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79
3.
무영사에서 맞는 새벽은 쉽지 않았다. 명세기는 역시 잠 못 들고 침상에서 일어섰다. 뒤척이던 잠꼬리마저 어느샌가 싹 달아나고 눈이 말똥말똥했다. 처소를 나가 가을을 알리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진영을 거닐었다.
‘부맹주라……’
허탈한 미소가 저절로 입가에 맺혔다.
조소다. 대상을 정한 것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비웃음이다.
항주를 떠나 이곳 무한으로 와서 맞이한 결과가 부맹주의 자리다.
항주무림맹이란 이름은 이제 무림맹으로 변하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할 테지만 달갑지가 않다. 아니, 울화가 쌓인다.
걸음을 멈추고 무영사 앞의 개활지를 바라보며 명세기는 중얼거렸다.
“명세기야, 지금부터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직언하며 명세기는 이를 악물었다. 대호검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현실이다. 치열한 현실 속에 있는 거다. 그걸 망각해선 안 된다.
잊고 방심하는 순간 도태된다. 그러한 자들을 여태까지 보아왔다.
혁리세가와 남궁세가, 제갈세가와 팽가와 황보가와 혈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 한순간이다.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일이야, 하지만 여기서 그칠 순 없지.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목계백이 가져다준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붙잡고 껴안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가문과 문파들처럼 될 터이다.
그토록 위명을 떨치던 자들도 하루아침에 쓰러졌다. 그들이 누리던 부귀권세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게 강호다. 잡아먹지 못하면 먹히는 것, 가혹한 세상의 진리를 잊어선 안 된다.
‘맹호, 네놈은 모든 걸 처음부터 계획했어, 분명해.’
새벽별을 보며 명세기는 맹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무시무시한 놈을 휘하에 두고 부렸다고 생각하면 오한이 인다.
명확히 말하자면 부린 건 아니다. 오히려 그놈에게 부림을 당한 거다.
이제는 그렇다는 걸 안다.
아니 진즉부터 알았다.
그래서 경계하고 조심했지만, 놈은 비웃듯이 엄청난 일을 계속 만들어냈다.
무서운 놈이다. 대동보에 나타난 시작부터가 그놈의 계획이다.
선을 그은듯한 명확한 계획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비금도의 정벌에 참여코자 한 게 분명하다.
그게 그놈의 시작이었던 거다.
‘놈이 노리는 게 대체 무엇일까?’
미간을 좁힌 채 명세기는 그것에 몰두했다. 항주에서도 내도록 생각하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모르겠다. 천하에 뜻을 품었다고는 했지만, 진실로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무엇보다 의문스러운 건 놈이 당문 이가주 당대천이 거론한 자를 알고 있다는 거다.
혈란의 배후자라는 인물이다.
그런 자가 정말로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데 목계백은 이름을 말했다.
‘목응신라……’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당대문의 말에 의하면 그자는 당문마저도 이용해 현재의 혈란을 조장한 인물이다. 그자에게 넘어간 당가의 장녀는 강호에서 죽었고, 당문은 청광이라는 암기제작기법을 도둑맞았다.
그것을 목응신라가 소뢰음사로 가져가 흑혈섬으로 만들었다. 해남파를 멸문하여 소뢰음사로 가게 한 것도 그이니, 결국 혈천의 태동은 그가 씨를 뿌린 거다. 무서운 자다. 현재 일어나는 전쟁은 그로 인한 결과다.
미간에 깊은 골을 그린 명세기는 개활지를 비추는 별빛을 노려봤다.
‘아무도 모르던 강호의 내막, 막후인물의 이름을 아는 놈, 맹호……’
강렬한 안광을 칼날처럼 뿜어내던 명세기는 부득 이를 갈며 다짐을 흘려냈다.
“네가 누구든, 무엇을 목적하든, 더는 네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겠다.”
결의의 칼날을 예리하게 세운 명세기는 진영 안으로 몸을 돌렸다.
“이 새벽에 너희의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구나.”
진정 어린 목소리로 비격과 모금량을 어루만지며 명세기는 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륵하며 잔을 채우는 술의 빛깔은 벽록색이다.
싸구려 화주가 아니다. 다탁 위에 놓인 안주는 최상품임을 냄새로 증명하는 육포다.
“자, 한 잔씩 들자.”
먼저 잔을 든 명세기는 비격과 모금량에게 권했다.
송구하고 감읍한 표정을 만들고 시선을 내린 채 둘은 잔을 들었다.
벽록색 술 빛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전시이고 군영 안임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물건들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이 새벽의 느닷없는 상황이다.
