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63
3.
“남은 것들을 끌어모아 불을 붙여라.”
목계백이 지시하자 흑호단은 아무런 의문도 드러내지 않고 물음도 없이 명령을 이행했다. 임여진 안에 탈 만한 것들을 모아 성벽 담장 안쪽에 둘러가며 쌓았다. 타다 남은 기둥과 우마차부터 별의별 것을 다 모았다.
흑호단이 불을 붙이는 걸 본 종패는 미간을 좁히고 있다 녹림대호들에게 명령했다.
“뭣들 하는 거냐! 협력해라!”
백팔나한에 의해 희생이 나긴 했지만 사천에 달하는 녹림대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흑호단처럼 불이 붙을 만한 것들을 끌어모았다. 더는 불 속에 던질 게 없자 시체들의 옷가지까지 벗겨 내서 불태웠다.
백혈맹과 혈천무사들의 시신이 알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던 목계백은 성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불길과 연기가 치솟아 분간하기 힘든 상황이 됐지만 유심히 살폈다. 예상대로 당황과 불안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날이 밝는다. 어쩌려는 거냐?”
종패는 미간에 깊은 골을 그린 채로 물었다.
말해 달라는 거다.
의문만 품은 채로 움직일 수 없다는 표정이다.
여태까지도 혈천에게 부림만 당한 처지였다. 그 분노가 미간의 골에 쌓여있다. 더는 그러지 않겠다는 거다.
목계백은 핵심을 말했다.
“장강이다. 장강까지 우리는 후퇴한다. 백혈맹은 우릴 추적해 오겠지. 저들을 달고 가는 거다. 우리의 목적지를 예상할 거고 대비를 할 거다.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다. 그걸 소용없게 만든다. 장강은 저들의 무덤이 될 거다.”
종패는 그 순간 알았다.
목계백이 단정 지어 말하는 저 결론, 흔들리지 않는 확인에는 이유가 있음을. 그것이 장강과 연관된 것이란 걸.
그런 거라면 하나다.
장강수로채다. 그들이 아니라면 저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들까지?’
놀라움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종패에게 목계백은 시간이 됐음을 전했다.
“백혈맹의 시야가 확보되기 전에 여길 나가자.”
목계백과 종패를 필두로 임여진 안의 녹림대호와 흑호단은 군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군진 앞의 백혈맹은 긴장 속에 술렁거리기만 했다.
* * *
이제는 확연하게 날이 밝고 있어 사위분간이 되어갔다.
핏발선 눈을 부릅뜨고 말달리던 원혜진인은 새벽과 아침 사이의 푸르름 속에서 그들을 봤다.
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모습을 찾지 못하던 혈천총사의 무리다.
‘저놈들이?’
원혜진인은 의아함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혈천총사의 무리가 멈춰서 있기 때문이다.
일견 삼백여 명 정도로 판단되는 숫자다.
모두 말을 탄 저들이 관도에 서 있다. 도망치기 바쁜 놈들이 저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함정? 이 마당에?’
의문 속에 질주를 계속하던 원혜진인은 그 순간 함성을 들었다.
관도의 좌우로부터 질주해나가는 무리의 함성이다.
종남과 점창이다.
장문인과 무사들이 쐐기처럼 쳐들어가고 있다. 함성은 합공하자는 부름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원혜진인은 말 배를 힘주어 찼다. 태청도사들도 상황을 인지하여 더욱 전력으로 달렸다. 그런데 그때 변고가 생겼다.
푸른 섬광.
새벽과 아침의 사이로 흐르는 대기를 그것이 갈랐다.
아찔한 푸른 빛이다.
흡사 흑혈승들이 던지는 흑혈섬의 빛과 같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빠르고 위험하다.
그렇다는 걸 보는 것만으로 알겠다. 저게 뭐란 말인가?
혈천이 멈춰 서 있는 지점까지 달려가서야 원혜진인은 답을 알았다.
푸른 섬광이 연거푸 비상하더니 무사들이 갈라졌다.
점창과 종남의 무사들이다. 머리가 잘려나가고 허리가 동강 난 그들의 육신이 땅에 떨어졌다.
푸른 섬광을 날리는 자들을 봤다.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다.
“중원의 인사는 변하질 않는군.”
흑의인들의 중앙에 선 중년인이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누군지 알 수 없고 흑의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어 원혜진인은 치떴던 미간을 가득 좁혔다.
반면에 종남장문인과 점창장문인은 분노를 발산하며 소리쳤다.
“어인 놈이 백혈맹의 행사를 방해하느냐!”
“네 이놈! 정체를 밝혀라!”
두 장문인이 호통쳤지만 중년인의 무리는 털끝만큼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종남과 점창의 말 탄 무사들이 각기 이백여 명씩이다. 게다가 원혜진인과 태청도사들의 숫자가 또한 그만큼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한 치의 두려움이 없다. 그 이유가 뭔지 원혜진인은 혈천의 무리를 보고 알았다.
