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61
39. 전장의 바람은 어디로 부는가.
1.
광일은 눈을 부릅뜨고 다리를 후들거렸다. 방학천의 검이 관통했던 어깨의 통증도, 대결로 인한 내상과 피륙의 모든 상처와, 그로인해 서 있기조차 힘든 육신의 고통을 잊었다. 영혼이 칼을 맞은 것처럼 부들거렸다.
‘사형과 사제들이……’
죽었다.
그들은 목이 잘렸다. 녹림신군 종패가 들어 올린 머리가 사형 광현방장이고, 맹호가 들어 올린 머리들이 광조와 광해다. 저들은 죽임을 당했다.
종패와 맹호에게다. 죽이기 위해 간 길이 죽음의 길이 됐다.
눈을 질끈 감은 광해는 불호를 울음처럼 토했다.
“아미타불……!”
아아 이것이 인과응보인가?
불제자의 길을 버리고 살생에 물든 자들의 최후인가?
소림이 쌓은 죄업의 열매가 이러한 것인가?
아아 모르겠다.
부들거리며 몸을 떨던 광일은 검을 주웠다. 방학천이 다시 던져준 검이다.
검신에 문득 얼굴이 비쳤다.
피투성이로 변한 악귀 같은 얼굴이다.
부처를 섬기고 구도의 길을 좇던 자는 어디 갔는지 모를 추악한 얼굴이다.
“나는 이미 악귀로구나.”
가라앉은 중얼거림을 뱉어낸 광일은 방학천과 시선을 맞췄다.
“그대와의 인연인 여기까지인 듯하오.”
용화검을 집어든 채 말 없는 시선만 던지는 방학천에게 목례한 광일은 돌아섰다.
임여진의 성벽을 향해서다. 휘청거리는 걸음을 내디뎠다.
왜 광일이 그곳으로 향하는지 모두가 알았다. 그렇기에 사대금강도 따랐다.
종패와 맹호를 향해 가는 광일과 사대금강에게 원혜진인이 외쳤다.
“흔들려선 안되오! 지금은 혈천의 궤멸이 먼저요!”
점창파장문인도 피로 물든 도복을 흔들며 소리쳤다.
“혈천을 와해하고 총사를 먼저 없애야 하오! 임여진은 이미 점령당했소! 녹림의 군세가 작지 않다하다 본맹의 세를 총집결하면 상대함은 여반장이오!”
뒤이어 종남 장문인도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맞소이다! 눈앞의 적을 먼저 섬멸해야 하오!”
장문인들이 소리쳤지만 광일과 사대금강은 귀머거리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임여진의 성벽, 그곳에 있는 종패와 맹호를 바라보며 걸어가기만 했다.
그래서 장문인들은 애가 타고 피가 끓었다.
혈천총사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다 이긴 싸움이다. 방학천을 쓰러뜨리면 혈천은 외해다.
그런 결과를 눈앞에 두고 광일이 돌아섰으니 답답하고 분노가 터진다.
물론 광일과 사대금강의 심정은 이해한다.
광현방장과 소림의 숨은 고수들인 광해와 광조가 죽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리라.
그러나 이건 종패와 맹호의 도발이다.
백혈맹의 힘을 거듭 분산시키려는 수다.
정확히 그걸 노리는 건지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되고 있다. 그러함을 알면서도 광일 등은 가고 있고, 그걸 막지 못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원혜진인이 도호를 무겁게 내뱉더니 장문인들에게 외쳤다.
“녹림이 군진을 나와 뒤를 친다고 해도 상관하지 맙시다! 우린 힘을 합쳐 혈천 총사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구파의 장문인들은 이를 악물고 살기를 터트렸다.
원혜진인의 말이 맞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터다.
방학천은 왼팔이 잘린 모습으로 겨 서 있다.
광일과의 격돌로 내상을 입은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을 수 없던 격돌이었다.
