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09
308화. 쥐를 잡으려면 (4)
쿵!
두꺼운 서책이 탁자 위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왕발이 서책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무림맹 인명록입니다.”
“……생각보다 양이 많군요.”
인명록(人名錄)이라고 해서 단순히 이름만 적혀 있는 것은 아니다.
백수룡은 벽돌처럼 두꺼운 서책의 표지를 넘겼다.
서책의 첫 장에는 무림맹주 야율황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무림맹에 소속된 모든 무인의 이름과 사는 곳, 사용하는 무공, 주변 인물 등의 신상정보가 정리돼 있습니다.”
“과연…….”
십존의 일원이자 무림맹의 맹주답게, 야율황에 관한 내용은 굉장히 많고 상세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인명록에 적힌 내용을 살피는 백수룡에게, 왕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보고 들으신 내용은, 일이 끝난 후엔 모두 잊어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인명록은 결코 외인에게 보여서는 안 될 개방의 일급 기밀이다.
지금껏 알아낸 사항을 모두 기록해 둔, 정보를 취급하는 방의 보물.
그러나 방주를 공격한 범인이 무림맹과 관련돼 있음을 알게 된 이상, 왕발은 청룡신협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찝찝하긴 한가 보군.’
백수룡은 왕발의 표정에 드러난 불안감을 조금 덜어 주기로 했다.
“맹도 짐작은 하고 있을 겁니다. 개방이 인명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요. 무림맹에도 분명 비슷한 게 있을 거고요.”
“……직접 보신 겁니까?”
“꼭 봐야 아나요? 구파일방이라면 모두 다 이런 게 있을 겁니다. 물론 정보의 질은 개방이 가장 높겠지만요. 후개도 이미 파악하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
과거 혈교에도 무림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인명록이 있었다.
적을 알아야 전쟁에서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으니까.
비록 구파일방이 서로 적은 아니지만, 무림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중에서도 개방은 정파 최대의 정보조직.
백수룡이 왕발에게 가장 먼저 무림맹 인명록을 요구한 이유였다.
‘그래도 이건 상상 이상이군.’
지금 읽고 있는 인명록.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상대의 약점을 잡거나 매장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을 듯했다.
물론 개방이 그런 의도로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다 쓰기 나름이지.’
백수룡은 씩 웃으며 서책을 빠르게 넘겼다.
지위 순으로 정리한 듯, 맹주 다음에는 오단의 단주들에 관한 신상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들에 대한 정보도 맹주만큼은 아니나, 분명 쉽게 알아내지 못할 것들이었다.
탁.
백수룡이 서책을 덮어 왕발에게 돌려주었다.
“잘 읽었습니다.”
“……벌써 다 읽으셨습니까?”
“전부 다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오단의 단주들, 그 밑에 있는 대주들, 그 외에 맹의 간부들의 정보만 파악했습니다.”
독마의 생사독이 쓰였다.
무림맹 내부에 혈교가 심어 둔 쥐새끼, 혹은 끄나풀이 있다면, 최소한 대주급 이상의 지위일 것이다.
그 이하는 굳이 지금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의심되는 사람은…….’
맹주가 부재 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 혹은 그 주변인.
“오단의 단주들 중, 지금 무림맹에 머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
“……멸사단주, 그리고 의천단주입니다.”
왕발이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 * *
무림맹주의 집무실.
그곳에는 현재 공석인 맹주를 대신해, 오단의 단주 중 한 명이 맹주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흐아암. 대체 내가 왜 맹주 대리를 해야 하는 거야?”
멸사단주는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두 발은 탁자 위에 방만하게 올려놓은 채였고, 눈은 졸음 탓에 반쯤 풀려 있었다.
좀이 쑤시는지 몸을 계속 이리저리 비틀었는데, 유연하기가 고양이 같았다.
새카만 흑의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몸에 딱 맞게 제작돼 있었고, 허리춤에는 날렵한 흑도 두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멸사단주 류설.
사파의 무인들은 그녀를 독안마도(獨眼魔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왜냐고? 그야 네가 단주들 중에 유일하게 맹주 자리에 쥐똥만큼도 관심이 없는 놈이니까.”
류설의 건너편에 앉아 쌓인 서류를 읽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빈정거렸다.
“그리고 정작 일은 내가 다 하는데, 하는 일도 없는 네가 피곤할 게 뭐가 있어?”
단주에게 거침없이 반말을 일삼는 그는 멸사단의 부단주, 모용준이었다.
류설과 모용준은 둘 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십 대 중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외형을 지녔으나, 실제 나이는 그보다 열 살 이상 많았다.
