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141
140. 적호방주
“흐, 흐흐, 흐흐흐.”
거력도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대도와 팔을 바라봤다.
이십 년 넘게 낭인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던 무기를 이런 식으로 놓게 될 줄이야.
고통보다는 짙은 허무함이 몰려왔다.
“이 거력도가 저런 핏덩이에게 쓰러지다니.”
이어진 감정은 분노였다.
거력도는 핏발선 눈으로 위지천을 노려봤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놈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현실은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력도는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 없었다.
‘저 애새끼는 날 못 죽인다. 사람을 죽일 용기가 없는 놈이야. 그러니 살초를 펼치려고 할 때마다 검로를 틀었던 거겠지.’
한참 잘못된 판단이었지만, 거력도는 제 생각만 믿고 당당하게 굴었다.
“내 동생들은 어디 있지? 설마 이미 죽이고 온 거냐?”
“다른 선배님들과 싸우고 있을 거예요. 선생님이 웬만하면 죽이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살아 있을 수도 있어요.”
납검을 한 위지천은 다시 평소의 소심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거력도는 방금 위지천이 한 말에서 한 단어를 곱씹었다.
“선생님? 혹시 그놈이 이 모든 일을 꾸민 거냐?”
위지천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죠? 하루에 버는 돈의 절반을 넘게 빼앗고, 폭행하고, 함부로 죽이고…….”
위지천의 눈에 희미한 살기가 일렁였다.
소년은 빈민가를 순찰하면서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보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거력도를 상대로 살검을 자제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지금도 소년의 귓가에서는 살검이 속삭이고 있었다.
‘죽여라.’
때문에, 위지천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무공도 강하고, 신체도 건강하잖아요. 일이 없다면 농사라도 지으면 될 텐데…….”
위지천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도망자 생활을 했다.
그들은 대부분 산으로, 산속 화전마을로 숨어다녔다.
어디서든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잠시나마 한곳에 머물며 사귀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꾀죄죄하지만 순박하고 착했던 아이들.
그리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행복해할 줄 알았던 아이들.
빈민가를 순찰하면서, 이곳에서도 비슷한 아이들을 보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죽여라.’
위지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싸움에서는 이미 이겼지만 살검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거력도는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농사? 세상 물정 모르는 핏덩이가 날 놀리는 거냐? 꼬마야. 잘 들어라.”
거력도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위지천의 앞으로 걸어와 이죽거렸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거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빼앗고, 잡아먹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네놈도 그 잘난 검으로 날 병신으로 만들지 않았더냐?”
낄낄거리는 거력도의 입에서 역겨운 입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는 위지천이 자신을 절대로 죽이지 못하리라는 걸 확신했다.
그래서 싸움에서 졌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분풀이를 하며 위지천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거력도가 말을 이었다.
“결국 네놈도 나랑 똑같이 될 거다. 아니, 정파의 위선자들이 한술 더 뜨더군. 앞에서는 협객 놀이를 하면서, 뒤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일에 다 엮여 있거든. 너는 상상도 못 할 거다.”
“…….”
위지천은 말없이 거력도를 올려다보았다.
일검이면 저 두꺼운 목을 베어 버릴 수도 있고, 심장을 찔러서 터트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일부러 얕게 베서, 아주 오랫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서서히 죽게 만들 수도 있었다.
‘죽여라!’
살검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검을 맞대고 싸울 때보다 오히려 더 강한 유혹.
상대는 세상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였다.
‘그렇다면, 죽이는 것이 세상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지 않을까?’
위지천의 마음이 흔들리는 줄도 모르고, 거력도는 말을 이었다.
“너도 역겨운 협객 놀이는 빨리 관둘수록 좋을 거다. 참으면 참을수록 나중에 더 뒤틀리기 마련이거든. 흐흐.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만…….”
위지천이 고통스러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본 거력도는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그의 눈앞에 있는 핏덩이는 무공의 천재였다.
고작해야 열다섯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이미 절정의 경지를 넘보는 천재라니.
하지만 그래 봤자 약관도 안 된 애송이에 불과했다.
‘잘하면 이대로 심마에 빠뜨릴 수도 있겠군.’
혀로 입술을 할짝인 거력도가 뱀처럼 차갑게 눈을 빛냈다.
무공으로는 이기지 못했지만, 혓바닥으로는 충분히 농락할 자신이 있었다.
“흐흐. 눈빛이 볼 만하구나. 날 죽이고 싶냐? 하지만 날 죽이면 너도 똑같은 놈이 될 텐데?”
“그마안…….”
앞길이 창창한 후기지수를 자신의 손으로 더럽히고, 타락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거력도는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닥쳐, 이 새끼야!”
어디선가 짱돌이 날아와 거력도의 머리를 노렸다.
거력도는 고개를 젖혀 돌을 피했다.
“어디 계속 씨불여 봐. 아가리를 쫙 찢어 줄 테니까.”
다쳐서 나가떨어진 줄 알았던 철두가 성큼성큼 걸어와 위지천 옆에 섰다.
그 모습을 본 거력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하. 철두 이 새끼, 많이 컸네. 내가 팔 한 짝 없다고 너한테 당할 것 같으냐?”
거력도는 철두는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동시에 힐긋 위지천을 바라봤다.
위지천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음속에 스며든 심마와 싸우는 듯, 혼잣말로 “그만…….”을 계속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면…….’
거력도는 도망칠 빈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한쪽 팔이 잘려서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신법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펼칠 수 있었다.