저런 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이 전쟁은 영영 가망이 없다.
“원시천존! 놈을 해치웁시다!”
원혜진인을 필두로 장문인들은 방학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임여진으로 돌아서 가는 광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방학천은 종패와 맹호의 모습을 눈에 넣으며 탄식을 뱉어냈다.
오늘 이곳의 싸움은 결국 저들의 승리인 것이다.
혈천과 백혈맹이 개처럼 싸우는 뒤에서 저들은 고깃덩이를 물었다. 그것도 모르고 고깃덩이를 갖겠다고 양측은 물어뜯었다.
그 혈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종패와 맹호는 그걸 알고 있다. 뒤를 치고 군진을 장악한 이유도 그것이다.
혈천과 백혈맹이 이 자리에서 연수하여 저들을 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을 결과다.
혈천이건 백혈맹이건 전력을 총동원한 오늘 상대의 목을 물어야 한다.
그러고자 했건만, 오늘 이어둠이 가시기 전에 백혈맹의 숨통을 끊어버리고자 했건만, 물어뜯기고 있다.
광일은 돌아섰지만 구파의 장문인들이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다.
저들이 죽거나 방학천 자신이 죽어야만 끝날 자리다.
맹호와 종패는 그것을 이용했다.
저들에게 양측이 물어 뜯겼다.
숫자가 확연히 줄어든 흑혈승들과 혈승들의 방어 속에서 방학천은 뒤로 물러났다.
휘하 무사들과 혈승들의 적극적인 육탄방어로 시간을 벌고 있지만 상황은 최악이다.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제대로 운신조차 하기 힘든 몸은 둘째치고, 이곳을 벗어남은 혈천의 패배를 의미한다.
백혈맹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도 오늘 패배하고 물러선다면 다시 반격을 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이 승부의 날이다. 하지만 이미 승세가 기울었다.
여기서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 희생만 늘어날 뿐이고 패배를 향해 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치욕스럽고 어렵더라고 빠져나가야 한다.
“총사! 어서 말에 오르십시오!”
다급히 외치는 해남무사는 말고삐를 쥐고 처절한 눈빛을 던졌다. 그가 건네는 고삐를 잡은 방학천은 고통과 치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숙였다.
그 순간 원혜진인의 도호와 욕설이 들려왔다.
“원시천존! 혈천의 마두는 그 자리에 엎드려 목을 내밀어라!”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든 방학천은 원혜진인과 구파장문인들의 쇄도를 보며 이를 갈았다. 동시에 고통과 아픔을 씹었다. 장문인들과 구파정예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혈천무사들의 희생이 너무나 안타까워서다.
부들거리는 입가로 피를 흘린 방학천은 하나 남은 오른손으로 고삐를 쥐고 말 등에 올랐다. 통한을 품고 말머리를 돌리는 그의 곁으로 기마호위대가 붙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뒤로 혈천무사들이 모여 장벽을 만들었다.
구파장문인들이 욕설과 호통 속에서 방학천은 전장의 후위로 달렸다.
군진 안에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백팔나한의 저항을 힐긋 돌아봤던 종패가 다시 앞을 보고 입을 열었다.
“광일이란 승려와 사대금강이 기어이 오는군. 저들의 심정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이 잘 안 되는데? 죽겠다는 걸음인가 살겠다는 걸음인가?”
목계백은 의미 모를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들만이 알겠지.”
차가운 시선으로 다가오는 소림승들을 응시하던 종패는 백혈맹과 혈천의 접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백혈맹은 돌아섬 없이 치열하게 싸우는군. 그럴 수밖에 없겠지. 우릴 치겠다고 병력을 분산할 수도 없을 테고, 그랬다가 등판에 혈천의 칼을 맞을 테니까. 우리는 차후고, 여세를 몰아 혈천을 분쇄함이 우선이겠지.”
역시 고갯짓하며 목계백은 의견을 보탰다.
