요. 먼저 찾아가서 한바탕 휘저어 주고 이곳으로 온 거예요.”
“다섯 분의 천하십대고수들과 싸웠다는 말이냐?”
“예. 자기들이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이젠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대단하구나.”
연무백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해 보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내는지 모르겠다.
“형은 어때요?”
“뭐가?”
“연가무관으로 만족해요?”
“글쎄. 이게 만족인지, 현실에 순응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불만은 없다.”
“승백 형은 강호의 일에 관심을 많이 보이던데.”
“승백이는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래. 그 고생을 하고도 세상 무서운 걸 몰라. 그 녀석 연가무관을 나가겠다고 벼르는 중이야.”
“나가서 뭘 한다고요?”
“상방이나 표국 얘기도 하고, 호천맹 얘기도 하고 그런다.”
일반 문파 출신이 선망하는 곳은 호천맹이다. 그다음이 표국, 마지막이 상방의 호위였다.
“오라는 데는 있고요?”
“금와상방에서 와 달라고는 하는데 거긴 대우가 별로라고 튕긴다.”
“금와상방이면 십대상방 아니에요? 거기도 들어가기 까다로울 텐데.”
“호위들을 엄청 빡빡하게 돌리는 모양이야. 그런 게 싫단다.”
“아……. 여유 있는 분위기를 원하나 보네.”
“이왕이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싶다는 거지. 상인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게 아니라.”
“표국이나 호천맹으로 가면 되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낙양의 금린표국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더라. 가을에 표사를 모집하면 응해 볼까 어쩔까 하는 걸 보면.”
“승백 형이 가면 표국에서 좋아하겠네요.”
“그러겠지.”
연무백이 피식 웃었다.
승백이 연적하와 형제라는 걸 알면 기를 쓰고 잡으려 할 게다.
“그런데 형수님이 왜 갑자기 승백 형 혼처를 부탁한 거예요? 농담 같지만은 않던데.”
연무백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혼인한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구나. 형수와 함께 의원을 찾아가 봤는데, 임신이 안 될 거라고 하더라.”
“…….”
연적하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하니 큰형의 집에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
“승백이라도 혼인해서 연씨 가문을 이으라고 그러는 거다. 승백이가 혼기를 놓친 것도 있고.”
“혼기를 왜 놓쳤지? 승백 형 정도 되면 다들 좋아하지 않아요?”
연승백이 한쪽 팔을 잃어서 그렇지 외모는 세 형제 가운데 가장 준수했다.
“와룡장 재건과 유명교를 상대로 한 싸움으로 바쁘게 싸돌아다니면서 세월을 흘려보낸 거지.”
“남궁천 형님은 그 와중에도 연애를 했는데, 승백 형이 그런 쪽으로 둔했나 보네요.”
“하하. 그런 것도 있고.”
연무백이 너털웃음을 터뜨릴 때다.
전각에서 나온 누군가 빠르게 연무장 방향으로 사라졌다.
대문을 열어 준 아이였다.
“저 애는 아직 집에 안 갔네요?”
“소윤? 고아인데 또래 애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서 잠시 데리고 있는 중이다.”
“어려 보이던데. 몇 살이에요?”
“열두 살.”
“저렇게 어린애를 괴롭힌다고요?”
“말도 마라. 처음 만났을 때는 시체인 줄 알았다.”
“이런 작은 시골 마을에도 그런 일이 있어요?”
“거리의 아이들은 어느 곳이나 거칠기 마련이 아니냐.”
“하기야.”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창고를 탈출해 떠도는 자신에게 돌을 던진 아이들도 시골 아이들이었다.
“살려 놓았더니 대문 앞에서 맴돌기에 거두어들였다. 제 앞가림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잘한 일이나 시켜 보려고.”
“무공도 가르치나 봐요? 아까도 연무장에 있던데.”
“나가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어딘지 정이 느껴지는 말투에 연적하는 연무백을 힐끔 보았다.
“가르쳐 보니 어때요?”
“둔하고 느려.”
“크큿! 그럴 거 같더라고요.”
연적하는 대문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역시나 하는 얼굴로 웃던 연무백이 지나가듯 말했다.
“네 형수는 소윤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형수님은 원래 착하시잖아요.”
“그래도 양녀는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두고 보자고 했다.”
“양녀요? 여자애였어요?”
연적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더벅머리를 하고 있어서 남자아이려니 했는데 여자애라니?
“나도 남자아이인 줄 알았다. 형수가 여자아이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데, 지금도 잘 안 믿어진다.”
“야아. 반전 있는 애네요. 구천검도 가르쳐 줬어요?”
“가르쳐 주고는 있는데……. 일 초식 하나를 여섯 달이 지난 지금도 못 깨우치고 있다. 더 가르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연무백이 허탈한 얼굴로 연무장 쪽을 보았다.
열심히는 하는데 왜 깨우치질 못하는지 모르겠다.
농땡이를 피운다면 야단이라도 칠 텐데 그러질 않으니 자신도 난감했다.
양이화가 마음에 들어 하니 더 신경 써 주고 싶은데, 남들 한 달이면 배우는 일 초식을 여섯 달이나 붙들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형수님은 뭐래요?”
