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156
155화. 혈교의 유산 (4)아주 낡은 검이었다.
적어도 수십 년, 어쩌면 백 년은 되었을 법한 오래된 물건.
검을 이곳에 가져다 놓은 자들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창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시피 했다.
하지만 백수룡은 그 검을 본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다.
백수룡은 그 앞으로 걸어가 검을 살펴보았다.
“……맞구나.”
세월에 풍화된 탓에 검집 곳곳이 벗겨져 있었고, 수실이 달려 있던 자리에는 불에 그슬린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백수룡은 낡은 검을 들어서 조심스럽게 먼지를 쓸어내렸다.
“검혼……. 오랜만이구나.”
이 낡은 검은 검존의 것이었다.
천하제일검수와 수십 년을 함께한 동반자.
아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누구도 꺾지 못했을 무인의 혼.
백수룡은 검존이 아련한 표정으로 검을 쓰다듬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 검에는 나의 혼이 담겨 있다.
그래서 검혼이었다.
사실, 검혼이 아주 뛰어난 검은 아니었다.
백수룡이 지금 사용하는 월영만 해도, 검의 예기나 단단함으로만 보면 검혼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명의 무인에 의해 오랫동안 길이 든 물건은, 스스로 기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우우웅!
검집에서 검을 절반쯤 뽑자, 검혼이 맑은 검명을 냈다.
마치 그 안에 있는 검존 사부의 혼이 공명하는 듯했다.
-반평생을 함께한 녀석이다. 지금은 나처럼 늙고 낡았지만…… 아직은 쓸 만하지.
쉽게 볼 수 없었던 검존 사부의 미소.
그 미소를 떠올리자, 혈수귀옹와 싸우는 내내 싸늘했던 백수룡의 얼굴에도 온기가 스며들었다.
“검존 사부. 검혼은 제가 잘 수습하겠습니다.”
백수룡은 검혼을 보자기에 싸서 갈무리했다.
검혼을 무기로 쓸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검이지만, 왠지 자신이 사용할 무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른 사부들이 남긴 것도…….”
백수룡은 보물창고 안을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부들의 유품은 없는지 확인했다.
혈수귀옹에게 ‘이곳에 혈교의 유산이 숨겨져 있다’라고 들었을 때부터, 그는 네 사부의 유품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른 사부들의 유품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야겠군.”
지하로 들어온 지 벌써 한 시진 가까이 지났다.
백수룡은 당장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을 정도로 몸이 피곤했지만, 위에 남겨진 제자들이 걱정돼 반 각만 운기조식을 한 후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수중에 혈옥이 있었지만, 나중에 제대로 된 준비를 해 두고 흡수할 생각이었다.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백수룡이 보물창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쿠우웅!
천장에서 벽이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백수룡은 소매로 코를 틀어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어쩐지 쉽다 했더니…….”
그는 곧바로 월영을 뽑아 들었다. 압축한 검강으로 문을 베어내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때, 연기가 닿은 벽에 서서히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자여. 본좌는 혈마신교의 이장로 마뇌라 한다.
“마뇌!”
그 이름을 본 순간 백수룡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뇌.
자신에게 네 사부의 무공을 훔치게 한 후, 토사구팽하려고 했던 혈교의 이장로.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역천신공의 계승자이거나, 그 많은 기관진식을 파헤치고 보물을 훔치러 온 도적이거나.
“보물을 훔치러 온 역천신공의 계승자다, 이 개새끼야!”
백수룡은 욕설을 내뱉으며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까가가각!
압축검강이 마뇌가 남긴 글을 난도질했다.
그러나 백수룡이 생각했던 것보다 천장에서 내려온 벽은 단단했다. 압축검강으로도 그리 많이 베어내지 못했다.
백수룡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철로 만든 건가? 이러면 문을 베어낸다고 해도 애들을 구하러 갈 내공이 남아 있을지…….’
백수룡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 순간에도, 벽면에는 마뇌가 남긴 글이 계속 나타났다.
-하여, 본좌는 그대의 자격을 시험하려 한다.
“자격?”
-지금 흘러나오는 독은 보통의 무인에게는 극독이지만, 역천신공을 익힌 무인에게는 영약이 된다.
-그대가 역천신공의 계승자라면 지금 당장 혈옥을 섭취하고 운기조식을 시작하라.