“구파의 장문인들은 방학천을 끝장내려고 마음먹었군. 저들은 우리가 군진을 나가지 않으리란 걸 알아. 그건 백혈맹과 혈천 양측과의 교전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우릴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일을 완전히 끝내려는 거지.”
“인의와 도덕을 버릇처럼 말하는 것들이지만 참으로 추악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함께 하던 동료가 목을 잘렸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그런 심사와 행동을 강호정의를 위한 대의에서라고 말하겠지. 저희의 이익과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목계백이 안광을 뿜으며 다른 것을 말했다.
“혈천 총사가 도주한다.”
종패도 그걸 보고 눈썹을 곤두세웠다.
“결국 그렇게 결정 한 건가? 도주가 쉽지 않을 텐데?”
“싸우는 건 더 어렵겠지.”
그렇다. 방학천은 광일에게 왼팔을 잘렸다. 내상도 심각할 터다. 그런 몸으로 함정에 빠져 전열이 무너진 이 전황을 승세로 돌리긴 힘들다.
패주를 택하고 전력을 재정비해 반격함이 옳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결사항전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무의미한 일이다.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서 돌아섰다. 하지만 패주의 저 길이 성공할지, 온전할지 알 수 없다. 이빨을 박은 구파의 장문인들은 절대로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회가 무산되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고, 종패와 맹호라는 새로운 적이 생긴 마당이다. 하나라도 끝장을 내야 할 상황이다.
방학천을 에워싼 기마호위대가 전장의 후미로 멀어지는 걸 보며 목계백은 중얼거렸다.
“피와 죽음이 쌓이는 길이 될 거야.”
그 중얼거림이 흩어지는 때, 광일과 사대금강이 임여진 성벽 아래에 다다랐다.
“말을 가져와라!”
원혜진인의 호통 속에서 기마대가 달려왔다. 바람처럼 말 등에 올라탄 원혜진인은 화산장문인과 시선을 맞췄다. 동시에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혜진인은 말머리를 돌려 전장을 우회해 달렸다. 그 뒤를 역시 말에 올라탄 무당의 태청검수들이 따라 달렸다. 종남장문인과 점창장문인도 합세했다. 전장엔 화산장문인과 공동장문인이 남고 추적해 나선 것이다.
“원시천존! 혈천의 무리를 남김없이 도륙하라!”
화산장문인의 호통 속에서 백혈맹 무사들은 혈천무사들을 공격했고, 혈천무사들은 세가 와해 되어 가면서도 추적대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성벽에서 내려와 물러선 목계백은 광일과 마주 보고 섰다. 왼팔이 늘어지고 피투성이 몰골의 그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피에 젖은 회색승포는 걸레처럼 너덜거렸고, 암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생기가 전혀 없었다.
“다시 생각하십시오.”
목계백이 말하자 광일은 온전한 오른손으로 잡은 검을 세웠다.
“아미타불.”
불호, 그 하나로서 대답을 한, 모든 것을 토해낸 광일을 향해 목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장도를 양손으로 움켜쥔 목계백은 북천의 힘을 칼에 실었다.
칼이 시린 빛을 내며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광일은 무저갱과 같은 눈으로 응시하다 검을 천중으로 세웠다. 검극으로부터 황금빛이 퍼져 나왔다.
목계백과 광일은 동시에 움직였다.
다섯 자 대검을 중단으로 겨눈 종패는 사대금강을 향해 마지막 선고를 던졌다.
“너희 중에 이 자리를 살아서 돌아갈 자는 없으리라.”
사대금강의 수좌 현인은 계도를 내밀며 불호를 뱉었다.
“아미타불.”
종패가 먼저 움직였다. 벼락과 같은 그 공격을 향해 사대금강도 튀어 나갔다.
임여진 앞의 대혈전장을 빠져나가는 방학천무리를 무섭게 노려보며 원혜진인은 말 배를 찼다.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부관승의 말이 떠올랐다.