부단주의 잔소리에 류설이 귀를 후비며 투덜거렸다.
“하는 일이 없다니. 너 이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지? 하긴, 하찮은 부단주 따위가 알 리가 없지.”
“……단주라는 녀석이 이 모양이니 우리 멸사단이 오단 중에서 가장 무식하고 교양 없다는 소리를 듣지.”
의천(義天). 철혈(鐵血). 정의(正義). 신검(神劍). 멸사(滅死).
무림맹이 자랑하는 오단.
오단의 단주들은 무림의 큰 행사에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우를 받는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동등한 위치인 건 아니다.
단주들 한 명 한 명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출신의 고수로, 실제로도 높은 배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멸사단은 다르다.
멸사단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이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내놓은 자식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낭인 출신, 무림맹에 투항한 전직 사파 출신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이유 탓에, 오단 내에서도 멸사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썩 곱지 않았다.
한마디로 천덕꾸러기 집단.
류설은 그런 말 많고 문제 많은 멸사단의 단주이자, 실력으로 멸사단의 존재 이유를 몇 번이나 증명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장에서의 이야기일 뿐, 맹주 대리를 맡은 류설은 게으른 고양이처럼 탁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지루하고 귀찮아. 맹주 그 늙은이는 이 지겨운 짓거리를 어떻게 매일 하는 거지? 나보다 못 견딜 성격인데…….”
“한량 같은 소리 그만하고, 여기 있는 서류에 결재나 해!”
모용준은 단주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그러곤 자신이 우선 검토한 서류를 류설에게 내밀었다.
류설은 흐느적거리며 품에서 무림맹주의 직인을 꺼냈다.
맹주가 오대학관 순방을 떠나기 전, 잃어버리거나 함부로 사용하면 대가리를 깨 주겠다고 단단히 경고하고 맡긴 물건이었다.
“하여튼 그 영감탱이는 내가 제일 만만하지.”
류설은 모용준이 건넨 서류를 대충 훑어보더니 도장을 쾅쾅 찍어댔다.
그 모습을 본 모용준이 기겁을 했다.
“미친것아! 제대로 읽어 보고 찍으랬지!”
“유능한 우리 부단주가 어련히 잘 확인하셨을까.”
“너란 녀석은 진짜…….”
그 무책임한 대답에 모용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맹주한테 대가리 깨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흐흐. 내 대가리가 깨지면, 네 대가리는 무사할 것 같아?”
“아오! 진짜 단주만 아니었어도……!”
매일 티격태격하지만, 두 사람은 십 년 넘게 한솥밥을 먹은 사이였다.
함께 사선을 넘은 적도 여러 번. 수많은 전장을 함께한 전우였다.
“대충 끝내고 오늘은 술이나 진탕…….”
그 순간, 멸사단주의 하나뿐인 눈동자에서 사나운 투기가 튀었다.
어느새 자세를 바로 한 류설은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떤 호로자식이 예의도 없이 맹주실 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와?”
“나더러 자네의 허락이라도 받으란 말인가?”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었다.
걸음마다 절도가 있었고, 기세를 드러내지 않음에도 묵직하고 단단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는 류설이 피워 내는 살기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멸사단주. 그 누구도 아닌 자네가 예의를 논하는 것이 우습군.”
의천단주 진광.
그는 소림의 속가제자 출신으로, 특출한 재능을 아쉬워한 장문인이 직접 본산의 절기를 사사한 기재였다.
또한 진광은 천하십대상단 중 하나인 천하상단의 아들로, 장남이 아니어서 상단을 잇진 못했지만, 무림맹과 천하상단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맹주 대리. 자네가 능력에 부친다면 내가 대신 업무를 맡아 줄 수도 있네.”
“됐어. 우리 부단주가 일을 아주 잘하거든.”
의천단주는 공공연히 다음 대 무림맹주를 노리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다음 맹주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맹주 자리는 이만 포기하는 게 좋을걸. 맹주 그 영감, 요즘 혈교가 나타나서 기운이 펄펄 날잖아. 앞으로 백 년은 더 해 먹으려고 할걸.”
“…….”
탁자 위에 두 다리를 턱 하니 올린 류설이 낄낄 웃었다.
의천단주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네는 나이가 마흔이 가깝도록 철이 안 드는군.”
“그쪽은 쉰이 가깝도록 권력욕을 못 버렸잖아? 소림의 제자가 그래도 돼? 공수래공수거. 스님들이 그런 거 안 가르쳤어?”