‘흑혈승들이 다 죽었구나!’
십여 명의 흑혈승들이 바닥에 갈라진 채 떨어져 있었다. 그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혈천은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혈천총사 방학천도 보인다. 그 얼굴은 절망하고 있었다.
‘이들 때문이다, 이들이 누구길래?’
충격과 놀람으로 돌아보는 원혜진인에게 답을 주듯 흑의중년인이 말했다.
“당문은 혈천에게 볼일이 있다. 그 일을 방해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 * *
임여진을 소리 없이 빠져나온 목계백은 흑호단을 후위로 두고 이동했다.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녹림대호들을 선두로 보내고 빠르게 이동하도록 종용하는 동시에 후방 위험에 대비함이다.
녹림대호들 중에서 애초에 종패와 움직이던 일천기마대는 선두와 측면에서 경계토록 했다.
밝아지는 동녘을 보며 흑호단과 무리의 뒤로 이동하는 목계백에게 종패가 다가왔다.
“흔적이 과하지 않은가?”
목계백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천이나 되는 병력이니 당연한 거지.”
“그래도 이렇게 뚜렷한 흔적은……”
“말했다. 백혈맹을 뒤로 달고 간다고.”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린 종패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목적지까지 가자면 접전을 피할 수 없을 텐데?”
“피할 생각인가?”
미간을 꿈틀하는 종패에게 목계백은 차가운 미소를 던졌다.
“화덕에 불을 붙였으면 부채질을 해줘야 불길이 커지겠지.”
여전히 꿈틀대는 미간을 한 채 목계백을 응시하던 종패는 또 물었다.
“행로는 정해둔 거냐?”
“당연히. 염려 마라. 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임여진으로 향했던 길이다. 그 길을 그대로 거슬러 남하하는 거다. 눈을 감고도 간다.”
종패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목계백은 첫 번째 멈출 지점을 말했다.
“백구산에서 쉰다. 거기까진 쉬지 않고 이동한다.”
* * *
부들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말 등에 앉아 있는 방학천은 절망 속에서 울부짖음을 토했다.
가슴속의 울부짖음이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지난 시간이 허무했다.
겨우 이렇게 죽겠다고 한 꼴이다.
‘해남의 선조들이시여, 이 제자를 용서하소서……’
안장에 걸린 용화검을 잡은 방학천은 말에서 내렸다.
당문사람들에게 쓰러진 소뢰음사의 흑혈승 형제들 시신이 발 앞에 있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애도했다.
남아 있는 형제들에겐 살 기회를 줘야 한다.
“혈천의 총사 방학천이오. 나에게서 원하는 것을 취하고 내 형제들은 보내주길 바라오.”
그 순간 점창장문인이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문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행사를 방해하면 용서치 않겠다? 누구를 겁박함이냐! 백혈맹의 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게냐? 가당찮은 것들이로다!”
점창장문인은 격노를 드러냈다. 당문의 흑의중년인이 한 말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당문이 아무리 무섭고 상대하기 힘든 가문이기는 하나, 이 자리의 인원은 겨우 십여 명이다.
그에 반해 점창과 무당과 종남의 무사들은 육백여 명이다. 비교조차 안 된다.
“당문의 누구인지 신원을 밝혀라!”
점창장문인이 검을 세우고 다시 소리쳤다.
당문의 중년인은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혈천총사 방학천만 바라봤다.
그걸 종남장문인과 원혜진인은 이상하게 여겼다.
혈천의 모습이다. 저들이 도망가지 않고 멈춘 이유다.
방학천이 정중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당문에 다시 요청 드리는 바이오, 나를 제외한 수하들은 용서해 주시오.”
종남장문인과 원혜진인이 미간을 찌푸리는 가운데 점창장문인도 이상함을 인지했다.
삼백여 명의 숫자인 혈천총사의 무리가 자비를 베풀라고 청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방학천이 말에서 내려 직접 그 말을 하고 있다.
“이게 무슨……”
점창장문인이 중얼거리는 그때에 원혜진인은 퍼뜩 뇌리를 스치는 것을 잡았다.
‘당문! 독!’
원혜진인은 즉시 운기를 해보았다.
역시 내력이 모이지 않았다. 허공에 연기가 흩어지듯이 흩어진다.
이유는 물어보나마나다. 당문의 산공독이다.
같은 순간 종남장문인도 상황을 인지하고 눈을 치떴다. 점창장문인도 마찬가지다.
세 사람은 동시에 눈을 맞췄다. 경악한 서로의 얼굴을 보고 당문의 무서움을 절감했다.
혈천이 멈춰 움직이지 않는 이유와 방학천이 저러는 이유도 알았다.
독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 하독했단 말인가?
세 문파의 제자들도 상황을 파악하고 동요가 일어날 무렵, 흑의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성명삼자를 밝히겠다. 나는 당대문이다. 당문의 문주를 모시는 자다. 본문의 특별한 임무를 지니고 이곳에 왔다. 이제 그 일을 하겠다.”