“자식을 갖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난 뒤로 더 거두고 싶어 하지.”
무심코 연무백은 처의 바람을 털어놓았다.
“아뇨. 무공요. 소윤이에게 계속 가르치자고 하시냐고요.”
“아, 그 소리였냐? 네 형수는 어떻게든 가르치려고 하지. 검술이 안 맞나 싶어서 형수가 양가창법도 가르쳐 봤는데……. 거기서 거기지.”
“애는 착해요?”
“소야 소.”
순하고 우직하다는 소리다.
연적하는 대문을 열어 주던 아이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그럼 양녀로 받아들여도 괜찮겠네요.”
“그래도 무관인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벌써 후계 걱정이에요? 승백 형도 있잖아요.”
“무관을 드나드는 또래들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있지 않느냐. 거리의 아이들에게 한번 데인 아이라 걱정이 된다.”
“그건 또 그렇네요.”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이야 어려서 눈에 안 띄겠지만 커서도 그렇다면 놀림감이 될 수 있었다.
“애가 무공을 싫어하면 안 가르치면 되는데. 밤에도 저렇게 연무장으로 달려갈 정도로 무공을 좋아하니…….”
연무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본인은 하고 싶어 하는데 재능이 따라 주지 않으니 기가 막힐 뿐이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연적하는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인생이 없는 것 같다.
연무백과 양이화만 봐도 그렇다.
와룡장이 망하고, 낭인 아닌 낭인 생활을 하다가 이제 겨우 살 만해졌는데, 아이를 갖지 못한단다.
연무백의 인생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진즉에 잘해 줄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문득 연무백이 물었다.
“이곳에는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냐?”
“왜요? 빨리 가면 좋겠어요?”
“아니. 오랜만에 네 형수가 웃는 걸 보니 좋아서 하는 말이다. 지안이와 조금 더 있게 해 줬으면 해서. 바쁜 일이 있다면 바로 가도 괜찮다.”
“바쁜 일 없어요. 여기 머무르다가 석경장으로 가면 돼요.”
“그러냐? 그럼 되는 데까지 머물러다오. 모처럼 온 김에 승백이와 내 무공도 좀 봐주고.”
말 못 할 가정사를 털어놓아서 그런지 연무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공을 봐 달라고 했다.
연적하는 그런 연무백의 변화가 싫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느낌이랄까?
“그럴게요.”
그렇게 해서 석경장 식솔들의 연가무관 생활이 시작됐다.
***
남직례성.
합비.
남맹.
현천각.
이른 아침, 총사 반천일검 모용문이 총사부의 중간 관리자인 모용각과 백익, 모용미를 불러들였다.
“얼마 전 남천 대협이 호천맹에서 천하십대고수 다섯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오!”
“정말입니까?”
“세상에!”
모용각, 백익, 모용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남천 대협의 무위가 고금제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천하십대고수 다섯을 격파할 정도라니!
모용문 총사는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그 싸움을 관전하던 호천맹의 고수 열다섯이 사망하고, 스무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단 일검에 천하십대고수 다섯과 서른다섯 명의 무인들을 쓸어버렸다고 한다.”
“일검에요?”
모용각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검공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일검에 격파한 것은 사실이다. 원공 선사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했다는 말까지 있다.”
듣고 있던 세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원공 선사는 강호무림의 전설과도 같은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애원을 했다니.
남천 대협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남천 대협이 존재하는 한 호천맹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이후로 그들은 남맹의 행사에 왈가왈부하지 못할 것이다.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다.”
사나운 모용문 총사의 말에 백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또 있었던 겁니까?”
“남천 대협이 호천맹을 들었다가 놓기 전에, 호천맹주가 포공사의 비무에서 검왕 맹주님을 죽이려 했다.”
“예?”
깜짝 놀란 백익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천하십대고수들끼리는 생사결을 하지 않는다.
승리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도 없지만, 목숨 걸고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 역시 중상을 입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비겁한 수를 썼다. 무극상인, 무상도제, 의천검존이 연수합공을 한 것이다. 남천 대협이 막아 준 덕분에 검왕 맹주께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백익은 제 귀로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호천맹이 미치지 않고서야 왜 갑자기 그런 무리수를 둔단 말인가!
“얼마 전 검왕 맹주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 일을 따지기 위해 남천 대협이 무극상인, 무상도제, 의천검존과 함께 호천맹으로 갔던 것이다. 결과는 처음에 말한 대로고.”
“아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세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모용문 총사가 몰아치듯 계속해서 말했다.
“호천맹에서 비겁하게 우리 남맹의 맹주인 검왕님을 제거하려 했다. 남천 대협의 응징과 별개로 남맹에서 피의 복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모용각, 백익, 모용미는 반대하지 않았다.
남천 대협과 검왕 맹주가 화해한 이상 남맹은 천하무적이었다.
“맞습니다! 그냥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호천맹의 무도한 짓에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호천맹이 먼저 도발했으니 남맹의 복수는 정당합니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모용문이 뭐라고 할 때마다 세 사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적하가 연가무관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다질 때, 저 멀리 남맹에서는 다시 전쟁의 불씨를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