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266
265화. 명을 내려주신다면
백수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위지열의 뒤통수를 내려봤다.
“어르신.”
오체투지(五體投地).
노인은 두 팔꿈치와 무릎,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극상의 예를 취하고 있었다.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수치심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혈마가 아닙니다. 혈교와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
위지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조차 쉬지 않고 참았다. 마치 제 숨소리마저 결례라는 듯, 그대로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엎드린 채 백수룡의 말을 경청했다.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어르신을 믿지 못했고, 나중에는 말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지존께 믿음을 드리지 못한 죄, 죽음으로 갚으라 하셔도 따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 위지열은 품에서 비수를 꺼내 백수룡의 발치에 두었다.
“끄응.”
백수룡은 골치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금껏 몇 번이고 혈마로 오해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역천신공을 목격한 혈교의 고수들은 모두 백수룡을 혈마로 오해했다. 그걸 이용해서 정보를 캐거나 위기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위지열은 달랐다.
백수룡은 그의 앞에서 역천신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과거 혈랑대의 후손이라 말하긴 했으나, 혈마라고 오해받을 만한 행동은 한 적 없었다.
‘역시 이것 때문인가.’
백수룡은 손에 들린 검을 바라봤다.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검신에, 승천하는 용 한 마리가 새겨진 검.
하지만 백수룡의 피를 한 방울 머금은 순간, 검신에 새겨진 푸른 용은 핏빛 혈룡으로 변했다.
진동은 잦아들었지만, 검을 쥔 손에 느껴지는 감각으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을 붙잡은 것 같았다.
“이 검. 역천신공에 반응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지존이시여.”
위지열이 여전히 땅에 이마를 댄 채로 공손히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혈마검을 만드신 선조로부터 내려온 본가의 비전(? 傳)으로 철을 제련했습니다. 날카롭고 단단하기가 천하에 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검의 진짜 힘은, 역천신공을 익힌 무인만이 끌어낼 수 있습니다.”
“진짜 힘?”
“혈마검과 함께, 천하에서 유이하게 역천신공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으며, 모든 마(魔)의 천적이자 주인의 의지대로 날카로움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지존께서 바라신다면, 무자비하게 휘두르신다 해도 적에게는 상처 하나 내지 않을 것입니다.”
백수룡은 이런 병기를 부르는 호칭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직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신병이기(神兵利器)로군요.”
위지열이 바닥에 이마를 쿵 찧었다. 감격한 듯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이 위지열의 일생을 걸고, 혈마지존의 격에 부끄럽지 않은 검을 만들었나이다!”
“혈마 아니라니까요.”
백수룡이 한숨을 쉬었다. 오해를 풀려면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제가 역천신공을 익힌 건 맞습니다. 하지만 혈교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정말 우연히 익혔을 뿐입니다. 옛 혈마가 안배해 둔 동굴에서요.”
전부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수십 년 전에 죽은 무공교관의 환생이고, 과거 혈교를 망하게 한 주범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저는 혈교를 증오합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 검으로 놈들과 싸울 겁니다. 그러니 일어나세요. 어르신도 혈교와 인연을 끊지 않으셨습니까.”
그 순간, 위지열은 이마를 땅에서 한 치쯤 들었다가 다시금 강하게 바닥을 찧었다.
쿵-!
“지존이시여! 속하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위지열의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내공으로 이마를 보호하지 않은 것이다.
그 과격한 행동에 백수룡은 입을 쩍 벌렸다.
‘미치겠군. 미리 기막을 펼쳐 놔서 다행이지.’
아까 위지열의 입에서 혈교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기막을 펼쳤다. 두 사람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의심이라니요?”
“본교의 부흥을 위해 힘쓰지 않고 비겁하게 산에 숨어 산 것……. 배교자라 생각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위지열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백수룡이 처음 자신을 찾아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노인은 모든 것을 백수룡이 꾸민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천이의 주화입마조차 계획된 것이었을지도…….’
대체 얼마나 심계가 깊은 자란 말인가!
뼛속까지 밀려드는 공포에 위지열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 자리에서 속하의 죄를 죽음으로 씻겠나이다. 그러니 부디…….”
고개를 든 노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눈이었다.
“제 손자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재능이 출중한 아이입니다. 앞으로 지존의 검이 되어 무림일통에 앞장설 것입니다.”
말을 마친 위지열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몇 번이고 강하게 내리쳤다.
쾅! 쾅! 콰앙!
“어, 어르신! 그만 하세요!”
백수룡이 말렸으나, 위지열은 멈추지 않았다.
콰앙! 콰앙! 콰앙!
내버려 두면 정말로 머리가 부서져 죽을 기세였다.
깜짝 놀란 백수룡이 위지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위지열은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지 못한다면 혀라도 깨물 기세였다.
그 순간, 백수룡의 머릿속에서 위지열을 멈출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멈춰라! 교주령이다!”
“……존, 명.”
본능적으로 멈춘 위지열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백수룡을 올려봤다. 혀를 조금 깨물었는지 입가에도 피가 흘렀다.
백수룡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잊고 있었다.