기습적으로 장풍을 날린 후에 바로 몸을 돌려 도주한다면…….
주변을 포위한 철두파 놈들 따위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계산을 끝낸 거력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였다.
“후우…….”
위지천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귓가에서는 여전히 살검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지만, 소년은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거력도. 전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력도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역시 정파 애송이답군. 그럴 줄 알았다. 네놈들이 하는 짓이 항상…….”
“하지만.”
상대의 말을 끊은 위지천이 씩 웃었다.
옆에 있던 철두가 흠칫 놀랄 정도로, 백수룡의 것과 닮은 미소였다.
백수룡이 제자들을 패기 직전의 표정 말이다.
“죽이진 않더라도, 다른 건 해도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뭐? 무슨 소리야?”
“저희 선생님이요.”
위지천은 허리춤의 검을 검집째로 끌러냈다.
그리고 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거력도에게 걸어갔다.
눈이 반쯤 돌아간 위지천이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뒈져도 정신 못 차릴 새끼들은, 차라리 뒈지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패놓으라고 가르쳐 주셨거든요.”
“자, 자, 잠깐만! 뭐 그딴 선생이…….”
위험을 느낀 거력도가 뒷걸음질 쳤으나, 그보다 먼저 위지천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히히.”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위지천이 작게 웃었다.
어느새 거력도의 품 안으로 파고든 위지천이 아래에서 위로 검집을 휘둘렀다.
턱주가리에 정확히 작렬하는 일격!
빠아아악!
단 한 번의 공격에 거력도의 거구가 허공에 붕 떴으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위지천은 거력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두들겼다.
빠바바바바박!
“죽어! 죽어! 죽어! 아니, 죽지는 마! 죽지 말고 죽어어!”
그 순간 머릿속의 살검도 놀란 듯 속삭임을 멈췄다.
‘…….’
약 일각 후,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널브러진 거력도 앞에 위지천이 멈춰 서서 씩씩댔다.
“후우…… 후우…….”
“저기, 괜찮나?”
철두가 곁에 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순간, 위지천이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오싹.
한순간 느껴진 살기에, 철두는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슨 살기가…….’
웬만한 살기에는 놀라지 않는 철두가 마른 침을 삼킬 정도였다.
그만큼 억눌리고…… 터지기 직전의 살기였다.
위지천이 간신히 말했다.
“……거의 죽일 뻔했어요. 아니, 때리는 와중에도 계속 죽이고 싶었어요.”
“…….”
위지천은 아직도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백수룡이 해 준 조언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고 있었지만, 정말로 살기를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어…… 잘했다.”
철두가 어색하게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무인이었지만, 어쨌든 어린애니까 형으로서 위로해 주었다.
“잘 참았어. 새꺄.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헤헤. 감사합니다.”
어느새 순박한 얼굴로 돌아온 위지천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철두가 쓰러진 거력도의 다리를 잡아 질질 끌며 말했다.
“슬슬 돌아갈까?”
“네!”
철두파, 아니 갱생문이 자리를 정리했다.
거력도가 데려온 제자들은 진작 항복했고, 싸움의 흔적만 치우면 되었다.
“그런데 청룡학관 애들은 다 너처럼 강하냐? 너 일학년이라며?”
철두의 질문에 위지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선배님들은 다 저보다 강하세요.”
“너, 너보다 강하다고?”
위지천이 겸손을 떨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철두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청룡학관 애들은 모두 괴물이구나…….’
돌아가면 갱생신공, 그리고 굉천부를 죽어라 익혀야겠다고 다짐하는 철두였다.
그때 아삼이 다가와 철두에게 보고했다.
“철두야. 정리 다 끝났다.”
“오냐. 돌아가자.”
그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려 할 때였다.
“재미있구나.”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 위지천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끼며 돌아섰다.
채앵!
자기도 모르게 뽑아 든 검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흐흐흐. 반응 좋고.”
“…….”
봉두난발의 사내가 건물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 역광을 받은 사내는 검은 인영처럼 보였지만, 두 눈만은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가 아래로 휙 뛰어내리더니 위지천을 향해 걸어왔다.
“근처에서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해서 나와 봤더니,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적호방주…….”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철두가 나직이 신음했다.
“폐관 수련 중이라고 들었는데.”
“음. 네 이름이…… 철두였나? 폐관 수련은 방금 끝났다. 작은 깨달음이 있었지.”
뿌듯한 표정으로 웃은 적호방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위지천을 바라봤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야. 살검을 익혔더구나.”
“…….”
“그런데 왜 억누르는 거냐? 억지로 참으니 검초가 흔들리고, 그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니 심마가 생기는 것이다.”
“…….”
“벙어리는 아닌 것으로 아는데. 여기 있는 것들을 몇 놈 죽이면 입을 열 테냐?”
적호방주가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위지천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살검을 제 의지로 조절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틀렸다.”
적호방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살검은 억눌러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몸을 맡기고 하나가 되어야 다음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
“에잉. 잘못 배웠구나. 잘못 배웠어. 누가 가르쳤는지 엉터리다. 엉터리야.”
같은 말을 반복하던 적호방주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히 웃었다.
“아이야. 내가 제대로 된 살검을 가르쳐 주마. 내 제자가 되거라.”
“싫습니다. 제 스승님은…….”
“네 생각은 상관없다.”
그 순간, 시뻘겋게 물든 손톱이 위지천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