맹호를 조심하라던 말, 무서운 자라던 말이다.
이 새벽에 그 말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자의 계략에 모두가 놀아나고 말았다.
힐긋 뒤돌아 본 원혜진인은 임여진 안의 불빛과 죽고 죽이는 전장을 눈에 담았다.
혈천의 결사적으로 항전하고 있지만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무리가 흩어지고 있다. 결속력이 약한 자들부터 먼저 이탈하고 있음이다.
총사 방학천이 도주한 마당인데 수하들이 버텨낼 까닭이 없다.
승리다. 백혈맹의 승리다.
하지만 반쪽의 승리다. 아귀가 맞지 않는 승리다.
혈천총사 방학천의 수급을 아직 베지 못했고, 맹호와 종패의 배후공격을 맞아서다.
이 새벽의 전투에서 승자를 정하라면 엄밀히 그들이다.
‘맹호, 저자는 대체 뭔가? 어떤 자인가?’
마음속으로 물어보지만, 여전히 의문뿐이다. 누가 속 시원히 답해줄 사람도 없다.
항주무림맹의 일원인 자다. 저자는 항주에서부터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서 무당은 장문인을 잃었고 문도들을 잃었다. 소림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항주, 그곳에서부터의 전쟁이 시발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새벽어둠 속에서 소림도 결국 방장의 목숨을 잃었다.
그 자리에 맹호가 있다.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더욱 의문스럽고 분노가 커진다.
아니, 이제는 의문 따윈 없다. 맹호라는 자는 죽여없애야 한다.
하지만 그게 쉬울 리 없다. 맹호와 종패가 손을 잡고 새로운 적이 됐다.
이를 악문 원혜진인은 방학천의 무리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네놈들부터 지옥으로 보내주마!”
원혜진인과 점창장문인과 종남장문인을 선두로 추적의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목계백은 장도를 휘둘러 핏방울을 뿌렸다. 도신에 묻은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게 했다. 허공을 베는 듯한 그 칼부림 후에 장도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멀쩡했던 오른팔이 잘려나간 광일이 서 있었다.
부르르, 경련하는 뒷모습을 보인 광일은 천천히 돌아서 목계백을 바라봤다.
“왜……?”
죽이지 않은 이유를 묻는 거다.
그 물음에 목계백은 답하지 않았다. 시선만 던졌다.
그것으로 답이 됐는지 광일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가? 나는 죽을 수도 없는 것인가? 지은 죄를 씻기 위해서는……”
광일의 중얼거림이 흩어지는 그 순간, 종패와 사대금강의 접전에 결말이 났다.
폭음과 더불어 현인이 뒤로 나뒹굴었다.
남은 삼인 중의 둘은 손목과 정강이가 잘렸고, 남은 일인은 종패의 대검을 어깨에 받았다.
“이것이 너희의 최후다!”
종패가 검을 뽑아내고 다시 휘두르려는 찰나 목계백이 소리쳤다.
“그만!”
종패가 움찔하다가 분노한 시선을 목계백에게 돌렸고, 목계백은 담담히 다시 말했다.
“소림은 이제 돌아갈 것이다.”
종패는 틀어올린 눈썹 끝을 내리지 않은 채 광일을 돌아봤다.
오른팔이 잘려나간 모습의 그는 허허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목계백과 싸우기 직전까지의 무저갱과 같은 암울도 사라졌다.
허무와 무욕만 보였다.
종패는 눈썹 끝을 내리며 대검도 내렸다. 그 순간 광일이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광일은 걸음을 내디뎠다. 목계백과 종패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시체로 변한 백팔나한의 주검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광현방잔과 두 사제의 수급 역시도 내버려두고, 사대금강 앞을 지나며 말했다.
“돌아가자.”
광일의 뒤를 따라 사대금강은 서로 부축한 모습으로 멀어져 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