혈교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광신도 집단이고, 위지열은 그 집단에서도 수뇌부에 속했던 팔대 가문의 가주였다는 사실을.
그는 교주가 원하면 언제든지 목숨도 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자신을 시험했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백수룡은 엎드린 위지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그의 두 눈에 은은한 혈광이 맺혔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목숨을 끊거나, 자해하는 행위는 용서치 않겠다.”
“…….”
혈마안을 본 위지열이 몸을 움츠리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히 약속을 받아 낸 백수룡은 혈마안을 해제하고 입을 열었다.
“잘 들으세요. 나는…….”
백수룡은 사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우연히 고향에 있던 동굴에서 혈마의 유산을 발견해 역천신공을 익혔고, 그 무공을 바탕으로 청룡학관의 강사가 되었다는 것.
위지열에게 말한 혈랑대 역시 동굴에서 알게 된 걸 바탕으로 꾸며 낸 것이며, 악인곡에서 마뇌가 남긴 유산을 발견했다는 것까지.
“악인곡에는 마뇌가 후대의 혈마에게 남긴 무공과 보물, 영약이 있었습니다. 그때 성취가 크게 늘었습니다.”
“마뇌!”
아는 별호가 나오자 위지열이 이를 갈았다. 그의 눈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이제 제 말에 믿음이 갑니까? 저는 혈마가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아서 혈마의 무공을 익혔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위지열은 혼란스러워했다.
백수룡의 말이 앞뒤가 전부 딱딱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연이 있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될 만한 내용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노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말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역천신공을 익히셨으니 교주가 될 자격을 갖추신 것은 분명합니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혈교에는 이미 교주가 있을 텐데요.”
“……정말 모르시는군요.”
백수룡은 말없이 팔짱을 꼈다. 계속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위지열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무림맹의 합공으로 전대 교주님이 돌아가시고, 가증스러운 무림맹 놈들이 본교를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장로와 가주들은 대부분 죽거나 훗날을 기약하며 도망쳤습니다. 훗날을 도모하라. 그것이, 교주님의 마지막 명이었습니다.”
“…….”
백수룡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대부분 무림의 전대고수들이었고, 그마저도 쉬쉬하는 이야기였다.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이 없었지요. 교주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물론이고, 제자도 없었지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대의 혈마는 자식은커녕 제자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이 워낙에 고강한 무인이었기에, 교 내에서도 크게 걱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허나 예상치 못한 무림맹의 공격으로 교주님이 돌아가시면서, 역천신공의 후계자는 대가 끊겼습니다.”
“잠깐만.”
백수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최근에 혈교가 다시 발호했습니다. 그럼 교주가 없는 채로 움직였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사도라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사도?”
그 순간, 백수룡은 혈령자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일사도께서 제게 이르시기를, 남궁세가를 멸문시키고 음양마존께서 안배하신 탈혼마인들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흩어진 교의 세력을 수습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일부 장로들과 가주들은 합류한 것으로 압니다.”
“사도는 정확히 어떤 자들입니까?”
“저도 잘은 모릅니다. 한 명 한 명이 가주와 장로들을 압도할 만한 무공을 지녔고, 다음 대 교주 후보들을 내세우며 경쟁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
“저에게도 권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사도가 내세우는 교주를 본교의 적통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백수룡의 예리한 질문에 위지열은 허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본가는 힘을 잃었습니다. 돌아가 봤자 죽을 때까지 이용이나 당할 것이 뻔했지요. 저는 무공이 변변치 않고, 유일한 혈육은 손자뿐입니다. 천이가 인질이 될 것은 너무나 뻔했지요.”
위지열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무림맹에게서도, 저를 찾는 혈교에게서도 도망쳤습니다. 하나뿐인 손자만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위지열의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비밀을 솔직하게 다 쏟아낸 노인의 표정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저는 전대 교주님을 모셨습니다. 무공은 변변치 않으나, 사람을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압니다. 절 처음 보셨을 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명검이라고 하셨죠.”
백수룡이 씩 웃으며 옛 이야기를 하자, 위지열의 입가에도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제 눈으로 보건대, 당신은 혈마신교의 적통을 이으셨습니다. 역천신공을 익혔고, 그 성취에서 벌써 전대 교주님의 그림자가 보일 정도입니다.”
“…….”
위지열은 모르지만, 백수룡은 전대 교주를 직접 보았다.
때문에 저 말이 엄청난 극찬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위지열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신다면 진정한 혈교의 지존이 되실 수 있습니다.”
백수룡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관심 없습니다.”
“가볍게 대답하실 일이 아닙니다.”
위지열은 뭔가를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을 내려주신다면, 제가 천하에 흩어진 교도들을 규합하겠습니다.”
“뭐라고요?”
백수룡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위지열의 표정은 진지했다.
“저처럼 현 체제에 반발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과 접촉해 보겠습니다. 진정한 역천신공의 후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어르신!”
“천하를 발 아래에 둘 기회입니다. 정녕 관심이 없으십니까?”
위지열의 눈빛이 백수룡을 꿰뚫을 듯 형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