비격과 모금량이 잔을 넘기자 명세기는 다시 두 번째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너희와 술잔을 기울인 기억이 거의 없구나. 한가족과 같은 사이인데도 사는 일에 쫓기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다 보니 그리됐구나. 그래서 내가 가슴에 가시가 박혀 있다. 자식과도 같은 너희이기에 그렇다. 서운할 것을 알지만 조금만 참아다오. 여기까지 같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같이 한다면 웃는 날이 올 것이다. 모든 걸 누리며 웃는 날이다.”
시선을 내린 채 모금량이 말했다.
“보주님의 은덕을 저희가 어찌 잊겠습니까? 거리에서 죽을 뻔한 목숨을 거두어주시고 이만큼 만들어 주신 분이 보주님이십니다. 그 은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명이 다하는 날까지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입니다. 보주님의 염원은 곧 저희의 것, 분골쇄신하여 따르겠습니다.”
비격이 이어 말했다.
“한시도 보주님의 은덕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가슴에 깊이 새기고 살고 있습니다. 전장의 한가운데 온 마당, 보주님의 염원이 더욱 가까이 온 것을 느낍니다. 항주를 떠나서 무한으로 왔듯이, 대동보의 깃발이 종내에는 천하에 휘날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명세기는 두 번째 잔을 들었다.
“하하하, 너희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천하를 얻은 듯하구나. 자 들자.”
비격과 모금량은 명세기가 잔을 넘기는 것을 보며 두 번째 잔을 넘겼다. 곧바로 세 번째 잔을 채워 준 명세기는 두 사람의 눈을 직시하고 말했다.
“비격의 말대로 전장의 한복판, 진영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책임, 이번 잔으로 술잔을 엎겠다.”
마지막 잔을 명세기는 단숨에 넘겼다.
비격과 모금량도 즉시 잔을 비웠다.
세 사람은 동시에 잔을 내려 엎어 놓았다. 명세기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가 목계백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다만, 목계백은 끝까지 모든 걸 함께 하기엔 위험한 자다.”
비격과 모금량은 순간적으로 냈던 눈빛을 갈무리함과 동시에 시선을 다탁으로 내렸다. 공손하게 명세기의 말을 듣는 것 같은 그 속에서 생각했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품어왔던 속셈을 드러내는군.’
단호하지만, 그 단호함이 비격과 모금량에게 향한 것이 아닌 목소리로 명세기는 말을 이어냈다.
“목계백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목적을 가졌다. 그게 뭔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그가 여태까지 만든 일은 놀랍고 엄청나다.”
비격과 모금량의 반응을 살피며 명세기는 음성에 힘을 실었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현재에까지 결과를 만들어 왔다. 그 이유는 그의 목적에 있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안위다. 목계백으로 인해서 우리가, 대동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강호의 무인으로 태어나 사는 자가 우리다.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그러나 이용당하는 건 다르다.”
더욱 강렬한 힘을 실어 명세기는 두 사람을 흔들었다.
“목계백은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 여태까지 그래 왔다. 그는 모든 걸 이용하고 있다. 녹림과 장강수로채와 오독문까지 끌어들였다. 그러한 그의 능력은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녹록치 않다.”
비격과 모금량은 시선을 내린 채 듣고만 있었다.
“사천에 숨어서 힘을 기르던 당문이 나왔다. 그들이 강호를 향해 독을 뿌리려는 이유를 너희도 이젠 알 것이다. 당대문의 말에 의하면 그 가문의 장녀가 구룡회의 인물들에게 죽었다. 목응신라라는 인물에게 이용당했다. 그 원한을 풀고자 당문이 나온 거다. 백혈맹을 치기 위해 본맹과 연수를 하자는 그들의 뜻은 명확하다. 종내에는 우리도 칠 것이다.”
비격이 탁자 아래로 내린 손을 움켜쥐고 모금량이 땀을 닦는 동안 명세기는 계속 말했다.
“당문이건 백혈맹이건, 그들의 뜻이 어떠하고 우리를 어찌 이용하고 죽이려 하건, 그러한 것들이 두렵지는 않다. 강호의 칼 밥을 먹는 무인들이 그런 걸 두려워했다면 벌써 죽었겠지. 우린 비굴하게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무인으로서, 사내로서 품은 뜻을 펼치고 죽을 것이다.”
이글대는 열기를 눈동자에 품은 명세기는 입으로 거듭 토해냈다.
“그러한 만큼 타의에 의해서 꼭두각시처럼 살다가 죽을 수는 없다. 우리가 그러기 위해서 숨 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와 목적을 이루고자 살고 있는 거다. 천하를 차지하려는 쟁패에서 우리는 남의 도구가 아니다. 그렇게 되어선 절대로 안 된다. 그렇게 하려는 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꼭두각시가 아님을, 저희의 숨통을 끊을 자들이라는 것을.”
불같은 열기가 배인 음성을 쏟아낸 명세기는 제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지 술병을 잡고 벌컥대며 마셨다. 술잔을 엎자던 말이 무색하게 술을 넘기는 그의 얼굴엔 술기운이 없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명료했다.