“이게 무슨…….”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백수룡의 눈이 커졌다. 마뇌가 벽면에 남긴 글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대가 역천신공의 계승자라면 오늘 천고의 기연을 얻을 것이고, 보물을 노리고 들어온 도적이라면 피를 토하며 죽게 될 것이다.
“하, 하하…….”
백수룡은 헛웃음을 흘렸다.
혈교의 보물을 숨겨 둔 장소에 이런 안배까지 해 두다니. 마뇌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동시에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짓궂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뇌여. 네가 안배한 보물이 내 손에 들어오다니. 혈교에서 가장 머리가 뛰어난 너도 이런 일은 상상조차 못 했겠지.”
그 순간, 마뇌가 남긴 마지막 말이 벽에 나타났다.
-……부디 그대가 역천신공의 계승자이자, 본교를 부활시킬 후대의 혈마이길 바란다.
“바랄 걸 바라야지, 이 새끼야.”
백수룡은 혈옥을 한입에 삼킨 후,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위에 남아 있는 제자들이 걱정되었으나, 지금은 모든 번뇌를 끊어내고 운기조식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마뇌. 네가 남긴 보물은 내가 전부 챙겨 주마. 혈교를 박살 내는 데 아낌없이 사용할 테니, 지옥에서 잘 지켜보고 있으라고.”
중얼거린 백수룡은 이내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집중했다.
* * *
헌원강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자꾸만 눈으로 들어가 시야를 방해했다.
손등으로 피를 대충 닦아 내며, 헌원강은 등을 맞댄 후배들에게 물었다.
“다들 살아 있냐?”
“그럭저럭.”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야수혁. 여민. 위지천.
셋 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단정했던 무복은 피로 점철되었고, 찢어져 드러난 몸에 상처만 해도 다들 십여 곳이 넘었다.
특히 헌원강은 왼쪽 허벅지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 부위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여기서 살아나가더라도…… 평생 절름발이가 될지도 모르겠군.’
무인이 다리 병신이 되게 생겼는데,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헌원강은 큭큭 웃으며 피 묻은 도를 들어 올렸다.
“너무 많이 베어서 그런가.”
“…….”
그들이 뚫고 나온 길은 피로 만들어져 있었다.
베어 넘긴 적이 스물을 넘긴 후로는 세어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적들에게 포위돼 있었다.
“독한 놈들 같으니…….”
마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 싸우지 않았기에 마의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손에는 여전히 해독제를 든 채로, 마의가 살기를 내비치며 말했다.
“그만 포기하고 투항해라. 슬슬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지는구나.”
“지랄. 아까부터 우릴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나 있었으면서?”
“저놈이……!”
헌원강이 히죽 웃으며 대꾸하자, 마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실, 악인들은 진작부터 그들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네 명은 정말 끈질기게도 버텼다.
“애송이들인 줄 알았더니…….”
“다들 무공이 한가락 하잖아.”
“독기도 보통이 아니야.”
학생들을 포위한 악인들도 질린 표정이었다.
그동안 백수룡에게 지독하게 단련된 덕분에, 네 명의 기본기와 체력, 끈기는 악인곡의 그 어떤 악인들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점점 한계였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내공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생님은…….”
여민의 한마디에, 다들 백수룡과 혈수귀옹의 기가 충돌하던 장소를 바라봤다.
지금은 두 사람의 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민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어떻게 됐을까? 설마…….”
“언제까지 선생님만 찾을래?”
헌원강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칭얼거리지 말고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
“……알겠어요.”
무언가 말하려던 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강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기약 없는 도움을 기다릴 때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할 때였다.
그러기 위해서 배운 무공이니까.
헌원강이 이를 갈며 말했다.
“여기서 살아남으면, 다들 더 죽도록 수련하자고. 다시는 이딴 수모를 겪지 않도록.”
“알았어요.”
“당연하지!”
“네…….”
악인곡에서 생사를 건 싸움을 겪으며, 네 학생은 또다시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살아남아야 그 성장에 의미가 있을 터였다.
“죽여라!”
마의의 명령에 악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살기를 뿌리며 달려드는 적들을 상대로,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맞섰다.
헌원강이 선두로 나서며 소리쳤다.
“뚫고 나간다!”
다들 더 이상 제 상처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무아지경에 빠져 싸웠다.
그 와중에도, 헌원강은 독에 당한 위지천을 신경 썼다.
