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78
2.
소림사를 보위하는 숭산에도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소실봉과 태실봉부터 시작한 단풍빛이 산 아래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차갑기 그지없다. 계절은 내도록 변화의 얼굴을 품고 있다가 갑자기 변모를 알리는 듯하다. 여름의 옷은 이미 벗었다.
“허, 느닷없이 가을이로구나.”
허탈한 음성을 선선한 가을바람 속에 흘려 넣은 부관승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산을 올랐다. 광일이 기거한다는 암굴을 찾아서다. 부상을 털어내지 못한 몸은 휘청거린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오르고 또 올랐다.
‘만나리란 보장도 없지만, 대면한다면 무엇을 말할까?’
무엇을 위해 오르는지 확실하지 않은 발걸음이다. 그냥 한번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무당으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왜인지는 알 수가 없다.
힘겨워하는 몸을 이끌고 숭산을 오른 부관승은 마침내 암굴에 닿았다.
“후우.”
거칠어진 숨을 달래고 흥건하게 흐른 땀을 선선한 바람에 식히며 몸을 가눴다. 이 정도라도 움직인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대견했다. 죽을 뻔한 육신이다. 내상이 깊어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산을 올랐다.
몸이 살아나고 있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리라. 갈라진 어깨로 불편은 있겠지만 검을 잡는 것은 문제없다. 이렇게 만들어준 소림 의생각에 감사하다. 하지만 소림사에 오게 만들어 준 자가, 살려준 자가 따로 있다.
‘맹호.’
목계백의 얼굴을 떠올린 부관승은 부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천하를 유린하는 자……’
그자를 생각하면 전율과도 같은 것이 심신을 흔든다. 그것이 마음을 흩어 놓고 의지를 빼앗는다. 맹호를 생각하면 아무런 의욕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길 왔다. 공료대사의 간청도 물리치고 돌아앉은 광일을 보기 위해 왔다. 목적이나 예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만나보고 싶어서다.
“청정함을 깨트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목소리를 높여 기척을 낸 부관승은 암굴 앞으로 더 다가가 성명을 밝혔다.
“부관승이라고 합니다. 좌군 총사를 맡았던 자입니다. 뵙기를 청합니다.”
기척이 없다. 그래서 부관승은 암굴 입구로 머릴 들이밀고 다시 목소릴 냈다.
“무경진인의 제자가 되는 자입니다. 곧 무당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전에 광일대사를 뵙고 말씀을 나누고자 찾아왔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것이 고의적인 무시인지 무욕청정한 선정에 들어서인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부관승은 더욱 마음이 초조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침을 당하고 무시당하더라도 대면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에 바윗덩이만 안으리라.
“대사, 청컨대 상면할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청을 넣은 부관승은 아예 몸을 디밀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시켰다. 왜 만나겠다는 건지, 만나서 무얼하겠다는 건지도 확실치 않은 채 온 걸음이 그리 만들었다. 암굴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흐린 등불 빛조차 없는 암굴 안, 안쪽의 벽을 보는 부분에 이르자 낡은 포단이 보였다. 그 위에 빛바랜 회색승복을 입은 승려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한쪽 팔이 잘려나가 헐렁한 승복소매를 늘어뜨린 광일이다.
“대사……”
조심스럽게 광일을 부르던 부관승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광일의 뒷모습은 어쩐지 산사람의 모습 같지 않았다. 다시 보니 생기가 전혀 없다. 마치 석상이나 목불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미간을 확 좁힌 부관승은 광일의 옆으로 돌아가 얼굴을 봤다. 그리고 알았다.
“허……”
광일은 탈각했다. 좌화다.
이 암굴 안에서 이대로 이 세상을 떠났다. 여기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마음을 가지고 떠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얼굴이 평화롭다.
인간의 모든 것을 털어낸 부처의 얼굴이다.
“대사……”
까닭 모를 허무와 전율에 젖어 부관승은 고개를 숙였다.
질끈 감은 눈 안으로 수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나온 삶의 모든 것들이다.
슬프고 기쁘고 화나고 즐겁고 우울하던 모든 날이 가을바람처럼 불어댄다.
고개 숙인 채 격정에 젖던 부관승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때에야 보였다.
常者皆盡 高者亦墮 合會有離 生者有死.
세상일은 모두가 다함이 있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도 역시 끝이 있나니, 만나면 헤어짐이 있는 것같이 살아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다.
광일이 앉은 자리 앞, 바닥에 지력으로 쓴 그 글귀를 보는 순간 부관승은 번개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직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율이 몸과 마음을 강타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영혼에 정을 치듯 박혔다.
부관승은 엎드렸다.
광일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울음을 토했다.
왜 그런지 모른다.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 여기 온 이유를 알 수 없듯이 그러고 있다.
그렇지만 이젠 알겠다.