“너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다.”
술병을 내리고 입을 연 명세기는 비격과 모금량의 눈동자를 직시하고 남은 말을 던졌다.
“목계백을 죽여야 한다.”
* * *
“당문의 독 중에 갈혈귀독(渴血鬼毒)이란 것이 있소.”
장효의 목소리에 목계백을 비롯해 종패와 함윤은 귀를 기울였다. 오독문이 만독비경을 연구하는 군막 안엔 이상한 냄새가 가득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당문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무형지독에 비할 것은 아니나, 당문이 지닌 독중에 강력한 것이오. 접전 시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독으로서, 중독된 자는 피가 마르고 갈증을 느끼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 가게 되오. 그 고통 때문에 죽기 전 제 손으로 피부를 찢게 되는 무서운 독, 그것의 해독제를 찾았소.”
함윤이 눈을 크게 뜨고 반색했다.
“정말입니까?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종패와 목계백의 비슷한 얼굴을 미소로 본 장효는 이야기를 이었다.
“어젯밤에 이야기하지 않고 이 새벽에 알리는 이유는 시험을 거쳐야 해서였소. 당문의 갈혈지독은 본문에서도 지니고 있었던바, 밤사이에 해독제를 만들어 직접 시험하였소. 결과는 아주 놀랍고 대단한 것이오.”
목계백과 종패와 함윤은 이제 이해했다. 어젯밤 세 사람이 이야기 끝에 본 장효의 밝은 미소는 그러했던 것이다. 획기적인 진척이 있음을 예상은 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그 결과가 이제 나왔다. 시험까지 거친 결과다.
미소띤 얼굴의 장효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만독비경 상의 제독기법과 해약기법을 연구하여 얻은 첫 번째 결실이오. 그 효용이 예상을 넘어가는 경지요. 역시 만독자 조사의 능력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소. 독에 대한 기왕의 지식과 인식을 뒤집어엎는 놀라운 내용이었소. 그 토대로 만든 해독약은 당문의 갈혈귀독은 물론 대부분의 독에 대해 해독작용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오.”
자부심 가득한 장효의 얼굴을 응시하며 종패가 물었다.
“당문의 독 대부분을 막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맹주의 말씀대로입니다. 무형지독을 제외하면 당문의 거의 모든 독을 방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별적인 시험을 해봐겠지만 확신합니다. 아주 유용한 수단을 확보한 것입니다. 조사의 은덕이지요.”
만독자를 다시 칭송하며 흡족해하는 장효에게 목계백이 찬물을 끼얹었다.
“무형지독에는 효력이 없는 겁니까?”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장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무형지독은 독중지독, 그것을 해독하는 것은 오직 당문만이 가능하오. 하지만 해보겠소. 만독비경이 있으니 불가능할 거라고 보지 않소. 시간이 걸리고 더욱 큰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반드시 해내고 말겠소.”
고개를 끄덕인 목계백은 물었다.
“해독제의 생산에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종패와 함윤의 시선까지 받아내며 장효는 대답했다.
“현재 가진 재료만으로는 백여 명이 복용할 분량을 만들 수가 있소. 시간은 하루 정도면 되오. 그러나 진군 중인 본맹의 전체 인원이 복용하자면……”
녹림이 사천, 장강수로채가 이천, 명세기가 대동하고 온 흑호단이 이천이다. 무영사에 모였던 전체병력은 팔천이었다. 그중에 녹림병력 이천과 흑호단 일천, 장강수로채의 일천이 진군 중이다. 딱 절반인 사천이다.
미간을 좁혔던 장효는 자신감있게 말했다.
“재료만 확보된다면야 사흘 만에 해낼 수 있소. 만독자 어른의 기법이 놀라운 것이 또한 이러한 면이오. 특별히 어렵고 난해한 과정이 없소. 결과에 이르기만 하면 물흐르듯 나아가게 되어 있소. 재료 역시 특별한 것이 없소. 주변 산야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것이오. 더 좋은 점은 지금의 계절이오.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든 시기, 겨울을 준비하는 초목과 독물들이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는 것이오. 아주 좋은 시기요.”
목계백은 종패와 함윤과 시선을 맞췄다. 세 사람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 따로 인원을 차출해서 재료 모으기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지.”
함윤의 말 뒤로 종패가 말했다.
“녹림이 맡겠다. 산야를 뒤지는 일은 우리가 제일 잘할 거다.”
뒤이어 목계백이 입을 열었다.
“당대문과의 접선 이전에 준비하도록 최선을 다하자. 그들이 무당산에 어떠한 독을 풀어놓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알리고 해독제를 줄지 아직 모르지만, 결국 그들의 뜻은 우리를 제거함이다.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들에게 보여주자. 무당산은 우리가 접수한다.”
독약냄새가 가득한 군막 안에서 네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