내력이 사라져 당황과 놀람 속에 있는 백혈맹무리를 두고 당대문은 방학천에게 물었다.
“너희가 사용하는 흑혈섬, 그것을 어디에서 얻었느냐?”
방학천은 평온한 얼굴로 잠시 하늘을 봤다.
완전히 밝아진 아침 하늘이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하늘이다.
그 하늘을 보노라니 모든 사념이 사라진다.
원망과 분노, 굴욕과 통한, 허무와 회한까지도 씻겨나간다.
“내가 아는 바로는 소뢰음사에서 제작한 것이오.”
“소뢰음사가 제작했다?‘
“그곳에 특별한 장인이 있소. 이름은 모르오. 그가 만들어낸 병기로 알고 있소.”
칼날처럼 예리한 눈빛을 쏟아내던 당대문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원형의 가죽주머니를 열고 뭔가를 꺼냈다.
푸른 빛을 내는 원형암기다.
그게 뭔지 다들 알아봤다. 다름 아닌 흑혈섬이다. 빛깔만 다를 뿐이다.
“이것은 본문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청광(淸光)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강호에서 이르는 대로, 본문의 일차암기계보도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 것이지. 바로 이것을 너희 혈천이 사용한다고 들었다. 방금 전에 그 실물을 보고 겪었구나. 본문은 이것이 어떻게 너희에게 있는지 알아야겠다.”
평온한 얼굴로 방학천은 대답했다.
“아는 바를 말했소. 그 이상은 아는 것이 없소.”
당대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그렇겠지만 소뢰음사는 다를 테지.”
차가운 안광을 뿜어낸 당대문은 남아 있는 소뢰음사의 혈승들에게 외쳤다.
“소뢰음사의 승려들은 혈천 총사와 함께 본문으로 간다!”
곧바로 당대문은 당문무사들에게 명령했다.
“본문의 의지에 반하는 자는 무조건 척살하라!”
당문과 혈천과 백혈맹이 조우한 현장, 그 결과가 당문의 일방적인 것으로 결론이 나자마자 반발의 움직임들이 나왔다. 첫 번째가 혈승들이다.
잡혀가는 치욕을 겪지 않으려는 그들은 말을 탄 채로 육탄공격했다. 하지만 내력 한 줌 모을 수 없는 처지, 그들에게 청광의 가름이 날아갔다.
혈승들이 종이처럼 갈라지는 광경을 목격한 원혜진인과 두 장문인은 명령했다.
“물러서라!”
“퇴각한다!”
무당과 종남과 점창의 육백여 제자들은 즉시 말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은 혈천의 총사도 잊었다. 말이라도 움직여 돌아설 수 있을 때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방비로 당하고 말 터다. 당문의 인원이 십여 명에 불과하지만, 내력 없는 육백여 명은 늑대 앞의 양 떼다.
치욕과 분노를 삼키며 원혜진인과 두 장문인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런데 그들 앞으로 당문의 무사들이 바람 같은 경공으로 달려 나왔다. 그들의 손에서 푸른 섬광이 피어났고, 그것이 원혜진인과 두 장문인에게 날아왔다.
벼락처럼 다가오는 푸른 섬광을 보며 원혜진인은 절규했다.
‘안돼!’
부르짖음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가슴 한복판을 푸른 빛이 치고 지나가는 순간까지 입안에만 머금었다.
뱉지 못한 그 절규를 안고 말에서 떨어졌다.
구르다가 멈춰 늘어지고서야 겨우 목소리를 흘려냈다.
“이렇게……”
허무하고 원통하다.
평생을 고련한 무공이 한 줌 쓸모도 없었다. 당문의 산공독에 당한 결과다.
이런 죽음을 맞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공은 왜 익혔던가? 차라리 독공이나 연마할 것을.
“쿠헥.”
피를 토해낸 원혜진인은 얼굴에 닿는 땅바닥에 스며있는 가루를 봤다. 땅과 같은 색이지만 다른 것이다. 산공독 가루다. 당문이 하독한 것이다.
이곳으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동안 이 독이 떠올라 호흡기로 들어갔다.
그게 독에 당한 과정이다. 허무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원인이다.
흐려지는 시선으로 원혜진인은 그들의 시신을 봤다.
종남장문인과 점창장문인이다. 목이 잘려나간 그들의 모습은 처참하기보단 애처롭다.
구파의 한자리를 차지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강호를 위진하는 명성과 무공을 지니고도, 저렇게 길거리의 개처럼 죽음을 맞이한 모습이 가긍하다.
“원시……천존……”
부들거리는 입술로 도호를 읊어낸 원혜진인은 마지막 숨을 뱉어냈다.
그 순간 보였다. 무당의 산과 구름과 사계절의 변화와 그 속에서 웃는 형제들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