왜 왔는지, 광일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무엇을 들으려 했는지.
그 모든 것이 바닥의 저 글귀에 들어 있다.
진부한 일편경구와도 같은 저 글귀, 알고도 몰랐던 그 진리를 이제야 봤다.
조아렸던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킨 부관승은 다시 광일의 등 뒤로 돌아갔다. 다시 조아리며 절을 했다. 일어서 암굴을 나와 하늘을 보고 중얼거렸다.
“하늘은 세월이 지나도 저러할 터.”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부관승은 다시 산을 내려갔다. 그 걸음은 소림사로 향하지 않았다.
* * *
의생각에선 지독한 냄새가 연일 퍼져 나왔다. 그 냄새가 제독환의 제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소림승들은 참아냈다. 매일 만들어지는 그 제독환은 소림사 앞에 진영을 설치한 백혈맹 무사들에게 지급됐다. 쓰고 텁텁한 그것을 무사들은 찡그린 얼굴로 복용하고 몸에 지녔다. 그 일이 이뤄짐과 동시에 당문의 공격을 방비할 방법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독공을 익힌 자들의 특별한 성과는 없는 것인가?”
무경진인이 묻자 무당 원명장문인이 대답했다.
“제독환을 준비한 것 정도의 수준이라 할 만합니다. 딱히 더 낫고 못하고를 논하기가 어렵습니다. 현재로선 한계인 듯합니다. 천하의 그 누구도 당문의 독을 넘어서기 어렵고 보면, 일면 예견됐던 일로 생각합니다.”
소림방장 광보대사가 이어 말했다.
“유일한 가능성이 만독비경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림맹에 그것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상당한 성과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지금이라도 그것을 되찾아올 방법이 있다면 해야 하지 않나 판단합니다.”
모여앉은 백혈맹 수뇌들, 구파의 새 장문인들과 시선을 교환한 공료대사와 무경진인은 침음성을 흘려냈다.
과감하게 찾아갔던 당문중원분가의 저력은 당대천을 대면하는 것으로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충분한 힘으로 준비를 한 것이 분명하다.
그 힘을 막자면 역시 만독비경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을 가진 자들은 무림맹, 되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미타불.”
“원시천존.”
육중하게 가라앉은 불호와 도호를 동시에 흘려낸 공료대사와 무경진인은 서로 돌아보고 결론을 내렸다. 만독비경을 찾아오기로. 그러자면 두 사람 중의 한 명이 나서야 한다.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문을 대적할 수 있고 구파의 근본을 보존할 수 있다.
시선을 마주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던 두 전대기인은 불현듯 웃음을 흘렸다. 서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알고 있기에 나오는 웃음이다.
“흘흘흘. 빌어먹을 타불이로다. 무경아, 네 낯짝은 언제봐도 구리구리하구나. 그래, 다 좋은데 말이다, 나는 왜 당문이 방학천을 품었는지를 모르겠다.”
“크흘, 공료 네놈의 상판은 별다른 줄 아느냐? 뭐 그렇다. 나도 당문이 왜 혈천총사를 데리고 있는지를 모르겠구나. 세를 모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염화시중과 같은 두 사람의 시선과 미소가 오고 가던 그 순간이었다.
방장실 밖에서 급보가 들어왔다. 광보대사를 통한 급보는 모두에게 개봉됐다.
“무림맹이 군사를 움직였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방향이 무당산인 듯하답니다.”
원명장문인이 가장 먼저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무당을 공격하려는 행보입니다! 막아야 합니다!”
무경진인도 도호를 육중하게 뱉으며 일어섰다.
“원시천존, 당문보다 무림맹이 먼저 우릴 도발하는구나. 좋다. 그들을 응징할 때가 됐다.”
공료대사가 광보대사와 구파의 장문인들을 응시하고 일어서 명령했다.
“무림맹의 뒤를 친다. 이번 기회에 그들의 이름을 지우리라.”
* * *
“이젠 바람이 차가워졌어.”
야숙지로 정한 장강변의 주변을 돌아보는 종패는 새삼스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엔 녹림신군다운 면모가 없었다. 그냥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 걸 절감하는 보통사내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목계백은 웃었다.
“왜 웃냐?”
“천하의 녹림신군이 가을을 타는 것 같아서.”
“뭐?”
종패의 눈썹이 곤두서는데 함윤이 역시 다가왔다. 장강의 수하들에게 지시하고 경계토록 한 후의 행보다. 그의 시선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오독문에서 잘 해내고 있나 모르겠다.”
군막을 친 안에서 오독문주 부자와 장로들은 두문불출이다. 이동을 하면서 만독비경을 연구하고 그 안에서 방안을 찾아내려는 시도다. 무영사의 진영에 남지 않은 이유는 보안과 안전을 위해서다. 힘들더라도 같이 움직이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목계백이 했고 모두가 그걸 받아들였다.
