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317
316화. 일단 이 새끼들부터
사위가 고요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바람도 그대로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그 녀석은 때려 부술 줄만 알지, 연기나 잠입 같은 건 전혀 못 하거든요.”
모용준은 시간이 멈춰 버린 공간에 찾아든 불청객처럼 입을 열었다. 지극히 평온한 어조였다.
“안 그래?”
그는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류설을 바라보며 웃었다.
“너…….”
류설은 갑자기 나타난 모용준을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모용준은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다.
……그런데 모든 것이 낯설었다.
행동, 말투, 표정. 걸어오는 모습까지.
껍데기는 그대로인데, 저 안에 있는 것도 정말 내가 아는 모용준일까?
“이거 봐.”
모용준은 표정 관리를 전혀 못 하는 류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 큰 처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뭐 이 자식아?”
“옷이 그게 뭐냐?”
류설은 헐렁한 잠옷 위에 외투를 대충 걸치고 있었다.
백수룡이 보낸 서찰을 보자마자 보이는 대로 외투를 걸치고 뛰쳐나온 탓이었다.
노출이 심한 차림은 아니었다. 외투 안쪽으로, 헐렁한 잠옷 사이로 쇄골이 드러난 정도였다.
전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꼴도 수없이 보았는데, 모용준은 그럴 때마다 잔소리를 해댔다.
“남자라도 꼬시게? 아서라. 네 옆에 있는 미남들이 열 살 가까이 어린 건 알지?”
“……뒈질래 진짜?”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
모용준은 구박하고 류설은 짜증을 낸다.
이 익숙한 상황에, 류설은 다소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모용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서 갈아입고 와.”
그는 챙겨온 무복을 류설에게 던지며 무너진 폐가 뒤편을 턱으로 가리켰다. 몸을 가릴 정도의 벽은 남겨져 있었다.
옷을 받아 든 류설은 잠시 망설였다.
“너…….”
“옷부터 갈아입고 오라고. 어디 안 도망갈 테니까.”
“……그래.”
류설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모용준은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백수룡과 시선을 맞췄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얼굴이군요.”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나?”
모용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기회를 봐서 처리할 생각이었습니다.”
휘이잉-
그들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모용준이 흐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저를 찾아낼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더 빨리 움직일 걸 그랬군요.”
“역시…….”
“모용준! 지금 한 말 무슨 뜻이야?”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류설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모용준이 그녀를 돌아보며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잖아.”
자백이나 다름없는 말.
모용준은 자신이 배신자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체념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생각보다 빨리 들켜서 아쉽다고 말하고 있었다.
“……협박당한 거지?”
이를 악문 류설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 약점을 잡힌 거잖아. 어휴 병신아. 쪽팔리게. 솔직하게 말해 봐. 누나가 해결해 줄 테니까. 어떤 새끼들이야?”
“…….”
“맹주 영감이 무서워서 말 못 했냐? 걱정 마. 씨발 죽이기야 하겠어? 지랄하면 내가 옆에서 같이 개겨 줄게.”
“…….”
“그, 뭐냐. 이중 첩자 작전이라고 하면 되잖아? 내가 시킨 거로 하고…….”
“…….”
“뭐라고 말을 해 봐, 이 개새끼야. 말을 하라고.”
류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말없이 흐릿하게 웃는 모용준을 보며, 그녀는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그녀의 이십 년 지기는, 혈교에 협박을 당하거나 약점을 잡혀서 배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의지였다.”
“미친 새끼가 진짜!”
순식간에 달려든 류설이 모용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에서 거센 분노가 타올랐다.
“대체 왜? 네가 뭐가 아쉬워서?”
류설의 몸에서 일어난 사나운 기파가 살갗을 저밀 듯했다.
웬만한 무인도 정신을 잃거나 다리가 풀릴 만한 살기.
그러나 모용준은 그녀의 흉포한 기세를 덤덤히 받아넘겼다.
오히려 류설의 손을 떼어내며 피식 웃었다.
“강해지고 싶었거든.”
“……뭐?”
“강해지고 싶었다고. 누구보다 더. 특히 너보다 더.”