“……관두지. 자네와 말싸움이나 하자고 온 게 아니니.”
“그럼 뭐하러 왔는데?”
의천단주가 괜히 이곳을 찾아올 리 없다는 것은 류설도 알고 있었다.
“청룡신협에 대한 이야기, 들었나?”
“당연히 들었지.”
바로 어제였다.
청룡신협이 이곳 무한에 나타났고, 일행을 남겨 둔 채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
호사가들은 뇌룡신검 남궁수에 대한 소문을 떠들기에 바빴지만, 무림맹은 청룡신협 때문에 비상 아닌 비상이 걸렸다.
그가 무림맹의 무공 총사범이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보고 싶긴 해.”
류설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녀는 청룡신협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었다.
아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충분한 실력이 있다면 신임 총사범으로 인정할 것이고, 아니라면 무시할 생각이었다.
능력이 모자란 자에게 멸사단의 훈련을 맡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맹주가 인정한 놈이니, 약할 리는 없겠지만…….’
창천검왕 남궁제학이 죽고 빈 한 자리.
맹주는 그 한 자리가 청룡신협에게 어울린다고 선언했다.
류설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십존의 말석이라…….”
“말장난에 불과하다. 애초에 십존은 맹주 한 명이 인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의천단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류설도 그 말에 동의했다.
세상에는 맹주의 말을 인정하지 못하는 고수들이 많았다.
당장 오단의 단주들만 해도, 다들 비어 있는 십존의 한 자리를 노려볼 만한 강자들이었다.
류설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비무로 조천상을 꺾었다던데. 그 정도면 아주 자격이 없진 않잖아?”
“천무대주를 우리와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은 어림도 없지.”
류설이 씩 웃으며 말했다.
화산검호 조천상은 그 연배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오단의 단주들은 그보다 연배도 실력도 윗줄이었다.
의천단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청룡신협의 무공의 고하와 상관없이, 나는 그를 무림맹 총사범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
“그는 의천단을 모르기 때문이다.”
의천단주의 두 눈에서 정광이 번뜩였다.
“의천단에는 의천단만의 색깔이 있다. 이제 와서 다른 누군가에게 훈련을 맡길 생각은 없다. 멸사단도 마찬가지 아닌가?”
“맞는 말이긴 한데…….”
훈련시키는 것만 따진다면, 멸사단이 훨씬 더 힘들 것이다.
멸사단은 그 기질이 무척 사납다.
무림맹주, 멸사단주를 제외하면 다른 상관들의 말도 거의 들어먹지 않는다.
류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청룡신협이 맹에 방문하면 쫓아내기라도 하자는 건가?”
“정중하게 손님으로 받아 줘야겠지. 하지만 손님에서 선을 그어야 한다. 이미 철혈, 정의, 신검단에도 동의를 얻었다.”
“…….”
류설은 이 일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잖아? 애초에 올 거였으면 어제 왔겠지.”
“……분명 올 거다.”
의천단주는 확신을 담아 말했지만, 류설은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의천단주의 말이 사실이 되었다.
콰아아앙!
대기가 진동할 정도의 폭음.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침입자다!””
무인들의 고함과 함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두 단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침입자라고?”
“무림맹에?”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 두 사람은 순식간에 폭음이 터진 장소에 도착했다.
“누구냐!”
“멈춰라!”
무림맹 정문에서 조금 안쪽.
백 명이 넘는 무인들이 양쪽에서 한 사내를 포위하고 있었다.
통일된 백의무복을 입은 자들이 의천단, 흑의무복으로 색깔만 같고 복장은 각양각색인 무인들이 멸사단이었다.
부서진 정문을 뒤로하고, 그들에게 포위된 청년이 씩 웃었다.
“반갑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얼굴.
여유롭게 뒷짐을 진 모습과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푸른 무복.
허리춤에는 멋들어진 보검.
따로 소개를 하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 부임하게 된 총사범 백수룡이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군.”
“…….”
그 뻔뻔한 자기소개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백수룡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침입에 대비한 훈련이 나름 잘돼 있는 것 같군. 몇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한데…… 앞으로 하나씩 고쳐 나가면 될 거고.”
그는 자신을 둘러싼 무인들을 평가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상대가 적이 아니라 상관이라는 사실에, 무림맹 무인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저 녀석 맞지? 청룡신협.”
“……그래 보이는군.”
류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의천단주가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 애들 훈련 상태를 점검하는 거야? 그러려고 정문을 부순 거야?”
“…….”
신임 무림맹 총사범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미친놈이었다.
“아하…… 아하하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림맹주 대리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