종패가 군막을 응시하며 대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솔직히 독이니 뭐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몸으로 부딪쳐 싸우는 게 아닌 이상 더러운 암수에 불과해. 그런 수단에 의존해야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아.”
함윤이 혀를 찼다.
“쯔쯔쯔, 무식한 곰처럼 굴지 마라.”
종패의 눈이 험악해지는 걸 무시하고 함윤은 계속 말했다.
“독이 좋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 싫은 건 다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다 부딪치는 현실이 그렇지가 않다. 당문을 상대하자면 어쩔 수가 없는 거지.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저렇게 노력하는 오독문의 앞에서는 행여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눈썹만 꿈틀거리며 종패는 다른 반응을 내지 않았다. 함윤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아서다. 모른다면 여기 같이 있지도 않을 터다. 더군다나 오독문의 노력을 보고 있다. 그들의 사기를 저하할 말은 하는 건 바보짓이다.
“정말로 독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이어진 함윤의 물음에 종패는 미간을 가득 좁혔고 목계백은 밤하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솔직히 모르겠다. 당문이 정말로 독인을 만든 건지, 방학천은 그 재료로 사용한 건지, 추측은 그렇게 했지만 말 그대로 추측이고 가능성이지.”
종패가 입을 열었다.
“오독문은 상당한 가능성으로 판단하고 있다. 거의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눈치야.”
“그래, 오독문에서 저렇게 몰두하는 이유도 그래서잖나?”
이어진 함윤의 목소리 뒤로 목계백은 차가운 눈빛을 내며 말했다.
“독인이든 무엇이든, 당문은 감춰놓은 힘이 있을 거다. 우린 그것을 예상하고 있고 대비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러면 된 거야. 결과를 예단하고 두려움을 갖거나 위축되는 건 바보짓이지. 싸울 때가 되면 싸운다.”
예리한 칼날을 품은 것 같은 눈으로 목계백은 종패와 함윤을 응시했다.
“우린 적과 한배를 탔다. 당문은 우리의 옆구리로 다가 와 칼을 숨겨놓고 있다. 방심하면 그 칼에 찔리고 말 거다. 독을 바른 칼이지. 저들은 우리와 연수를 제안하면서 바로 후속준비를 했다. 독귀자들이 연이어 찾아왔지. 우리가 연수를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 움직이고 준비한 거다.”
그렇다. 당대문과 당문무사들, 독귀자들 일백 명은 무당산으로 먼저 움직였다. 그들의 뒤를 따라 이동하는 중이다. 독귀자들이 당도하기 전에 결과를 내겠다는 장효의 말이 무색해진 상황이다. 그래서 더욱 집중하고 있다.
“당문은 우리 곁에서 저희의 의도대로 상황을 만들어나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한 상황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 당문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만들 거다. 우린 이용한다. 마지막엔 당문의 목을 친다.”
종패와 함윤은 강렬한 눈빛으로 목계백과 교감했다. 그러다 함윤이 툭 뱉었다.
“명세기, 그자가 걸리적거릴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건 나뿐인가?”
종패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자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고 뭘 하겠나?”
목계백은 차가운 미소로 입을 열었다.
“그자는 무시할 만한 자는 아니야. 하지만 천하를 욕심낼 자도 아니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함윤이 말했다.
“무영사 진영이나 잘 지키면 좋겠다.”
“그건 걱정마라. 백혈맹이 무영사로 병력을 보내진 않을 거다. 저희의 심장과 머리에 해당하는 소림과 무당 중 무당산을 노리는 행보다. 지금쯤이면 파악했겠지. 무당본산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우리 뒤를 치러 올 거다. 무영사를 공격한다고 해도 남아 있는 병력이면 방어가 가능할 거다.”
잠시 말을 끓고 강물을 응시한 목계백은 다시 목소리를 이었다.
“그곳은 명세기의 재량에 맡겨야겠지. 어쨌든 우리가 상대할 건 백혈맹 정예들이다. 그들은 차제에 우리의 세력을 와해하려 시도할 거다. 당문은 그러한 점을 동시에 이용하는 수를 쓰고 있는 거지. 그 중간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방법은 분명하다. 당문과 백혈맹을 의도를 충돌케 하는 거지.”
종패가 찌푸린 미간으로 물었다.
“생각을 옳고 말은 가능하다만, 쉽게 이뤄질 일이겠나?”
함윤도 이어 말했다.
“그러하자면 우리에게 대비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 당문의 독에 대응할만한 수단이 먼저 확보되어야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그건 아직 준비가……”
목계백의 시선이 오독문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시선을 느끼고 있었는가? 군막을 열고 장효가 나왔다. 환한 미소를 짓는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보인다. 아주 밝은 미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