거짓말이 아니었다.
무인으로서 가장 순수한 욕망.
류설은 모용준의 눈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미친 새끼.”
그녀는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모용준을 노려봤다.
“고작 그딴 이유로 배신을 해? 안 되겠다. 일단 처맞아야 정신을…….”
“손 치워.”
화아악-!
피부를 자극하는 섬뜩한 감각에, 류설은 본능적으로 훌쩍 뒤로 물러났다.
‘베일 뻔했어.’
조금만 늦었으면, 손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류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용준은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킥킥 웃었다.
“넌 몰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매일 마주하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무슨 말이야…….”
반드시 뛰어넘겠다며 이를 악물고 노력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기만 했다.
그 세월이 이십 년이었다.
“항상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니 몰랐겠지.”
열등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실없이 웃었다.
끓어오르는 승부욕을 외면하며 장난을 치고 웃었다.
차원이 다른 괴물이라고, 가장 친한 친우라고,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애써 변명하고 위안삼아 체념하며 웃었다.
웃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야.”
모용준의 흐릿한 미소가 뒤틀린 조소로 변하는 순간.
존재감이 희미하던 사내의 몸에서, 살이 베일 듯한 날카로운 기파가 폭발했다.
촤촤촤촤촤-!
무형의 칼날이 사방을 할퀴었다.
모용준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바닥에 수십, 수백이 넘는 검흔이 새겨졌다.
“무슨……!”
류설은 경악한 표정으로 모용준은 바라봤다.
지난 이십 년간, 그녀는 모용준이 저런 무공을 펼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류설. 이게 내가 널 배신하고 얻은 힘이야.”
“……!!”
그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백수룡은 모용준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저 녀석이 익힌 무공. 설마…….’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감각.
표정을 굳힌 백수룡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혈교에서 건네준 마공을 익힌 건가?”
백수룡은 저것이 마공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물었다.
혈교에 저런 마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건, 마공이 아니라…….
“훨씬 더 좋은 걸 받았소.”
모용준이 웃으며 허리춤의 검을 툭툭 두드렸다.
“검의 선택을 받았지.”
“…….”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수룡은 익숙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무극검이다.’
검존이 창안한 무극검에서 상당 부분 변형되긴 했지만, 자세히 살필수록 무극검 특유의 기파가 느껴졌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검존 모용혼.
멸사단부단주 모용준.
두 사람은 같은 모용세가 출신이었다.
무공의 창안자와 같은 핏줄인 만큼, 모용준은 무극검을 익히기에 적합한 체질을 타고났을 확률이 높았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혈교가 모용준에게 접근할 이유는 충분했다.
‘천이가 익혔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야.’
모용준의 체질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동안 수많은 실험이 자행되어 부작용을 줄였을 수도 있다.
백수룡은 아마 둘 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봤자 가짜지만.”
“지금 뭐라고 했지?”
아무리 무극검을 익혔다고 해도, 백수룡은 모용준의 저런 여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너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생각인가?”
멸사단주 류설은 극강의 고수다. 맹주를 제외하면 무림맹에서도 아마 당해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남궁수도 있고, 비록 내공과 두 팔을 못 쓰지만 백수룡도 있었다.
혼자서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면, 모용준의 무위는 십존에 버금간다는 의미였다.
‘강해 보이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야. 뭔가 숨겨 둔 패가 더 있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모용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내가 언제 혼자 왔다고 말했던가?”
딱!
모용준이 손가락을 부딪치자, 어둠 속에서 흑의인들이 나타나 세 사람을 포위했다.
‘저쪽이 방주를 습격한 놈이겠군.’
백수룡은 유독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 중년인을 바라봤다.
멀리서도 지독하리만치 강한 독기가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당대의 독마.’
다른 자들도 비슷하지만 약한 독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독마의 제자이거나 사제들인 모양이었다. 그들 또한 한 명 한 명이 강자였다.
어느새 모용준 곁으로 다가온 독마가 말했다.
“회포는 다 풀었나?”
모용준은 백수룡과 남궁수를 가리켰다.