“위지천! 괜찮냐?”
“네…….”
간신히 대답은 했지만, 위지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마에서 열이 펄펄 끓었고, 시야는 흐릿해져서 사물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하지만 위지천은 그 와중에도 열이 넘는 적을 베었다.
서걱!
순간순간 번뜩인 검격은, 위지천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덤벼든 악인들의 목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풀썩.
비틀거리던 위지천은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위지천!”
야수혁이 쓰러진 위지천을 등에 업었다. 헌원강이 사납게 도를 휘두르며 정면에서 길을 뚫었다.
여민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원강 선배! 나한테 마지막 방법이 있어요.”
“마지막 방법?”
“하지만 다 같이 죽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해 볼래요?”
“무슨 방법인데?”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요!”
“……젠장! 까짓거 뭐라도 해 봐!”
숨을 크게 들이마신 여민이 내공을 담아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다들 멈춰! 더 다가오면 여기서 벽력탄을 터트릴 거야!”
그 외침에 덤벼들던 악인들이 움찔했다.
“벽력탄?”
“저 계집이 방금 뭐라는 거야?”
“어디서 수작을…….”
“잘 봐!”
허세가 아니라는 듯, 여민은 품 안에 손을 넣어 주먹만 한 검은 구슬을 꺼냈다.
“이게 벽력탄이야! 터트리면 최소한 반경 이십 장 안에 있는 놈들은 다 죽어!”
여민이 바락바락 악을 쓰자, 악인들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그러자 마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거짓말이다. 벽력탄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데 저런 계집이 가지고 다닌단 말이냐?”
“못 믿겠어? 저승에 가서 후회하시든가!”
여민은 들고 있던 벽력탄을 허공을 향해 힘껏 던졌다.
“어, 어어어!”
“피해라!”
벽력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악인들은 일단 몸을 뒤로 물리며 몸을 사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여민이 헌원강을 부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선배!”
헌원강은 그 즉시 도풍을 날렸다.
예리한 도풍이 정확히 벽력탄의 폭발 장치를 베었다.
그 순간,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쾅!
여민이 던진 벽력탄은 진짜였다.
허공에서 폭발한 그 여파는 반경 이십 장에 미쳤고, 주변에 있던 악인들 대부분이 폭발에 휘말리거나 날아갔다.
잠시 후.
“콜록! 콜록!”
바닥에 엎드렸던 학생들이 몸을 일으키며 기침을 했다.
폭발의 순간 외공을 익힌 야수혁이 모두를 안고 납작 엎드린 덕분에, 다들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헌원강이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미친…… 진짜 벽력탄이었어?”
“진짜라고 했잖아요. 하나뿐인 거였는데…….”
“벽력탄을 들고 다니다니. 너도 어지간히 미친년이다, 정말.”
폭발의 여파는 굉장했다. 사방에 옮겨붙은 불길이 건물을 휘감으며 타올랐다.
치솟는 화염과 폭발에 휘말린 시체들.
악인곡에 한편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빨리 도망쳐요. 벽력탄으로도 다 죽이진 못했으니까.”
“……그래. 도망치자.”
야수혁이 위지천을 업고, 여민이 다리를 다친 헌원강을 부축했다.
그들은 벽력탄이 터진 혼란을 틈타 악인곡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금세 추격이 붙었다.
“절대 놓치지 마라!”
“놈들을 반드시 잡아 죽여!”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악인들, 아니 마귀들이 학생들의 등 뒤에 따라붙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다시 포위되었다.
“빌어먹을…….”
“……여기까진가.”
“재수도 없지, 정말.”
“…….”
도주를 포기한 학생들이 마지막 일전을 각오했을 때였다.
휘이이이잉-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밖이 소란스러워서 와 봤더니. 밤중에 불놀이를 하고 있었구나.”
“!!”
뒷골이 서늘해지는 목소리.
악인곡을 휘감은 거대한 불길이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써늘한 한기가 대신했다.
싸아아아아.
한 사람이 불러온 한기가, 불지옥이 된 악인곡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악인들이 고개를 들어 한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봤다. 얼어붙을 듯한 한기에 전신이 오들오들 떨렸다.
“구, 구음마녀…….”
달빛을 등진 백발의 여인.
구음마녀가 자신이 만들어 낸 얼음 위에 서서 발아래 무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