“약속대로 당신은 저 녀석들을 죽여. 류설은 내가 상대한다.”
“난 독을 쓴다. 그리고 난전 중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
모용준도 그것은 잘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날이야.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난 이곳에서 떨어진 곳으로 가서 류설과 싸울 거다.”
“혼자서 죽일 자신은 있고?”
독마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모용준을 바라봤다.
그 순간,
“류설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나밖에 못 죽여.”
오싹.
모용준의 눈에서 느껴지는 광기에, 독마는 큭큭 웃었다.
“알겠다. 다만 너무 오래 걸리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 두도록.”
“그럴 일은 없어.”
독마와 대화를 끝낸 모용준은 류설을 불렀다.
“따라와라, 류설. 저쪽에 서로 죽이기 좋은 장소가 있어.”
“……미친놈. 싸울 거면 여기서 싸워.”
류설은 고집을 부렸지만, 모용준은 누구보다 류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날 따라오지 않으면, 난 일단 의천단주를 찾아가 죽인 후에, 맹주실로 가서 불을 지를 거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전부 죽일 거야.”
“미친 자식이……!”
“선택은 네 몫이다.”
할 말을 끝낸 모용준은 뒷걸음질을 치더니 몸을 돌려 경공을 펼쳤다.
백수룡이 어깨로 류설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쫓아가. 말한 대로 하고도 남을 미친놈이니까.”
“둘이서 버틸 수 있겠어? 특히 넌…….”
류설은 백수룡의 등 뒤로 채워진 수갑을 바라봤다.
게다가 그는 내공도 쓰지 못한다.
외공만으로도 웬만한 무인보다 뛰어난 고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당연하지. 여긴 우리 둘이면 충분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백수룡의 모습에, 류설은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녀석이라면.
“금방 올 테니 버티고 있어.”
모용준을 막지 못하면 끔찍한 참사가 발생한다. 류설의 눈에 단호한 결심이 어렸다.
휘이익!
전력으로 경공을 펼친 류설이 모용준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독마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남궁수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백수룡. 정말 방법이 있는 건가?”
“당연하지.”
이제 자리에는 백수룡과 남궁수, 그들을 포위한 독마와 그가 데려온 흑의인들만이 남았다.
“청룡신협. 본교의 팔장로를 죽였다고 하기에, 그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다.”
느긋하게 말하는 독마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등 뒤로 수갑이 채워졌고, 내공조차 쓰지 못하는 상대.
벌레를 밟아 죽이듯 간단히 죽일 자신이 있었다.
저기서 금안을 번뜩이는 뇌룡신검이라는 녀석이 꽤 강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한 명이었다.
“직접 보니까 어때? 소문보다 낫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신이 얼마나 불리한지 알 텐데도, 백수룡은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피식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여유롭지?”
독마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백수룡이 대답 대신, 몸을 옆으로 돌려서 현철로 된 수갑을 보여 주었다.
“내가 이걸 차고 있었던 며칠 동안, 밥을 어떻게 먹었을까?”
“……옆에 있는 뇌룡신검이 먹여 주기라도 했나?”
“미쳤나?”
“미쳤어?”
남궁수와 백수룡이 동시에 발끈했다. 백수룡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기로 했다.
철컥.
수갑이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래로 뚝 떨어졌다.
백수룡이 손목을 돌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얇은 철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열쇠가 왜 필요해? 철사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지 풀 수 있는데.”
“고작 두 팔이 자유로워졌다고 달라질 건…….”
“아, 그리고 내가 먹은 산공독 말인데.”
백수룡은 스스로 봉인해 두었던 내공을 단숨에 끌어올리며 씩 웃었다.
“상했는지 효과가 없더라고.”
콰콰콰콰콰콰!
푸른 무복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쳤다. 막대한 기파가 사방으로 질주했다.
“이 자식, 내공을 쓸 수 있었으면서……!”
며칠 동안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궁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속여서 미안한데, 나중에 얘기하자고.”
“만독진(萬毒陣)을 펼쳐라!”
백수룡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독마와 그 패거리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일단 이 새끼들부터 다 때려잡은 후에 말이야.”